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하얀 사람들 (4부. 각개격파 [하])
성배가 부엌에서 싸우고, 진모가 현준과 대치하던 그 시각, 한이와 나라는 막 서울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아직 승호와 남자들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한이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뒤범벅 돼있었다.
‘저들은 분명히 공격해 올 거야.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가 먼저 치는 거야. 근데 만약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착각이라면….’
한이는 주변을 다시 한 번 슬쩍 살폈다.
나라의 곁에 도끼를 든 남자 둘, 한이의 곁엔 망치를 든 승호와 오함마를 든 남자 둘이 바싹 붙어 있었다.
‘아니야, 착각일 리가 없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알고 온 거야.’
‘아냐, 아냐. 딱히 63빌딩에 있던 걸 들킨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 잘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릴 공격한다…. 역시 내가 착각한 건가.’
서울교를 벗어나 영등포 상가 지역으로 걸어가던 짧은 순간, 한이의 복잡한 심경은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주변에 있던 남자 하나가 그런 한이를 보며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네요.”
“아뇨, 잠을 좀 설쳤더니 피곤하네요. 근데 어디로 가죠?”
한이의 물음에 승호가 기다렸다는 듯 근처에 있던 갈림길을 가리켰다.
“둘로 나뉩니다. 저랑 한이 씨랑 덕배, 충호는 왼쪽. 나라 씨랑 승훈이 현호는 오른쪽.”
갑작스런 승호의 말에 한이는 곧바로 걱정스런 얼굴로 나라를 바라봤다.
나라는 한이와 짧게 눈을 마주치고, 기관단총을 사격자세로 잡아 들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이 총으로 대갈통을 구멍 내줄게요. 먹을 것들 많이 구해서 이따가 봐요.”
나라의 중의적인 표현을 눈치 챈 한이는 그녀에 대한 걱정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혹시나 자신의 말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갖고, 저들과 대화로 뭔가를 해결하려 했다면 나라는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는 역시 한이를 믿었던 것이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덜어버린 한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승호는 미소 짓는 한이를 보며 다가왔다.
“둘로 갈라진다니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셨나 봐요?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셨는데요.”
“아, 뭔가 좀 고민할 게 있어서 머리가 복잡했는데, 방금 결정을 했거든요.”
“그러시군요. 부디 좋은 결정 내렸길 바랍니다.”
승호의 말에 한이는 칼을 꽉 움켜잡았다.
“그게 오늘은 틀린 결정일지 몰라도, 결국은 옳은 결정일 겁니다. 그럼 빨리 가죠.”
한이는 나라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승호, 덕배, 충호와 함께 왼쪽 비좁은 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라는 기관단총의 총구를 앞으로 치켜든 채, 현호와 승훈의 뒤를 따라 오른쪽 넓은 상가 지역으로 들어갔다.
승호와 한이가 앞에 서고, 덕배와 충호가 뒤따라가며, 그들은 시장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정육점 근처는 이미 썩은 내가 진동을 해서, 모두 코를 막고 빠르게 지나갔고, 반대로 쌀집은 언제와도 가져갈 수 있다며 느긋하게 지나갔다.
시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좀비가 한, 두 마리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이는 칼을 잡은 팔을 크게 한 바퀴 회전시키며, 승호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 칼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드릴게요.”
후웅! 후웅!
승호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한이는 칼을 세게 휘둘러 바람 소리를 내며 좀비에게 달려갔다.
칼의 길이가 꽤 되는 탓에 좀비와의 거리를 그다지 좁히지 않고도, 한이의 칼은 좀비의 다리를 아주 쉽게 잘라낼 수 있었다.
“크아악!”
한쪽 다리를 잃은 좀비는 앞으로 넘어지면서도 끝끝내 한이의 다리를 물어뜯으려고 기어왔다.
한이는 기어오는 좀비를 잠깐 쳐다보다가, 목을 단칼에 썰어냈다.
그러더니 보란 듯이 고개를 뒤로 돌려 밝은 표정을 지으며, 칼에 묻은 좀비의 피를 털어냈다.
“이 칼 죽이죠? 닿기만 하면 다리고 머리고 그냥 떨어져 나가요.”
