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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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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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2022.10.20.
“예, 아버님.”
“실은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널 만나자고 했다.”
“…무슨 이야기요?”
“흠…….”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채 회장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에게 아이가 있다고?”
“…….”
예상치 못한 흐름에 현서는 크게 당황했다.
벌써 아버님에게까지 그 사실이 전해졌다고?
도하에겐 신신당부를 했으니 아직 말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아마 최대한 스스로가 이 일을 해결해보려 지금도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다.
“누구 아이니?”
채 회장이 올곧은 눈빛으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현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 아이는 앞에 계신 채 회장님의 손자이기도 한데, 자신은 이분을 속이고 그 귀한 손자를 숨겨온 며느리가 아닌가.
“하아……. 죄송해요, 아버님.”
현서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그 아이는…… 제 아이예요.”
숙연한 얼굴로 제 아이라고 말하는 현서를 보며 채 회장은 몹시 놀란 눈치였다.
당연히 머릿속이 복잡했을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 뒤 곧 채 회장은 현서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아이 안 뺏는다.”
채 회장이 대놓고 안심시켜주는 말을 던지자 현서는 순간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채 회장에겐 손주가 없었다. 주혁이 채 회장의 아들은 아니었으니 주혁의 아이는 영숙에게나 손주지, 채 회장의 손주는 아니었다.
유일무이하던 손주 서하를 잃고 상심한 그가 얼마나 손주를 기다렸었는지, 그에게 손주가 얼마나 귀한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그 말에 마음이 아팠다.
너무 죄송해서 결국 현서는 채 회장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흐흑……. 정말 죄송해요, 아버님.”
“현서야.”
채 회장은 우는 현서에게 차분히 손수건을 건넸다. 현서는 손수건이 젖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채 회장은 한때 며느리였던 아이의 우는 모습에 마음이 무척 애달팠다. 그간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아서였다.
“현서야.”
그가 한결 더 인자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래도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렴.”
현서는 붉어진 눈을 들어 채 회장을 보았다.
“네 손으로 직접 아이를 기르더라도…… 네가 원하면 진성가의 아이로 올려서 키워줄 수도 있고, 또 살 집이나 양육비 등 필요한 것들을 줄 수도 있다.”
그는 마치 현서를 달래듯 정성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현서는 그 말에 더욱 울컥하여 애써 울음을 눌렀다. 조금 진정한 끝에 그녀가 대답했다.
“말씀 정말 감사해요, 아버님. 하지만 이제 저도 아이와 둘이서 살아가기에 필요한 능력 정도는 충분히 있어요.”
“그래……. 그렇게 보이는구나. 송화궁이라는 곳의 원장이라지?”
“예, 아버님.”
“그래도 아이의 조부로서 무어 하나라도 해 줄 게 있었으면 좋겠구나. 한번 잘 생각해 보렴.”
무엇도 받지 않는 현서의 입장을 납득하면서도 채 회장은 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아…….”
그런 채 회장의 마음을 알기에 현서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버님.”
하지만 현서는 문득 그런 채 회장에게 더 미안할 부탁을 하려 했다.
곁으로 보이는 대단한 걸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건 이제 줄 사람들이 많았는데 정작 채 회장이어야 줄 수 있는 게 있었다.
“제 아이……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채 회장의 따스한 마음에 기대어 현서는 서러움을 터뜨렸다.
“서하도 그렇게 아프게 떠나보냈고, 이제 제 곁에 있는 유일한 가족이에요. 오래오래 제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만에 하나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버님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서하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더욱 울먹이고 말았다.
그 아픈 이야기에 채 회장 역시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하……. 예뻤던 내 첫 손주. 우리 아가.
채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고 강한 눈빛으로 의지를 보였다.
“그래. 내가 꼭 그렇게 하마.”
현서는 눈물이 고인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의 조부를 바라보았다.
도현에게 이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그가 얼마나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산처럼 우직하게 약속해주는 그의 말이 지금은 크게 위로가 되었다.
***
“고마워. 자긴 내 행운이야.”
오늘의 영숙과 동철의 약속 장소는 호텔 방이었다. 데이트 코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자기랑 부딪친 게 운명이었나 봐.”
계좌에 꽂힌 배당금을 보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날이었다. 배당금이 모이면 그것도 함께 투자할 생각이었다.
“사실 요즘 되는 일이 없었거든. 채 회장이나 자식 놈들이나 며느리나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아.”
“영숙 씨 위로는 내가 해줘야겠네. 내가 비록 바빠지긴 했지만 시간 많이 비워볼게. 오늘 저녁은 먹고 갈 수 있어? 내가 근사한 데서 살게.”
“오늘 저녁은 힘들 것 같아. 지금 갈 데가 있거든.”
영숙이 침대에서 나오며 대답했다.
“그래? 아쉽네.”
영숙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고 그 모습을 보며 동철이 물었다.
“근데 그 옷차림은 뭐야? 운동 가는 길이야?”
“아니. 아주 특별한 산책이야.”
“아주 특별한 산책? 곧 눈이 올 것 같은데?”
“나한테 손자가 생겼거든. 동철 씨한테 돈 투자했듯이 매일 손자한테는 시간과 체력을 투자해야 해.”
