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누구 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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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누구 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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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누구 아이니?
2022.10.17.
“아 몇억? 흠,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용돈 벌이하려고?”
“그렇지, 뭐. 아들놈 카드 쓰는데 눈치 보여 죽겠어. 언제까지 투자하면 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영숙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보름 후에 배당금이 나오니까 배당금 받고 싶으면 빨리하고, 아니면 보름 지나서 해.”
“배당금은 얼마나 나오는 거야?”
“이번 배당금이…… 7프로 정도 나올 거야.”
“그래?”
영숙은 씩 웃으며 긍정의 반응을 보였다.
용돈 벌이로는 나쁘지 않네.
“다른 이름으로는 지금 투자를 못 받으니까, 내 이름으로 투자하면 이번 배당금까지 받을 수 있긴 해.”
“그럼 내가 며칠 안에 돈 만들어서 올게. 조금만 기다려.”
“언제 가능한데? 내가 다음 주에는 시간 내기가 더 어려워서.”
“그럼 내일? 내일까지 만들면 되잖아.”
“알았어. 그럼 내일. 약속 지켜야 해?”
“걱정하지 마!”
씩 웃던 영숙은 미리부터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는 돈과 패물을 계산해 보았다.
***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핀 영숙은 헐레벌떡 뛰어와 동철의 차에 탔다.
“늦었지? 미안해.”
영숙이 숨을 몰아쉬며 동철을 향해 말했다. 동철은 시간을 흘끗 보며 미간을 구겼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그냥 가려고 했어. 곧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출발해야 해.”
“미안해. 내가 있는 거 좀 털어서 만드느라고 늦었어. 여기 현금으로 가져왔어.”
부동산만 빼고 급히 정리하여 만들 수 있는 현금이었다. 사정이 쪼들리는 만큼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부랴부랴 정리했다.
“이거 잘못되면 나 큰일 나.”
그러나 동철은 영숙이 내미는 봉투를 보고도 시큰둥했다.
“못 믿으면 투자하지 않아도 돼. 푼돈 가지고 맘 상하느니 그냥 가져가.”
영숙은 화들짝 놀라 그를 달랬다.
“아냐. 내가 동철 씨를 못 믿으면 안 되지. 우리가 쌓은 정이 어딘데…….”
예전에는 제 비위 맞추려 설설 기더니 잘 나간다고 비싸게 구는 동철을 보며 좀 치사한 기분은 들었지만.
“알았어. 자기 계좌번호는 문자로 보내주고.”
동철은 담백한 어조로 말하며 결국 봉투를 받았다.
“후우, 고마워, 동철 씨. 바쁜 일 끝나고 나면 연락 줘.”
영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향해 살살 미소를 날렸다.
“나중에 조용한 데서 만나자. 나 사실 동철 씨 못 잊었거든.”
“알았어.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동철은 영숙을 쳐다보지도 않고 시계만 보며 대꾸했다. 아까부터 영 뻣뻣한 그를 보며 영숙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잘 나가더니 도도해졌네, 이 남자. 예전에 그렇게 만나 달라고 조르더니.”
“정말 바빠서 그래. 자기가 시간 있을 때 연락해. 내가 맞춰볼게.”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 흑심이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좋아. 기대할게.”
이내 영숙은 경쾌한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김 기사가 저편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옮겨탔다.
***
“원장님, 진성 그룹 회장님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 연결 가능하시냐고 물으시는데요.”
비서가 전달한 내용에 현서의 표정이 순간 경직되었다.
아버님께서 송화궁 원장실로? 왜?
“진성…… 회장님이요?”
“예, 원장님. 어떡할까요?”
“연결하세요.”
현서는 약간 긴장이 되어 심호흡을 했다.
혹시 얼마 전 영숙의 일과 관련되어 연락 주신 걸까? 그게 아니라면…….
몇 년 만에 전 시부의 연락이 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불안한 기분으로 연결을 기다렸다.
곧 채 회장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현서 원장님?”
“예, 안녕하세요.”
“회장님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긴장 속에 그리웠던 음성이 들렸다.
-현서냐.
“아버님…….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그의 건강에 대해서는 도하도 별말 없었고 뉴스에서 듣는 소식도 없었으니 무탈하시겠거니 생각했다가도 막상 이렇게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게 되니 너무도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 나는 잘 지낸다. 너도 건강하지?
“예, 아버님. 그동안 연락 못 드려 죄송해요.”
-아니다. 그리 바쁘게, 열심히 지내니 오히려 다행이구나.
채 회장은 여전했다. 무뚝뚝한 듯하나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투도.
“아버님께 안부 인사도 못 드리고 살아서 면목이 없어요.”
자주 걱정되고 생각은 했지만 도현의 존재를 숨기는 죄스러움에 연락도 못 드렸다.
-한번 만나자꾸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현서는 주춤하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해서 만나자 하시는 건 가벼운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거절할 수는 없었다.
“예, 아버님.”
이후 두 사람의 통화가 마무리되었고 비서들끼리 일정을 맞추어 약속을 잡았다.
“후……. 다른 분도 아니고 아버님이시니 만나긴 해야겠지만…….”
뵙자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서는 자꾸 이렇게 도하의 식구들과 얽히는 게 영 불편했다.
***
며칠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다가 웬일인지 모처럼 날이 반짝 풀렸다.
한파의 날씨만 제외하고는 영하일 때도 하루에 한 번은 바깥나들이를 해야 하는 도현으로선 오늘과 같이 영상의 날씨가 실컷 나가 놀 수 있는 기회였다.
“우아, 멍멍이다!”
바로 옆에서 서성이던 작고 하얀 강아지를 발견한 도현이 그네 위에서 외쳤다.
“멍멍이 예쁘지?”
도현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아지 목줄을 쥔 여인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네!”
