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하얀 사람들 (4부. 각개격파 [중])
한참을 떠들던 영호가 나가고, 방 안엔 성배 혼자 남았다.
성배는 웬일인지 영호가 나가자,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런 아마추어 새끼. 똥폼은 좆나게 잡더니, 의자에 다리도 안 묶어놨네.’
성배는 나무로 된 의자에 상체만 묶여있었다.
잠시 문 밖의 소리에 집중하던 성배는 영호가 집 밖으로 나가는 문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일어났다.
다리를 묶어두지 않아 허리를 구부리면 의자에 묶인 채로 일어날 수가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일어난 성배는 곧바로 벽에다가 의자를 후려쳐버렸다.
몇 번 정도 벽에 강하게 의자를 후려치자, 의자는 형태를 잃고 부서져 버렸다.
의자가 부서지자, 등받이에 묶여있던 성배의 상체가 자유로워졌다.
아직 두 손이 묶여있긴 했지만, 팔이 자유로워 우선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성배는 곧바로 자신의 뒷주머니로 묶인 손을 집어넣었다.
‘우리 낚시칼이 어딨나….’
성배는 자신의 낚시칼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 낚시칼은 없었다.
‘어... 씨발 어디다 흘렸나.’
낚시칼을 믿고 느긋하던 성배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달려간 그는 과도를 집어 들었다.
싱크대 구석 틈에 칼날을 끼우고, 허리로 손잡이 부분을 세게 눌러 단단히 고정시킨 후, 손에 묶인 끈을 칼날에 문질렀다.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성배는 손을 묶고 있는 끈을, 더욱 빠르게 칼날에 문질렀다.
“애들은 벌써 63빌딩으로 데리고 갔어. 오늘부턴 두 명이 더 늘었으니, 우리 기도가 더 잘 전달되겠지.”
낯선 남자 둘과 대화를 나누며 들어온 영호는 부엌에 있는 성배를 보고 순간 당황했다.
“뭐야, 이 형 진짜 물건이네. 어떻게 풀려난 거야.”
영호와 남자들은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꽉 잡고 성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성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손에 묶인 끈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세 남자를, 성배는 한 명, 한 명 천천히 쳐다봤다.
성배의 한 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등 뒤로 묶여있던 그의 두 손이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어이, 내 이름은 차성배다. 잘 기억해둬라.”
“뭐야, 형 정신 나갔어? 갑자기 웬 이름타령이야? 이제 곧 죽을 텐데.”
씨익하고 미소 지은 성배는 영호와 함께 온 두 남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아니, 저 두 새끼는 내가 처음 봐서 말이야. 적어도 지들이 누구한테 죽는 건지는 알고 죽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어.”
성배의 말에 흥분한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왼쪽에서 덤벼든 남자의 몽둥이질을, 성배는 오른쪽으로 가볍게 피하며, 오른쪽에서 다가오던 남자의 허벅지를 과도로 빠르게 쑤셨다.
“악!”
과도에 찔린 남자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배는 수차례나 같은 곳을 향해 과도를 내질렀다.
남자의 허벅지가 피로 물들자, 더 이상 그 남자는 버티지 못하고 괴로움의 비명만 남긴 채 쓰러졌다.
왼쪽에서 덤벼들던 남자는, 성배의 무자비한 모습에 기가 죽어 잠시 뒷걸음질 치다가, 갑자기 기합을 내지르며 성배를 향해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야아앗!”
성배는 다시 자세를 숙이며 몽둥이질을 가볍게 흘려버린 후, 그 남자의 배를 빠르게 두 번 쑤셨다.
그리고 곧장 일어나 목을 한 번, 어깨를 두 번, 끝으로 명치에 과도를 찔러 넣고, 과도는 빼지 않았다.
그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부엌 벽면에 마치 분무기처럼 피를 분사해대며 쓰러졌다.
성배는 자신의 얼굴에 흩뿌려진 피를 혀로 핥았다. 그러더니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영호를 쳐다봤다.
영호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가 지금까지 자신이 처리해 오던 보통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영호는 두렵지 않았다. 신께서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형 인정해. 자기 입으로 싸움지도층이라고 할 만하네.”
평소의 성배 같았으면 아마 상대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까지 건드린 인간 이하의 존재들을, 성배는 더 이상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영호는 또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성배는 부엌 한편에 있던 칼을, 칼끝이 아래로 향하게 잡아들고 곧바로 영호에게 다가갔다.
성배가 빠르게 다가오자, 영호는 반원을 그리며 빠르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의 몽둥이질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성배는 두 차례 상체를 뒤로 조금씩 빼서 몽둥이의 거리에서 아주 조금 벗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차서, 영호가 휘두르는 몽둥이를 의자로 막아 버렸다.
