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뭘 하려는 거야 (72/92)


#72. 뭘 하려는 거야
2022.12.08.


영숙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저 맥없이 울며 아들의 얼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 도하야! 너 정말 이 어미를 버리려는 거니?”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매섭게 던진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가차 없이 돌아섰다.


“도하야아!”

아들의 거침없는 발걸음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어서 절대 어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영숙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라는 것을 절절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빛나던 인생은 끝이 났고 쓸쓸하고 암울한 미래만이 남아 있다는 걸.

이제 저에겐 아무도 없었다. 아들들도 없었고 남편도 없었고.

그리고 손주들……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혼자였다. 철저히 외로운 인생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감당할 수 없는 공포심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도하야! 그럼 그 아이…… 그 아이라도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되겠니?”

이내 면회실에는 영숙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돈 달라고 안 할게! 돈 안 줘도 되니까, 그냥 내 손자! 도현이 얼굴 한 번만 더 보여줘어!”

지금 이 순간 왜 그 사랑스럽던 아이의 얼굴만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늘 붙임성 있게 다가오던 아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던 아이. 상냥하게 웃어주던 아이. 할머니의 슬픈 얼굴을 보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여주던 아이.

그 아이를 이제 다시는 가까이서 볼 수 없는 거야?


“내가 다 잘못했다! 현서한테도 너무 미안해! 내가 다 사죄할게! 제발 도현이 한 번만 만나게 해주렴!”

이미 아들 도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영숙은 계속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 간절한 외침이 아들에게 들리기를 바라며.

도현아…….

이 할머니가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은 거니?


“흐흐윽…….”

결국 영숙은 큰소리로 통곡을 하며 무너졌다.


 

***



“아버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다. 지난주부터는 정상적으로 출근도 하기 시작했고.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채 회장님과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다.

서하 죽음의 진실을 아시고 난 직후에는 건강에 타격을 받아 결근이 잦으셨는데 최근에는 그나마 회복하셨다고 한다.


-이리 자꾸 일이 터지니 내가 면목이 없다.

충격이 한창일 때는 모든 곳과 연락을 끊고 앓아 누우시더니 일어나실 만하게 되신 이후부터는 자꾸만 사과를 하셔서 현서는 더욱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에요, 아버님. 아버님이 도와주시는 덕에 그래도 도현이 지킬 수 있게 되었잖아요.”

-지켜야지. 내 마지막 손주인데……. 서하도 그리 보내게 했는데…….

“아버님……. 서하를 어여삐 여겨주시기만 하던 아버님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셔요,”

-그날 나라도 집에 있었더라면…….

채 회장이 울먹이는 목소리에 현서 또한 울음을 밀려와 간신히 참아내야 했다.


“아버님. 아무것도 자책하지 마셔요.”

안 그래도 슬픈 분께 너무 무거운 진실을 안겨드려 마음이 아플 따름이었다.

채 회장 또한 겨우 진정을 했는지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도현이는 잘 지내고 있니?

“네, 아버님. 조만간 도현이 데리고 찾아뵐게요.”

이제 한영숙도 없는 집이니 도현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면목이 없다고만 하시는 채 회장님은 차마 먼저 도현을 보여달라는 말씀도 못 하고 계셨다.

그 마음을 아는 현서는 도현을 보여드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맙다, 현서야. 내가 할아버지라는 건 티 내지 않고 만나마.

영숙이 걸리니 도하가 걸린다는 사실을 아는 채 회장은 사려가 깊었다. 현서는 목에 메어 가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배려에 너무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니다. 그편이 지금은 좋을 것 같구나.

“네…….”

동시에 현서는 이 모든 일에 함께할 수 없는 그 누군가가 떠올랐다.

영숙이 도현이 납치했을 때 그가 수습해주느라 얼굴 본 게 마지막이었다.

계속 가슴속을 맴돌던 말을 겨우 물었다.


“근데, 아버님……. 저기, 그 사람은…… 어쩌고 있어요?”

-도하 말이냐.

“네…….”

그때 그는 현서를 안심시키려 최선을 다했다. 그것을 위해 제 어미를 버렸고 감옥에까지 보냈다.

그 마음이 어떨지는 가늠하기도 두려울 정도인데 그 이후로 보지도 못했으니 계속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전화 통화는 한 번 했는데 태연을 가장한 건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어서 더 할 대화도 없었다.


-흠…….

대답 대신 채 회장이 내쉬는 한숨이 길어서 현서는 더욱 불안했다.


-그 녀석은…… 요즘 무섭도록 일만 한다.

“…….”

가슴이 아렸다. 이제 현서는 그가 일에 파묻히는 순간들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다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군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애가 열심히 일하는 게……. 사업을 넓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꼭 빠르게 완성하기 위해서인 듯 보이는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맡은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사업은 직접 벌이지 않는 것만 봐도 그런 것 같구나.

현서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도피를 위해 일에 빠져 있지만 그게 예전과는 다른 패턴이었다.

