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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참 대단한 분이에요 (70/92)


#70. 참 대단한 분이에요
2022.12.01.



 


“어머나, 도현이가 좋아하는 오색전도 마침 있네요. 잘 먹을게요. 너무 감사하네요. 자꾸 이렇게 챙겨주시니.”

“내가 좋아서 하는데요, 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여운 강아지가 먹어준다고 생각하면 뭔들 못하겠어요.”

미미를 쓰다듬고 있던 도현은 강아지라는 말에 영숙을 쳐다보았다.


“강아지? 할머니가 미미 주려고 만든 거예요?”

귀여운 강아지라는 표현이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르는 도현이 천진하게 묻자 영숙과 시터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우, 근데 도현아. 할머니랑 미미 만나서 반가운데 어쩌지? 우리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자.”

“왜?”

그런데 무슨 일인지 별안간 시터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더니 좋지 않은 안색으로 말했고 도현은 눈썹을 올리며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이, 이모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가야겠어.”

“화장실? 난 미미랑 놀고 싶은데. 힝…….”

“이모가 너무 급해서 그래. 점심때 먹은 게 잘못되었나 봐!”

“도현이는 들어가기 싫은데…….”

도현은 칭얼거렸고 아이의 시터는 정말 급한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빨리 갔다가 다시 나오자! 웅? 빨리!”

“그냥 이모 혼자 갔다 오면 안 돼?”

“안 되지. 그러면 안 돼.”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영숙이 소탈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이구, 참. 난 또 뭐라고. 그거 잠깐인데 내가 봐주면 되죠. 화장실도 저기 공원 화장실 보이는데 뭘 집까지 가요. 가까운 데로 빨리 다녀오시지.”

“그, 그래도 될까요, 그럼?”

“어서 뛰어갔다 오세요!”

“네, 죄송해요!”

시터는 방금 받은 전이 담긴 통을 벤치 위에 올려두고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영숙은 미미와 놀고 있는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뽀얀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만지니 정말 보드라웠다.


“귀여운 녀석…….”

그런데 그렇게 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영숙의 눈동자가 불현듯 반짝였다.

가만…….


“도현아.”

“네?”

영숙은 눈을 흘끗 돌려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친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절대 아이를 맡기지 않았을 바로 이 상황.


“우리 도현이 할머니 집에 놀러 갈래?”

도현은 그 말에 까만 눈을 빛내며 영숙을 보았다.


“네! 할머니네 갈래!”

신이 나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는 아이를 보며 영숙은 아이보다 더 신이 났다.

무해한 아이의 맑은 미소가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러웠다.


“아이구, 예뻐라, 내 새끼.”

 

***



-워, 원장님!

전화를 걸자마자 다짜고짜 울부짖는 베이비시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서는 경직되었다.


“이모님, 왜 그러세요?”

예전에 한 번 겪었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원장실 책상 앞에서 벌떡 일어난 현서에게 시터가 울먹이며 고했다.


-도, 도현이 할머니가 도현이를 데리고 어딜 가셨나 봐요!

“네? 누구요?”

도현이 할머니라고 해서 순간 현서는 머리가 멈춘 듯했다. 도현이 유일하게 할머니라고 부르는 그레이스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바로 떠오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도, 도현이……. 할머니가요…….

“도현이 할머니라니요!”

현서가 부르짖자 시터는 더욱 좌절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사실은…… 도현이 할머니가 올 초부터 도현이 보러 놀이터에 자주 나오셨었어요. 원장님이랑 도현이 아빠랑 이혼하셔서 못 보시게 되었다면서…….

현서는 일순 뒤통수를 거하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서 있었다. 그제야 그 할머니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혹시 그…… 미미라는 강아지 주인이라는…….”

이미 전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맞아요! 그 집이에요! 근데 지금 전화를 안 받으세요!

“네에?”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한영숙이 또 무슨 짓을!


-죄, 죄송해요, 원장님!

시터가 죄인처럼 울며 토로했다.


-그동안 할머니가 도현이 너무 예뻐해 주시고 항상 잘해주셔 가지고 이렇게 당황스럽게 행동하실 줄은 몰랐어요.

혼비백산한 현서는 시터가 하고 있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일까.


-제가 화장실이 급했어서 도현이 할머니가 잠깐 봐주신다고 했거든요. 딱 5분 정도만 봐주셨는데, 나와보니까 할머니랑 도현이 둘 다 안 보이더라고요. 잠깐 근처에 가신 건가 싶어서 기다려봐도 안 와요…….

그러니까 올 초에 이미 한영숙은 도현의 뒤를 밟아 노는 곳을 알게 되어 그동안 주변을 맴돌았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개를 싫어하는 한영숙이 미미라는 강아지로 도현이를 꾀어내어서.

그러더니 급기야는 데리고 사라졌다고?


-원장님……. 그래도 도현이 하, 할머니니까 별일은 없겠죠?

한영숙이 스스로의 입으로도 아들 아들 찾으며 진성의 귀한 손이라고 떠들어댔으니 무사하기야 하겠지만, 문제는 아이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으면 어쩜 좋단 말인가.

