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역시 그 방법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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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역시 그 방법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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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역시 그 방법밖에는
2022.10.24.
“뭐, 뭐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으세요?”
삽시간에 영숙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그냥 현서 믿고 맡겨. 괜히 당신이 일 그르치면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채 회장은 엄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현서가 지혜로운 애니까 엄연히 알아서 잘하겠지. ”
“지혜로워요? 회장님은 걔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나 아세요?”
그런데 영숙이 언성을 높이며 꺼낸 말에 채 회장은 오히려 영숙을 향해 눈을 번득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영숙은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고, 내, 내가 무슨 말을!
이러다 채 회장이 현서와의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캐내면 절도죄 이야기까지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또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요! 그러니까 옛날 일 말하는 거잖아요. 이혼할 때 그 건방졌던 언행들요.”
다행인지 뭔지 채 회장은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영숙은 더 추궁하지 않는 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조심해야지.
그나저나……. 저 양반. 진짜 그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채 회장이 현서와 도현이를 만나보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이 일은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 일이 성사되지 싶다.
채 회장이 요즘 외출하는 거 가지고 저렇게 잔소리하는 거 보면 주시를 하는 것 같은데. 장동철도 당분간 자주 만나면 안 되겠고.
현서 이것도 조용히 만나야 할 텐데.
***
“저……. 원장님.”
원장실을 찾은 비서의 곤란한 얼굴에 현서는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 있나요?”
“이상한 이메일이 와서요…….”
“이상한 이메일이요?”
“네. 한영숙 회원님께서 보내신 이메일인데요.”
현서는 얼굴을 대번에 굳혔다. 원장의 연락처도 모르고 출입이 제한되었으니 이제는 송화궁 공용 이메일로 연락을?
“원장님의 아이에 관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순간 현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등골이 서늘해진 현서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 라고요?”
“예. 자세한 이야기는 쓰여있지 않고, 그래서 원장님과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만…….”
설마, 한영숙이 도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거야?
채 회장님이 말했을 리는 없는데,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메일 바로 저한테 전달하세요.”
“예, 원장님.”
곧 확인하게 된 이상한 이메일의 결론은 만나자는 거였다.
불길함을 느낀 현서는 곧장 영숙의 핸드폰으로 연락했다. 번호는 바뀌지 않아 그대로였다.
[이현서입니다. 저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언제 어디서 만날까?]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현서는 그날 바로 약속을 잡았다.
***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카페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아무래도 해야 할 이야기가 심상치 않을 것만 같아서였다.
들어가 보니 영숙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 송화궁에서 쫓겨날 때와는 달리 기세가 등등해져 있었다.
그 모습에 현서는 더욱 우려가 되었지만 담담한 얼굴로 들어가 그 앞에 앉았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죠?”
“여전히 당당하네?”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요.”
영숙은 코웃음을 쳤다.
“아이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현서는 잠시 주춤했지만 태연자약한 표정을 일관하려 애썼다.
“어떤 아이를 말씀하시는 거죠?”
“다 알고 왔으니까 잡아뗄 생각 마라. 너도 켕기는 게 있으니 이 자리에 나온 거 아니야?”
“어디서 뭘 알고 오신 거죠?”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우리 루나 리 원장에게 아이가 하나 있다고. 그 아이가 네 살이니 누구의 아이일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도 이 순간에 소름이 돋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제 한영숙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아이 이야기를 듣고 온 건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우리 아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데려와야지.”
“왜 아직도 아드님 재혼 못 시키셨어요? 아이가 아쉬우시면 어서 다른 여자를 들이세요.”
도하와 다른 여자를 엮기. 말하면서도 슬펐지만 한영숙이 아이에게서 관심을 거둘 방법이 달리 또 있을까.
“닥쳐! 이 뻔뻔하고 파렴치한! 네가 감히 우리 집안 씨를 밴 걸 숨겨?”
“제 아이에요.”
“그래. 네 아이지. 내 피가 섞인 손자이기도 하고.”
손이 움찔 떨렸다. 싫어도 진실이었다. 도현의 피에는 한영숙의 피 역시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채 회장님 피가 섞였지. 우리 도하의 피도 섞였고. 그렇게 귀한 피가 흐르고 있는 아이를 그렇게 두는 건 어미인 네가 너무 이기적인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니?”
이기적인 어미란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어미인 한영숙이 저런 말을 한다. 늘 아들을 이용해 먹기만 하는 사람이 말이다.
“아이를 보신 거예요?”
“아직 보지는 못했다. 듣기만 했지.”
현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영숙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네가 조만간 보여주게 될 거잖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 애에게 무엇이 가장 좋을 길일까? 아이에게 진성을 주고 싶지 않니?”
“주고 싶지 않아요.”
현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영숙이 표독스레 눈을 빛냈다.
“긴말 필요 없고. 난 내 손자 데려와야겠다.”
현서는 매섭게 뜬 눈으로 영숙을 노려보았다.
“그러시면 채도하 씨 재혼에 차질이 많지 않겠어요? 애 딸린 남자에게 시집올 여자를 찾으셔야 할 텐데요.”
“내 잘난 아들 걱정은 내가 할 테니 넌 네 아들 걱정이나 하렴.”
살살 약 올리는 영숙을 보며 현서는 입을 다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손주 사랑이 지극했다고.