한이의 조금 과해 보이는 행동에 남자들은 겉으론 태연하게 웃어보였지만, 속으론 한이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워낙 성배가 튀는 탓에 성배만 신경 썼던 남자들은, 한이가 칼로 좀비를 손쉽게 처리하는 걸 보고 그 대상이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이다.
“계속 가시죠. 어디로 갈까요? 여기? 아님 저쪽?”
한이는 아예 성배가 자주하던 것처럼 칼로 방향을 가리키며, 남자들에게 기세에서 완승을 거뒀다.
남자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이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서로의 거리는 철저하게 한이가 통제했다.
망치를 든 승호는 자연스럽게 한이 근처로 붙으려고 했고, 한이는 승호가 붙으면 곧바로 칼을 좌우로 휘두르며 그를 자연스럽게 위협했다.
승호가 조금 떨어지면 덕배, 충호가 슬며시 한이의 뒤로 붙었다.
그럼 한이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가 단거리 선수였거든요. 원래 어딜 가면 반은 걷고, 반은 달려요.”
“그러셨군요. 어쩐지 다리 근육이 보통이 아니신 거 같았어요.”
“네, 수년 동안 달리기만 했으니까요. 좀비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처음엔 이 달리기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미소 짓던 승호가, 시장 바깥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참, 저쪽으로 가면 음료수 창고가 있는데 그쪽으로 가죠. 마침 음료수가 다 떨어졌어요.”
한이는 승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물을 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뇨, 못가겠는데요.”
한이가 못가겠다고 말하자, 순간 승호와 남자들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까 말했죠. 제가 고민하던 걸, 결정 내렸다고.”
“아…, 뭐 그러셨죠.”
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승호를 쳐다보며, 칼을 세게 움켜쥐었다.
“이제 서로 연기 그만하죠. 지금 당장 내 판단이 틀렸어도, 당신들이 아이들에게 한 짓거리를 본 이상 결국은 이 판단이 오를 겁니다.”
승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 한이 씨.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우린 그냥 식량을 구하러 나온 겁니다.”
“난 아직까진 당신들 죽일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한이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승호를 노려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이들한테 왜 그런 겁니까?”
“아뇨. 한이 씨. 지금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승호는 한이에게 계속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한이에게 그의 변명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이는 승호를 노려보며 천천히 칼을 치켜들었다.
승훈, 현호와 같이 갔던 나라는, 저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거라고 한이가 말한 대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는 저들과의 거리를 계속 신경 쓰며, 상가 지역을 살피고 있었다.
상가 지역은 대부분 술집과 고깃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 역시 여의도 근처에선 보이지 않던 좀비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타다당! 타다당!
두 남자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나라의 기관단총은 좀비를 너무나도 손쉽게 처리했다.
나라의 사격 솜씨를 본 승훈이 슬쩍 나라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나라 씨는 경찰이셨어요?”
“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어쩐지 교본에서나 볼 법한 사격자세라서….”
대화를 마친 승훈은 현호를 한 번 쳐다봤다. 현호는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찰나의 순간을 나라는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이 아마추어들 봐라. 누구 앞에서 작전을 세워. 어디 너희들 플랜B 구경 좀 해볼까.’
나라는 가던 방향을 바꿔 갑자기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승훈과 현호는 영문도 모른 채, 잠시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나라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술집과 노래방이 모여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라의 돌발행동에 순간적으로 놀란 현호와 승훈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다, 곧바로 그 건물을 향해 뛰어갔다.
그들이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
“왜요? 날 죽여야 되는데, 내가 도망갈까 봐 걱정돼요?”
나라의 말에 현호가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그녀에게 슬쩍 다가갔다.
“아뇨,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저희가 왜 나라 씨를 죽입니까?”
나라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제가 원래 말을 참 곱게 했었는데요. 경찰대학에서 남자들과 비교 당하기 싫어서 험한 말부터 배웠더니 입이 많이 거칠어졌어요.”
나라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승훈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대갈통에 구멍 나기 싫으면 아가리 닫고, 꺼지라고!”
“아, 정말 오해시라니까요. 일단 그 총 좀 내려놓고 얘기 합시다.”
승훈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슬금슬금 나라에게 다가왔다.
나라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경고했다.
“너희들은 이미 정체를 드러냈어. 너희가 정말로 날 해칠 마음이 없었다면, 그 도끼를 들고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을 거야.”