어렸던 도하를 데리고 진성에 딜을 했듯이 도현을 데리고 또 그렇게 하면 어쩌나.

자칫하면 언제까지 도현을 못 보는 이 상황이 지속될 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아이의 소식이 단절될 수 있다는 막막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지금 이모님은 어디세요!”

-저는 계속 놀이터예요. 혹시 어디 마트에 과자라도 사러 간 걸지도 모르니까, 다시 오시지는 않을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30분이 다 되어가요.

현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선 이모님은 그 자리에 계속 계세요. 제가 찾아볼게요.”

-네, 원장님. 혹시, 경찰에도 연락해야 할까요?

“일단 가족들이랑 얘기해볼게요.

후다닥 전화를 끊은 현서는 원장실을 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 원장실을 나가면서 생각할 것도 없이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역시 전화는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현서는 소용없는 짓인 줄 알고 있었지만 문자로 영숙에게 도현이 어디 있냐고 물으며 왜 이런 일을 하셨는지 물었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곧바로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릎 꿇은 모습을 본 이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던 도하에게.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었다. 눈물을 닦으며 현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제발 받기를.

다행히 신호음은 오래가지 않아 곧 멈췄다. 현서는 상대가 말을 떼기도 전에 급히 외쳤다.


“오빠!”

워낙 긴박했던 목소리 탓인지 도하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오빠! 어머니가 도현이를 데리고 사라졌어요!

-뭐?

돌연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도하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어머니가 도현이를 마음대로 데리고 갔다는 거야?

그 목소리에는 좌절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지금 연락도 안 되고! 내 전화도 이모님 전화도 다 안 받아요! 우리 도현이 어떡해요!”

도하의 목소리를 듣자 더욱 북받쳐 오르는 두려움에 현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채 회장님 댁에서 쫓겨났다면서요. 어디 사시는지 오빠는 알아요?”

-모르는데. 하…….

도하가 절망적으로 내뱉었다. 도하는 혹시 알려나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그럼, 주혁이는 알까요?”

-주혁이도 어머니가 걔 돈까지 투자했다가 사기당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주혁이 전화도 안 받나 봐. 제수씨가 나한테 어머니랑 연락 안 되냐고 하소연했어.

“하! 어떡해! 우리 아가 그럼 어디 가서 찾아야 해요!”

-내가 어머니한테 전화해 볼게. 그나마 지금 어머니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나일 거야.

도하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 역시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티가 났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현서야. 내가 금방 도현이 데리고 올게.

“……알았어요.”

-다시 연락할게. 그때는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줘.

“그래요.”

그가 어찌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서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지금은 도하를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주차된 차에 오른 그녀는 도현이 사라진 제 동네를 향해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

도하는 사무실에서 나가며 곧장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걱정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가 있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영숙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도하야.

도하는 복도 위에서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어디 계세요.”

그는 그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왜…… 그러니? 갑자기 전화해서는.

“아시고 받으셨잖아요.”

-…….

“도현이 현서한테 당장 데려다주세요!”

아무도 없는 복도에 그의 격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 도하야. 그럼 나 좀 도와줘. 그 돈 문제만 좀 해결해 줘.

“하…….”

도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을 내쉬었다.

역시.

또 어미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저와의 문제 때문에 현서에게 한 번 더 상처를 안겼다.

이미 지금까지도 현서에게 이보다 더 미안해질 수 없을 만큼 미안한데, 여기서 또…….

도하는 경고하듯 어미에게 물었다.


“지금 어디시냐고요.”

질문보다는 위협에 가까웠다.


-도, 돈 보내 주면 말해줄게. 진짜야.

어떻게 이렇게 모친이라는 사람이 끊임없이 정을 떨어지게 만드는 건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끝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른 끝을 보여주는 건지.


“어머니……. 참 대단한 분이에요.”

-미안하다, 도하야. 나도 살아야지, 응?

전화기를 들고 있던 도하는 대상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럼, 만나서 얘기하죠. 내 새끼 몸값이 얼마인지.”

-지, 진짜지?

조금 밝아진 영숙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제 말 안 믿으시면, 달리 해결하실 방법 있어요?”

도하가 냉소적으로 묻자 아쉬운 영숙이 수락했다.


-아, 알았다. 어디서 만날지 장소 보내 주마.

“도현이는 지금 어쩌고 있어요.”

조모란 사람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도현을 생각하자 이 질문을 하고 있는 입안이 썼다.


-도현이 걱정은 안 해도 돼. 강아지랑 잘 놀고 있다. 간식도 먹였고.

도하는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갈게요. 주소 보내세요.”

그래도 제 손주에게 해를 끼치진 않겠지 싶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서하 때도 방치와 학대의 상황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었으니까.

***



“저 왔어요, 문 여세요!”

강압적으로 외치는 말투에 영숙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나 허름한 집의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도하는 문짝을 잡아채 확 젖혔다.


“아이쿠, 깜짝 놀랐잖니.”

영숙이 움찔 놀라자 도하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도현이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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