채 회장의 목소리에도 깊은 근심이 느껴져서 한층 더 불안했다.


-내 생각에는 그 녀석이…… 꼭 모든 것을 정리하는 중인 것만 같아.

현서는 눈동자를 작게 떨었다.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안 돼. 도하 오빠…….

뭘 하려는 거야.

***



“엄마, 이 집 엄청 크다!”

“그렇지?”

“응. 좋아 보인다!”

“우리 도현이 오늘 예의 바르게 잘 있다가 올 수 있지?”

“응, 도현이 얌전히 있을게.”

“착해라. 여기 계신 할아버지는 보기에는 좀 딱딱해 보이시는데 굉장히 좋으신 분이야. 보면 반갑게 인사 건네드려, 알았지?”

“응. 알았어.”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현서는 도현과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벌어지는 문틈으로 보이게 된 사람을 보며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우미가 열어줄 줄 알았는데.


“아버…… 채 회장님!”

놀라서 입을 열던 현서는 도현의 앞이라 호칭을 재빨리 바꾸었다.

채 회장은 그를 부르는 현서의 목소리는 듣지도 못한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 문고리를 붙잡고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도현을 향해 있었다.

현서는 왠지 이 순간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여!”

그때 도현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채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채 회장은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눈빛을 달리했다.


“그래, 어서들 오거라.”

채 회장은 스스로가 어쩐지 조금 허둥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기다리던 중에 내내 긴장하면서도 침착해야지, 다짐했었는데.

막상 처음으로 손자의 얼굴을 보니 밀려드는 감격을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제 그에게 손주란 전혀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만남이 믿기지 않았다.

어느새 문 앞까지 와서 그를 고개가 꺾여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는 무슨 말을 떼야 할지 준비한 말들을 다 잊어버렸다.

그 대신 그는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엄마의 당부대로 도현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과일 맛은 괜찮니?”

“네! 맛있어요!”

“뭐가 제일 맛있니?”

“멜론이요!”

도현과 대화를 나누던 채 회장은 도현이 대답할 때마다 웃었다. 기본적으로 외치는 발성으로 대답을 하는 아이였다.


“대답 한번 우렁차네.”

채 회장이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뱉자 현서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맞아요, 목소리가 참 커요.”

“좋네. 이 작은 아이가 힘도 좋아.”

이 아이가 내 손주라니.

보고만 있어도 뿌듯했다. 친근하게 대꾸해주는 맑은 표정이 좋아서 자꾸만 말을 걸고 싶었다.

하나뿐인 자식인 도하조차 성인이 되어서야 함께하게 되었던 채 회장은 이렇게 어린 남자아이는 가까이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아이였던 서하랑은 또 조금 다른 느낌이어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현서는 채 회장의 웃느라 깊게 팬 주름을 보았다. 요새 웃으실 일이 없으셨었는데 모처럼 미소를 보이시니 현서도 너무 좋았다.

다만 친할아버지라는 걸 밝히지 않는 묘한 만남이라는 게 애석했지만 말이다.

현서가 무엇보다 걸리는 건 당신의 아들 채도하가 아이 아빠인데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었다.

사실 요즘은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영숙은 여러모로 저질렀던 어리석은 잘못들로 인해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마 실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진성에서 쫓겨난 주혁의 돈까지 탈탈 털어 잃게 했으니 주혁도 이제 제 어미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한다.

직장 잃고 가진 돈도 전부 잃고 주눅이 든 채 혜미와 처가의 눈치 보며 지내고 있다는 주혁은 제 살길을 찾기에도 바쁘다고 했다.

혜미는 아린이 콧물약 사건으로 이제 시모를 사람 취급도 안 한다고 한다.

아마 영숙도 앞으로 주혁을 그리 찾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손해 보도록 한 일 때문에 아들이 돈을 요구할까 봐 피했으면 피했지, 먼저 찾을 사람은 아닐 것이다.

원래가 이기적인 모자였는데 이렇게 사이가 틀어졌으니 개털 된 서로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두 사람 다 채도하에게 들러붙지나 않으면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채도하는 어미를 처벌하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이었다.

원래 현서는 도현을 납치한 영숙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도하 보기 곤란하다는 마음은 있었는데,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하가 먼저 합의해주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때 알 수 있었다. 채도하가 얼마나 제 어미와 멀어졌는지를.

당분간은 한영숙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 영숙에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고 현재 구치소에 갇혀 있는 그녀는 무해한 존재였다.


“할아버지가 회장님이에요? 엄마가 회장님 만나러 온 거라고 하던데.”

도현이 동그랗고 해맑은 눈으로 채 회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 맞다.”

“TV에서 나오는 회장님들은 디게 부자던데.”

채 회장은 대답을 뭐라 할지 몰라 껄껄 웃었다,


“할아버지도 부자라 이렇게 큰 집에서 사는 거예요?”

채 회장은 씩 웃더니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그래, 그것도 맞다. 도현이도 이 집이 마음에 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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