영호의 몽둥이가 의자에 걸려, 그가 잠시 멈칫한 사이, 성배는 영호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간발의 차이로 영호의 몽둥이가 성배의 왼손에 잡혔다.
당황하는 영호의 눈을 보며 성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목에 빠르게 칼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목에 꽂혀있는 칼을, 방향을 바꿔 잡아 다시 칼끝이 위로 오게 잡은 뒤, 목에서 천천히 빼냈다.
목에 박혔던 칼이 빠지자 영호의 목에선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영호의 눈을 끝까지 노려보며, 성배는 갈비뼈 사이로 칼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크헉!”
단 두 번의 칼질이었다.
성배는 영호의 갈비뼈 사이에 박혀있는 칼에서, 천천히 손을 떼며 말한다.
“이제부터 형이 신이 없다는 걸 보여줄게. 이걸 뽑으면 폐에 피가 가득차서 죽어. 호흡할 때마다 네 피가 네 호흡을 방해할 거야.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일거다.”
“개소리….”
성배는 충혈된 영호의 눈을 천천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걸 안 뽑아도 넌 죽어. 어차피 목에 동맥이 끊겨서 시간이 지나면 과다출혈로 넌 죽을 거야.”
초점 없는 눈동자로 성배를 노려보며 멱살을 잡으려는 영호를, 성배는 가볍게 왼손으로 밀어 버렸다.
뒤로 넘어진 영호는, 간신히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성배는 싱크대로 가서 대충 자신에게 묻은 피를 물로 닦아냈다.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영호의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았다.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하는 영호의 앞에서 성배는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영호야, 살고 싶어?”
성배의 물음에 영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영호를 보며, 성배는 웃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그 잘난 네 신한테 살려달라고 빌어봐. 형이 너 혼자 조용히 기도 할 수 있게, 자리 비켜줄게.”
성배는 말을 끝내고도 느긋하게 담배를 마저 피웠다.
담배를 끝까지 피운 성배는 꽁초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불똥 위에 정확히 침을 뱉어서 끈 후, 의자에서 일어났다.
영호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성배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성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갔다.
현준은 망치를 이리저리 돌리며 진모에게 다가갔다.
“내가 아저씨랑 귀여운 소희 씨를 맡았거든요. 근데 소희 씨는 집에 없던데 어디 갔어요?”
진모는 현준의 눈빛에서 살기를 읽을 수 있었다.
좀비들이 인간을 막 뜯어먹으려 할 때의 그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아, 어제 성배 군이랑 술 드시던 분이시군요. 소희 양은 새벽에 여의도 좀 구경한다고 나갔어요.”
현준이 한 발 다가오면, 진모가 한 발 물러났고, 진모가 두 발 물러나면, 현준이 두 발 다가왔다.
진모는 자신에게서 5미터 정도 떨어진 아파트 입구를 슬쩍 쳐다봤다.
‘302호, 아니지. 202호도 열려있다. 어떻게든 202호 까지만 가면 돼.’
진모는 아파트 입구 쪽으로 천천히 한 발 다가갔다.
역시나 현준은 진모 쪽으로 한 발 다가왔다.
“아저씨! 게임 오버에요. 아저씨 패거리 중에 소희 씨랑 아저씨만 살아남았어요. 아마도.”
“애들은요? 애들도 건드린 거예요?”
“아뇨, 애들은 신께 제물로 바칩니다. 걱정마세요, 그냥 거꾸로 매달아 두기만 하니까요. 크큭, 인간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질겨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아이들을 매달아 둬요?”
진모의 질문에 현준은 남방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상대가 중년의 남성이라 현준은 크게 긴장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아예 망치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저씨, 우리가 왜 여기서 모여 사는 줄 알아요? 우린 그냥 같은 동호회 회원이었어요. 근데 좀비가 나타난 후로 큰아버지랑 큰어미니가 우릴 불렀죠. 처음엔 뭔 소린가 했어요. 하얀 옷 입고 기도하자, 꿈에서 신이 이렇게 하라고 시켰다.”
현준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 큭큭 대며 웃기 시작했다.
“근데 정말로 기도가 시작 된 첫날에, 군부대가 우릴 지켜주러 왔어요. 그리고 이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지자, 그들은 우리에게 이곳을 양보하고 떠났어요. 크큭, 그 어딘지도 모를 벙커로요.”