나라의 경고에도 승훈은 계속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라는 다가오는 승훈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그렇게 다가와서 날 공격하는 건 현실에선 안 된다니까.”
이번엔 뒤에 있던 현호마저 한 걸음 나라에게 다가왔다.
“무슨 영화요? 아, 우리는 그런 의도가 없다니까요.”
현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발사된 총알은 정확히 승훈의 이마에 한 발, 현호의 이마에 두 발 모두 명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승훈과 현호는 소리 한 번 못 내고, 그대로 쓰러졌다.
‘이놈들은 처리했는데, 한이 씨는 어디로 갔을까….’
나라는 사격자세를 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한이와 승호가 갔던 길로 그들을 찾아 나섰다.
“다시 묻겠습니다. 아이들을 왜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겁니까?”
“아니…, 그러니까 앞으론 그 옆에 예지랑 정배도 같이 매달릴 거라니까요. 이 미련한 인간아.”
승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덕배의 오함마가 한이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승호만 신경 쓰던 한이는 다가오는 덕배의 인기척을 가까스로 감지하고, 아슬아슬하게 오함마를 피했다.
덕배는 크게 휘두른 오함마를 다시 힘으로 멈춘 후, 이번엔 한이의 정면에서 오함마로 그를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땅바닥이 움푹 파였다.
이번에도 한이는 몸을 옆으로 굴리며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한이는 잽싸게 일어나서 다시 칼을 치켜들고 자세를 잡았다.
“한이 씨, 엄청 날쌔시네. 그래도 우린 셋인데 아무리 그 칼이 무시무시해도 당신이 무슨 검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조용히 신께 갑시다.”
승호의 말이 끝나자, 한이는 자신의 칼을 천천히 쳐다보다가 다시 승호를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이건 검이 아니라 칼이야. 검은 주로 찌르는 용도라서 다루기가 어렵지. 근데 칼은 그냥 휘두르면 돼. 니들이 그 무식한 망치를 휘두르는 것처럼.”
말을 끝낸 한이는 망설이지 않고 덕배에게 달려들었다.
사정거리가 조금 더 긴 이점을 이용해 한이는 먼저 덕배를 향해 칼을 내리 그었다.
덕배는 오함마를 들어 칼을 막았지만, 나무로 된 긴 봉 부분은 한이의 칼 앞에선 그냥 나무일 뿐이었다.
오함마의 봉 부분이 잘리자, 덕배는 쇠로 된 머리 부분을 잡아 한이에게 집어 던졌다.
한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오는 오함마의 머리를 미처 피할 방법이 없었다.
덕배가 던진 오함마의 머리는 그대로 한이의 가슴을 강타하며, 큰 충격을 입혔다.
“크헉!”
짧은 비명을 지른 한이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덕배와의 거리를 벌렸다. 무기가 없어진 덕배를 뒤로하고, 이번엔 충호가 한이에게 덤벼들었다.
한이는 숨 고를 틈도 없이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뛰어오는 충호의 다리를 향해 칼을 세게 휘둘렀다.
한이가 휘두른 칼은 반원을 그리며, 충호의 다리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무식하게 달려오던 충호의 왼쪽 정강이 부분에서 곧바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잠시 절뚝이던 충호는 그래도 멈추지 않고 끝내 한이를 향해 오함마를 내리 찍었다.
한이는 다른 곳으로 피하지 않고, 오히려 충호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며 오함마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곧바로 자세를 낮춘 한이는, 충호에게 돌진해서 자신의 어깨로 그의 배를 가격했다.
충호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고, 한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들어 충호의 명치 아래를 그대로 찍어버렸다.
“으아악!”
충호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한이는 멈추지 않고, 칼날을 꺾어 충호의 왼쪽 갈비뼈 사이를 갈랐다.
덕배와 승호는 두려움을 느끼며, 잠시 한이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들은 한이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들의 신에 대한 믿음이 더 컸다.
“우린 죽지 않는다. 큰어머니가 그러셨어. 우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광기어린 눈으로 한이를 노려보며 덕배가 먼저 한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기 없는 상태에서 그런 용기는 오만일 뿐이었다.
한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든 덕배의 배를 찔렀다.
덕배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승호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망치를 세게 잡았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곧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한이를 쳐다봤다.