영숙은 손자를 만날 생각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손자가 애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데?”
동철이 서운하다는 투로 이야기하자 영숙은 깔깔 웃었다.
“걔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느라 그래. 그 애는 내가 할머니인 거 모르거든.”
“뭐? 그건 또 무슨 경우야? 출생의 비밀이야?”
“하하, 말하자면 길어. 바쁘니까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동철 씨만큼 중요한 약속이란 말이야.”
***
어느덧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신이 난 동네 아이들은 놀이터에 왁자지껄 모여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도현아.”
“할머니! 미미야!”
벌써 며칠째 도현은 어린이집이 끝난 후 시터와 함께 놀이터에 들렀다.
처음 미미를 만난 이후 갑자기 정해진 약속이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미미도 옷 입었네?”
“응. 오늘은 눈이 와서 입혀봤어. 예쁘지?”
“응! 더 귀엽다!”
빨갛고 앙증맞은 옷이 미미의 하얀 털과 어울렸다.
“미미도 눈처럼 하얘. 옷 안 입었으면 눈에서 안 보였겠다. 헤헷.”
“우리 도현이는 생각하는 것도 귀엽구나.”
도현은 미미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영숙은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
문득 영숙이 생각났다는 듯이 어깨에 멘 쇼퍼백을 뒤적였다.
“이거 내가 어제 만든 식혜인데 너무 많이 해 가지고, 한 병 맛보시라고 가져와 봤어요.”
“어머나, 뭘 이런 걸 다 챙겨주시고!”
영숙이 내미는 병을 시터는 반갑게 받아들었다.
“이번 식혜가 제법 맛있게 나왔는데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네요. 도현이랑 한번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도현이는 식혜 좋아하나요?”
“네, 도현이가 입은 짧은데 그래도 식혜는 잘 먹는 음식 중 하나예요.”
“아이구, 그거참 잘됐네.”
영숙은 손뼉을 짝 마주치며 기쁘게 웃었다.
“저는 식혜 맛있게 만들기가 은근히 어렵던데 솜씨가 좋으신가 봐요.”
“제가 요리에 취미가 많긴 해요, 하하.”
마침 도현이 식혜를 좋아한다니 어제 서산댁에게 식혜를 만들라고 닦달한 보람이 있었다. 귀한 지인 줄 거라며 정성껏 만들라고 성화를 했었는데 이렇게 빛을 발한다.
“할머니! 미미도 눈 와서 좋은가 봐!”
“그러네? 도현이도 눈 좋아해?”
“네! 도현이도 눈 좋아해. 오늘 진짜 큰 눈사람 만드꺼야.”
“할머니가 도와줄까?”
“응!”
마침 아이는 성격도 친근하고 사람을 잘 따라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보러 올 맛이 나는 아이라니까? 나도 늙었나? 왜 이렇게 얘가 예쁘지?
***
“요즘 오후마다 매일 나간다면서.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집에 들어가자마자 채 회장이 뾰족한 눈으로 쳐다보며 묻는다.
“강아지랑 산책하러 가요.”
“김 기사랑 차 타고 간다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부터 나갔다던데. 대체 산책을 어디까지 가는 거야?”
영숙은 뜨끔해서 멈칫했다. 오늘은 호텔에서 동철을 먼저 만난 뒤 도현에게 가느라 더 외출이 길어졌다. 들켰다가는 집안이 덜컥 뒤집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같은 종의 강아지 키우는 사람들끼리 모임이 있어요. 만나서 담소도 나누고 산책도 하느라 그래요.”
“또 쓸데없는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아휴, 회장님은 이제 제가 강아지랑 노는 것도 못마땅하세요?”
“언제부터 그렇게 개를 좋아했다고 그래?”
영숙이 하는 일에는 원체 수상쩍은 일이 많아 채 회장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나도 늙었나 보죠. 이제 집에 사람도 별로 없고 적적해서 귀여운 강아지한테라도 정 붙여보려 그래요. 단추 저건 너무 커서 힘들고.”
“흐음…….”
그럼에도 채 회장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영숙은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 손자가 오면 나도 덜 적적할 텐데……. 회장님은 우리 손자는 만나보신 거예요? 확인해보신다더니 어째 말씀이 없으셔요?”
채 회장에게 영숙이 되레 따지고 들었다.
“확인한다고 해서, 뭐 당장에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알았어?”
현서와의 만남을 떠올린 채 회장은 한결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뭐예요? 그럼 당연하죠! 우리 손주 당장 데려와야죠!”
“아직 어린아이야. 현서는 좋은 엄마고. 지금은 엄마 품에서 자라야지. 아이를 생각하면 괜한 분란 만들지 말고 일단 가만히 있어.”
펄펄 뛰는 영숙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채 회장이 딱딱하게 답했다.
“허, 참! 속 편한 말씀 마셔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데려와야 진성가에 어울리는 아이로 키우죠! 그 애가 지금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크고 있는 줄 아세요? 그런 시시한 데서 시시한 애들이랑 어울리면서 뭘 배우겠어요!”
“당신 같은 엄마 밑에서도 도하는 잘만 자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