진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군부대가 온 이유와 벙커로 떠난 이유가 자신들의 기도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현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린 남아서 매일같이 기도를 했어요. 63빌딩이 밤마다 하려하게 빛난 이유도, 다 신께서 조금이라도 우리들을 잘 보시게 하기 위해 조명을 켜뒀기 때문이에요.”
“말도 안 돼요.”
“계속 들어보세요. 어느 날인가 큰어머니께서 말씀 하셨어요. 아이를 거꾸로 매달아서 신께 제물로 바치면 신께서 더 좋아하실 거라고. 꿈에서 그러셨다고요.”
“아냐, 이봐요. 그런 신이 어딨어요. 당신들은 그냥 현실의 두려움을 피해, 당신들만의 도피처를 만들어낸 거예요.”
“아저씨, 아니에요.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드리자 정말로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아이들을 데리고요. 신께서 그 아이들을 자기에게 바치라고 이곳으로 인도한 거예요.”
현준은 꽁초가 된 담배를 멀리 던지고, 곧바로 새로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또 피우기 시작했다.
진모는 아파트 입구로 달릴 기회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현준이, 자신보다 훨씬 빠를 것 같아 망설이고 있었다.
“글쎄, 말도 안 된다니까요! 당신들의 신이 그들을 인도한 게 아니라, 단순히 63빌딩의 화려한 불빛이 생존자들을 불러 모은 거라고요! 우리도 그 불빛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거고요.”
어이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계속 부정하는 진모를, 현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담배를 깊게 들이마신 현준은 왼손으로 망치를 꺼내들었다.
“우리를 지켜주고, 안전하게 살 곳을 마련해준 우리의 신을… 부정하는 겁니까?”
진모는 설득을 포기했다. 현준은 이미 기본적인 대화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만의 신에게 미쳐있었다.
오른손으로 담배를 편하게 피우면서, 드디어 현준이 진모에게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던 진모는 그대로 아파트 입구를 향해 뛰었다.
현준은 진모가 뛰기 시작하자 곧바로 진모를 따라 아파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발이 계단이 걸린 진모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다급히 뒤따라오던 현준은 다시 느긋하게 걸어서 진모에게 접근했다.
“아저씨, 그냥 좀 가만히 계세요. 여태까지 신의 부름을 받고 여기 왔던 사람들 전부 다 죽었어요. 늘 결과는 정해져 있어요, 글쎄.”
현준이 망치를 들고 진모에게 다가가던 순간, 어느 샌가 소희가 현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움직이면 찌른다.”
현준은 소희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소희는 현준의 허리춤에 날카로운 창끝을 바싹 갖다 붙여놓고 있었다.
“어저께부터, 그 창을 진짜 쓸 줄 알아서 들고 다니는 건지가 궁금했는데.”
소희는 창끝으로 살짝 현준의 허리를 찔렀다.
“궁금하면 움직여봐. 아저씨, 빨리 일어나세요.”
소희의 뜻밖의 도움에 진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일어났다.
“소희 양, 혹시 우리 예지랑 정배 못 봤어?”
“아이들은 방금 전에 사람들과 63빌딩으로 들어갔어요. 느낌이 이상해서 우리 사람들 부르려고 돌아오던 참이었어요.”
“이 사람 말로는 전부 당했다는데…. 소희 양, 잠시만 기다려 집에 가서 확인해보고 올게.”
일행 모두가 당했다는 현준의 말이 미심쩍었던 진모는 곧장 자신의 집으로 올라 가봤다.
“성배 군, 한 군! 나라 양.”
집 안 곳곳을 찾아봤지만, 세 사람 모두 집 안엔 없었다.
‘말도 안 돼. 다들 어디 간 거야…. 정말로 다 당한 거야….’
진모의 심박 수가 빨라지며, 그는 점점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서둘러 자신의 방에서 산탄총을 챙긴 진모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소희 양, 정말 아무도 없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자, 소희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소희의 감정이 흔들리자, 집중력이 떨어지며 현준의 허리를 누르고 있던 창끝이 그녀도 모르게 현준의 허리에서 떨어졌다.
현준은 자신을 위협하던 창끝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자, 곧바로 몸을 돌려 소희의 창을 잡고 끌어당겼다.
소희는 반사적으로 창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힘을 줘서 창을 세게 잡았다.
그 결과 소희는 현준에게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소희는 창을 놓았지만, 이미 현준에게 팔을 잡히고 말았다.
현준은 소희를 뒤에서 끌어안고 왼팔로 그녀의 목을 살짝 졸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진모는 산탄총을 장전하며 현준을 겨눴지만, 산탄총의 총알은 광범위 하게 퍼져나가기 때문에 차마 발사할 순 없었다.
“크큭, 귀여운 소희 씨 때문에 잠깐 당황했는데, 역시 창은 그냥 폼이었네요.”