예전에도 아들, 아들하며 손자를 바라긴 했지만 영숙의 입장으로선 아직 채도하가 젊으니 새 며느리를 들여 낳게 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채도하가 이현서만을 기다렸다는 걸 이제 저는 알 수 있었지만 영숙마저 그걸 인정하고 그의 재혼을 포기했다고?
더구나 이제는 원수가 되어버린 이현서가 낳은 아들이 그렇게 좋을까? 한집에서 살던 서하에게도 모질던 할머니가?
“저 골탕 먹이고 싶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영숙은 그 말에 깔깔대고 웃었다. 현서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래. 뭐 너 골탕 먹이고 싶은 것도 맞다만. 고작 그것 때문에 내가 네 말마따나 다시 싱글된 내 아들 애 아빠로 만들고 싶겠니?”
“…….”
“도하 그놈이 미련하게 너를 기다리더라. 그렇게 좋은 집안 여자들 가져다 붙이려고 해도 만나보지도 않고 거절만 하니……. 나도 이제 지쳤다.”
“…….”
현서는 마음 한 편이 쿡 쑤시는 통증을 느꼈다. 이곳에 없는 채도하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그 마음이 확고했으면 이 지독한 한영숙이 지쳤다고 할까.
“그러니 다른 여자에게서 도하 아이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결국 네가 낳은 그 아이가 유일한 도하의 아이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손자는 오혜미 씨가 낳은 아들도 있잖아요.”
“걔는 딸이다.”
현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오혜미가 딸을 낳았다고?
“의사가 잘못 판단해서 아들로 착각했었다는구나.”
그걸 가지고 오혜미가 그렇게 기고만장했었는데, 사람 일 참 알 수 없나 보다.
“뭐, 아들이었다 한들, 주혁이 아들이 도하 아들이랑 비교가 되겠니? 혜미가 낳은 손주는 채 회장님의 핏줄이 아니잖니. 하늘과 땅 차이지.”
영숙은 그 말끝에 입가를 씩 올렸다.
서하가 떠나고 도하와 현서 사이에 아들은커녕 아이가 아예 없을 때에는 혜미가 임신을 하자 그 아이라도 아들이길 매우 바라긴 했었다.
만약 끝내 도하에게 아들이 없다면 주혁의 아들이라도 채 회장과 정붙이게 하고 싶었다.
진성 그룹은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장남이 승계해온 전통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았다.
끝끝내 도하에게 아이가 없다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승계할지도 모를 일이니 그때 가서 주혁의 아들을 도하가 입양하게 하면 되니까.
그나마 도하에겐 동생인 주혁의 아이가 가까운 조카 아들이 될 테니.
그러나 딸이었고 결국 처음으로 태어난 손자는 얄미운 며느리지만 이현서가 낳은 아이, 도현뿐이었다.
“네가 낳은 아이가 우리 귀한 손자가 되는 게 아니니. 손이 귀한 채 회장 가문의 유일한 손자. 채현우 회장에게도 자식은 도하 하나뿐이고 도하에게도 자식은 그 아이 하나뿐이다.”
영숙은 하루라도 빨리 도현을 데리고 오고 싶어 몸이 달았다.
아이는 채 씨답게 아빠와 할아버지를 닮아 잘생기고 영특해 보이는 아이였다. 분명 제 아비처럼 진성가 후계자에 손색이 없도록 잘 자라줄 것이다.
“도하가 재혼도 하지 않고 저 모양이니,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먼 조카 중 하나에게 회사를 물려주게 될 처지였는데……. 이렇게 아들이 있었다니 얼마나 잘된 일이니.”
만약 채 회장이 저보다 훨씬 먼저 세상을 뜨기라도 한다면 영숙 자신은 채 회장의 서류상 부인도 아니었기에 채 회장의 상속도 받을 수가 없었다.
믿을 건 아들인 도하와의 연결고리 하나뿐이었으니 도하의 핏줄이 하나라도 더 있어서 도하가 든든해져야 저 역시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난 네가 도하랑 다시 잘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으니 아이만 데려와야겠지?”
현서는 비열한 한영숙의 미소에 치가 떨렸다. 결국 그러니까,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이용하려는 심산이 아닌가.
아들도, 손자도 저 사람에겐 애정보다는 필요의 문제였던 것이다.
“내일모레 환갑이시면서. 손자가 회사를 물려받을 때까지 살아계시기도 힘드신 분이! 아들보다 더 오래 살고 싶으신 모양이죠?”
“마음대로 깐족거려라. 아이만 준다면 네 모든 언행을 용서할 테니.”
“꿈도 꾸지 마세요. 아이는 제 아이에요.”
“그럼 좀 시끄러워지겠네. 소송으로 가야겠구나. 친자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부터 해야겠지?”
그 말을 하는 영숙의 미소가 섬뜩해서 현서는 입술을 잘게 떨었다. 차갑게 식은 이마 위로 식은땀이 서서히 스몄다.
“도하가 안 하겠다고 하면 나라도 해야지. 조모라도 친족 확인은 가능하다더구나.”
“아이, 절대 데려가실 수 없을 거예요.”
“네 아이가 도하의 자식이 되어야 앞으로 도하 재산이 다 네 아이 재산이 될 텐데, 그것도 싫으니? 너는 참 이상하구나. 남들은 어떻게든 재벌가에 아이 이름 밀어 넣으려고 나서서 친자 확인을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애를 빼돌리려 애쓰니.”
“왜일까요? 정말 모르시겠어요?”
영숙은 얼핏 의아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눈동자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