“너희 인간들은 늘 이래. 도와준 은혜도 모르지.”
“그러는 넌? 넌, 뭐 인간 아냐?”
“우린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야.”
한이는 더 이상 승호의 말을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나라를 도우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미친 소리는 죽은 다음에 네가 믿는 그 신한테나 해라.”
“결국은 너도 죽을 거야.”
말을 마친 승호는 기합을 지르며 망치를 휘둘렀다.
오함마보다는 훨씬 위력이 떨어졌지만, 대신 가벼운 만큼 빠르게 한이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한이는 승호가 다가오자 크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예상외로 승호는 만만하지 않았다.
크게 휘두른 한이의 칼 바로 앞에서 멈춘 승호는 빠르게 옆으로 뛰며, 한이를 교란시켰다.
한이는 다시 칼을 거둬들이고, 또 한 번 크게 휘둘렀지만, 승호는 교묘하게 칼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의 큰 휘두름에 한이의 순간적인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승호는 그 틈을 노렸다.
한이가 칼을 거둬들이는 동작에 승호는 빠르게 한이에게 붙어 망치를 휘둘렀다.
칼과는 다르게 망치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러 번 휘두를 수 있었다.
근거리에서 이곳저곳으로 날아드는 망치는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한이는 왼팔을 들어 가까스로 승호의 망치질을 막아냈다.
머리 같은 급소를 막기는 했지만, 대신 한이의 팔에는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죽어! 죽어! 죽어!”
승호의 망치질은 멈추질 않았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길이가 긴 한이의 칼은 오히려 사용하기 까다로웠다.
게다가 한이가 가까스로 칼을 들고 공격하려고 하면 승호는 잽싸게 한이의 뒤로 돌아가 다시 한이의 공격 시도를 무마시켰다.
더 이상 팔로 막았다가는 팔이 부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한이의 팔엔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이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놔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각각 승호의 두 손목을 잡았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칼 버리는 거야? 고작 이 싸구려 망치 든 사람도 못 이겨서?”
“좆까 이 씨발놈아. 버리긴 왜 버려.”
한이는 승호의 두 손목을 강하게 압박했다.
승호는 잠시 한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손목을 잡힌 자세에서는 크게 힘을 낼 수 없었다.
승호의 손목을 강하게 누르던 한이가, 그의 얼굴에 박치기를 날렸다.
퍽!
한이의 이마는 정확히 승호의 코를 들이 받았다.
이번엔 승호도 한이를 향해 박치기를 날렸다.
한이는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한 탓에 왼쪽 턱을 그대로 가격 당했다.
“이제 끝나자. 이 미친 새끼야!”
한이는 승호의 두 손목을 놔줌과 동시에 그의 배를 발로 밀어버렸다.
뒤로 넘어진 승호는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한이는 그걸 보고만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승호의 어깨를 발로 차서 그를 쓰러트렸다.
약이 오른 승호는 뒤로 한 바퀴 구르며 한이와의 거리를 벌렸다.
“이 새끼가 비겁하게 일어나질 못하게 하네.”
승호가 다시 망치를 세게 쥐고 한이를 노려보며 일어났다.
승호와의 거리가 벌이지자, 한이는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들었다.
“두 번 다신 나한테 망치질 못하게 해줄게.”
“그냥 조용히 가자니깐.”
승호는 다시 망치를 치켜들고 한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한이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다시 승호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다시 둘 사이가 벌어지자, 승호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한이의 거리에서 싸우기 보다는 차라리 일단은 도망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듯, 승호는 좁은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이는 승호의 속셈을 파악하고 곧바로 승호를 쫓아갔다.
승호는 계속해서 도망치다가 아까 한이에게 같이 가자고 말한 음료수 창고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은 큰 창고 건물과 주차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고 건물을 포함해서, 대형 트럭들이 주차할 수 있는 건물 앞의 주차 공간은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창고 건물의 바깥에서 잠시 안을 주시하던 한이는 조심스럽게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건물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창고들이 각각의 번호를 달고 길게 배치 돼있었다.
대부분의 창고들은 셔터가 내려가 있었고, 간혹 셔터가 열린 창고들은 승호의 말대로 음료수가 수백 개씩 쌓여있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창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한이는 마침내 승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승호는 건물 가장 깊숙한 곳 마지막 창고 앞에 서 있었다. 승호의 뒤에는 큰 셔터로 닫힌 창고가 있었고, 셔터엔 숫자 18이 쓰여 있었다.