진모는 어쩔 줄을 모르고, 산탄총을 들고만 있었다.
현준은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진모와 소희를 비웃고 있었다.
자신이 소희를 잡고 있는 한은 절대로 진모가 산탄총을 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현준은 소희의 머리와 얼굴에 코를 비벼대며 그녀를 농락했다.
“죽이기엔 아까운데, 여자는 여기도 많으니까 미련은 없네요.”
현준은 망치를 천천히 높이 들었다.
진모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만류 했지만, 현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신들은 우리의 신에게 선택… 헉!”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현준이 갑자기 망치를 떨어트렸다.
소희가 주머니에 있던 낚시칼을 꺼내 현준의 옆구리를 쑤셔버린 것이었다.
현준이 자신의 옆구리를 잡고 뒤로 물러나자 소희는 멈추지 않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지긋지긋해. 너희 같은 인간들 지긋지긋해!”
소희는 낚시칼로 현준의 배를 그었다.
예리한 낚시칼의 칼날은 현준의 왼쪽 옆구리부터 시작해 배꼽을 지나 오른쪽 옆구리를 가르고 나왔다.
현준의 눈이 순식간에 충혈 되며 눈물과 콧물이 동시에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가로로 갈린 배에선 소장과 대장을 비롯한 내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희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발로 차서 뒤로 넘어트려 버렸다.
진모가 달려와 소희를 다독이며 챙겼지만, 소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이제 다 죽어버릴 거예요. 좀비보다 못한 인간들 다!”
진모는 우선 흥분한 소희를 진정시켰다.
소희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연기자를 꿈꾸며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 스물세 살 해맑은 아가씨는 이제 없었다.
소희는 겉으론 괜찮은 척 했지만, 진모는 알고 있었다.
사람을 처음 죽이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그는 정확히 알았다.
진모는 잠시 소희의 곁에서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소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진모는 일어나서 멀리 보이는 63빌딩을 가만히 쳐다보며 산탄총을 장전했다.
철컥!
“아저씨! 소희야!”
그때 성배가 그 둘을 부르며 어디선가 나타났다.
“성배 군! 괜찮아?”
“오빠!”
“소희 야, 한이랑 나라는?”
“모르겠어요. 진모 아저씨가 올라갔다 왔는데, 둘 다 집에 없데요.”
“근데 성배 군은 어떻게 된 거야?”
성배는 근처에 쓰러져있던 현준을 가리켰다.
“어제 이 새끼랑 영호란 새끼랑 술 먹고 뻗었는데, 눈 떠보니 다른 아파트에 묶여있더라고요.”
“그래, 성배 군은 역시 천하무적이네. 다행이야.”
진모는 방금 전 일어난 일들을 성배에게 간단하게 얘기했다.
드디어 그들은 하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살려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뜻한 미소로 받아주고, 아이들은 제물로 만들고, 걸리적거리는 어른들은 그냥 죽여 버리는 광신도들이었다.
성배는 둘을 잠시 남겨놓고, 다시 자신들이 머물던 아파트로 올라갔다. 그리고 집 안을 대충 살펴본 후, 자신의 배트를 챙겨가지고 내려왔다.
“아저씨, 아무래도 영등포로 식량 구하러 간 것 같은데요. 나라 총하고, 한이 칼 둘 다 없어요.”
“그럼 그쪽도 분명히 공격당할 건데, 그럼 난 63빌딩으로 갈게. 둘은 영등포로 나가봐.”
진모의 말에 소희는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혼자 가시면 위험해요. 일단 셋 다 63빌딩 먼저 가요. 아이들 구하고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요.”
“아냐, 소희 양. 그럼 한 군하고 나라 양이 위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성배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애들 구하러 셋 다 갑니다. 한이랑 나라는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지켜야 되요. 꼭.”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성배는 누구보다 나라와 한이가 걱정됐다.
몇 명이 따라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 선택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영등포로 나가는 길 쪽을 한참 쳐다보던 성배에게 소희가 낚시칼을 내밀었다.
“오빠, 이거 잘 썼어요.”
“네가 갖고 있었냐. 그냥 너 가져라.”
소희가 칼을 자신의 주머니에 다시 넣으려는 순간, 성배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잠깐만. 아무래도 그건 내가 갖고 있어야겠다. 왠지 또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아서….”
낚시칼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은 성배는 나라와 한이가 간 방향을 뒤로한 채, 63빌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진모와 소희도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성배를 뒤따랐다.
63빌딩 안에 있는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들과, 그와 반대로 끝끝내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어 했던 성배와 소희, 진모는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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