“우리 아가야는 더 예쁜데?”
흔들거리는 그네 위에 있던 도현은 강아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베이비 시터에게 외쳤다.
“이모, 나 내릴래. 강아지 보꺼야.”
“그럴래?”
시터가 그네를 멈춰주자 도현은 쪼르르 강아지 앞으로 갔다. 시터가 바쁜 걸음으로 도현을 따랐다.
“얘는 몇 살이에요?”
“얘는 이제…… 두 달쯤 되었어.”
“얘두 아직 아가야?”
할머니가 친근하게 굴자 도현의 말투는 반말과 존댓말이 섞이게 되었다.
“응, 아가지. 우리 예쁜 아가야처럼. 할머니 손녀도 우리 아가랑 비슷한 나이야.”
“정말?”
“응.”
“네 살이야?”
“맞아. 네 살이야.”
“도현아, 할머니한테는 존댓말로 물어봐야지.”
곁에 서 있던 시터가 웃으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야?”
그러나 골몰한 도현은 시터의 말은 들리지가 않는지 여전히 반말로 물었고 시터와 강아지 주인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응. 여자야. 손녀.”
도현은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를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강아지 주인도 함께 쪼그리고 앉아주었다.
“멍멍이 귀엽다.”
“귀엽지? 만져봐도 돼. 안 물어.”
강아지 주인인 할머니가 말하자 도현은 까르르 웃으며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도 여자야?”
“강아지는 우리 아가처럼 남자야. 수컷이라고 해.”
“털 부드럽다.”
“응, 털이 부드럽지?”
도현은 열중하여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라도 조금만 크면 무서워하더니 아주 작은 강아지라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 강아지 주인이 시터를 올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아기가 붙임성 있네요. 귀여워요.”
“그렇죠? 어린이집에서 핵인싸예요.”
“하하, 핵인싸, 젊은 애들 쓰는 말 들어봤어요.”
시터가 해주는 말에 강아지 주인은 귀엽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감탄해주었다.
그녀는 곧 다시 도현에게 말을 붙였다.
“강아지 이름은 미미야. 미미라고 불러줘. 그럼 좋아할 거야.”
“미미야아!”
“근데 우리 아가는 안 추워?”
“안 추워! 도현이 씩씩해!”
“오우, 씩씩해서 추위를 잘 물리치는구나! 우리 아가 근데 손은 발개졌네.”
강아지 주인은 안쓰러워하는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도현의 작은 손을 잡았다.
“할머니 손 따뜻하다.”
“아가 손이 차네.”
“도현이 장갑 다시 끼자.”
지켜보던 시터가 주머니에서 도현의 장갑을 꺼냈다. 아까부터 대화 중에 나온 이름을 듣곤 강아지 주인이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아가 이름이 도현이야?”
“응! 이도현이야!”
그때 시터가 도현에게 장갑을 끼워주며 도현을 가르쳤다.
“도현아, 할머니한테는 존댓말로 이도현이에요, 라고 해야지.”
“이도현이에여.”
알려주니 또 그대로 따라하는 아이를 보며 강아지 주인이 쿡쿡 웃었다.
도현은 그날 그네나 미끄럼틀 대신 작고 귀여운 강아지와 함께 놀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렇게 강아지에 빠져 있었다.
“도현아, 이제 들어가야지.”
“강아지랑 더 놀고 싶은데…….”
마침내 시터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도현은 강아지에 미련을 못 버리며 구시렁댔다. 강아지 주인은 그걸 보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럼 할머니가 다음에 또 강아지랑 나올게.”
“정말?”
“약속할까?”
“응!”
“그럼 내일 이 시간에도 강아지랑 나올게. 우리 아가도 옷 따습게 입고 나와?”
“응!”
도현은 해사하게 웃으며 그제야 걸음을 뗐고 시터도 그저 함께 웃으며 집을 향했다.
강아지 주인은 오래도록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서산댁!”
“예, 사모님.”
“이거 좀 받아.”
서산댁은 영숙이 건네주는 강아지를 얼떨결에 품에 안았다.
“웬 강아지예요?”
“얘가 아주 중요한 강아지니까 잘 돌봐줘. 참, 들어오는 길에 대문 앞에 똥 싸놨으니까 그것도 좀 치우고.”
“아아, 예, 사모님.”
“그리고 앞으로 난 4시부터 5시까지 매일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갈 테니까 스케줄 참고해.”
“예, 예.”
“아휴, 이놈의 털……. 난 좀 씻을게.”
영숙은 피곤해 보였지만 무엇에 뿌듯한지 웃는 얼굴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산댁은 강아지도 한번 내려다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네……. 밖에 있는 단추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이 강아지는 또 어디서 데려왔대…….’
“아 참, 똥 치우랬지.”
그나저나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이리 할 일이 또 하나 늘었으니 한숨도 늘게 생겼다.
***
“아버님…….”
현서는 몇 년 만에 만나게 된 채 회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뵙지 못했던 지도 벌써 4년이 넘어 있었는데, 그사이 채 회장의 얼굴에는 생각보다도 더 많은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안색도 이전만 못 했고 건강하신 게 맞는지 의심되는 모습이었다.
곁에 있었다면 소소하게나마 더 챙겨드렸을 것을.
“잘 지냈니.”
“네, 저는 잘 지냈어요. 아버님은 건강하신 거 맞죠?”
“그래. 난 어디 아픈 데 없이 지내고 있다. 너도 다행히 좋아 보이는구나.”
“예, 아버님.”
두 사람은 고급 호텔 라운지의 조용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차를 주문하고 몇 모금을 마시기까지 두 사람은 서로 안부와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서야.”
그러다 채 회장이 오늘 만남의 본론을 꺼낼 듯이 진지하게 그녀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