“야, 이제 도망갈 곳도 없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 없냐?”
“이런 씨팔. 좆나게 착한 얼굴로 좆나게 착한 척 하더니, 이거 완전히 살인마네. 내 동료 둘을 그 잔인한 칼로 난도질해서 죽이더니, 기어코 나까지 죽이겠다.”
한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승호에게 말한다.
“그래, 살인마다. 내가 너 같은 놈한테 왜 이런 말을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난 이유 없이 남을 해치진 않았어.”
“아까도 내가 말했잖아. 넌 그래서 인간인 거야. 연쇄살인마도 잡히고 나면 다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더라. 자기 애인 강간하고 때려죽인 새끼들도 경찰서 가면 뚫린 입이라고 여자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다고 떠들어 댄다고…. 이 씨팔! 그게 인간이야. 자기 남편 앞으로 생명보험 들어 놓고 물에 청산가리 타서 죽여 놓고도 끝끝내 자기가 안 했다고 거짓말 하는 게 그게 인간이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던 한이는, 어느새 냉정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해라. 그런 미친놈들 몇 명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쓰레기처럼 몰아가지마. 적어도 내 주변엔 그런 미친놈들 없었어.”
한이는 천천히 칼을 치켜 들었다. 승호를 쫓을 땐 느끼지 못했지만, 한이의 왼쪽 팔은 이미 많이 멍들고 부어있었다.
오른손으로 쥔 칼을 앞으로 내밀고 천천히 승호에게 다가갔다.
“이 소리 들려?”
“그만하자.”
“아니, 이 소리 안 들려?”
승호의 이상한 말을 한이는 무시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크으으으으”
승호에게 다가갈수록 한이의 귓가에 좀비의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설마 저 창고 안에….”
승호는 대답 대신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셔터의 자물쇠를 망치로 부쉈다.
“그만 둬!”
한이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승호가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몇 번의 망치질 끝에 결국 자물쇠가 부서졌다.
승호는 셔터의 끝을 잡고 한이를 쳐다봤다.
“여기에 있는 미지의 존재들은 왜 이렇게 됐을까? 잘 한 번 생각해봐.”
그 말을 끝으로 승호는 교활하게 웃으며 셔터를 올려버렸다.
“크아아아아아! 크으으으으!”
셔터가 올라가자마자 창고 안에 있던 수십 마리의 좀비들이 순식간에 몰려나왔다.
승호의 신체는 순식간에 좀비들에게 뜯어 먹혔다.
한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창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한이의 머릿속엔 이 좀비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건물의 문을 닫기 위해 스위치를 찾았다.
다행히 문 바로 옆에 건물의 입구를 닿는 문의 스위치가 있었고, 한이는 재빨리 그 스위치를 눌렀다.
문 안쪽에 있던 노란색의 경광등이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내자, 창고의 문이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렸고, 좀비들은 어느새 입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이는 다가오는 좀비들을, 되도록 한 방에 목을 베어가며 입구를 지켰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뛰어오는 좀비가 섞여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한이 혼자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뒷걸음질 치며 좀비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려고 한이가 노력하던 그때, 담장의 끝에 있던 철문을 열고, 구세주처럼 나라가 나타났다.
“한이 씨, 그냥 뛰어요. 제가 엄호 할게요.”
한이는 천천히 내려오는 문을 안타깝게 쳐다보다가,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나라는 한이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엄호사격을 해주며 한이를 도왔다.
“됐어요. 나라 씨, 같이 도망가요, 이제.”
한이와 나라는 그렇게 음료수 창고를 벗어났고, 수십 마리의 좀비들은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좀비들의 괴성과 창고의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거기다 나라의 총성까지 더해져 근처의 좀비들까지 몰려들기 시작했다.
뛰는 좀비들은 한이와 나라에게 맹렬한 속도로 따라 붙었다.
그때마다 몸을 돌려 한이는 칼로, 나라는 총으로 좀비들이 처리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좀비들을 따돌리지 못했다.
결국 좀비들은 계속 그 둘을 따라 서울교까지 진입했다.
“젠장, 나라 씨, 어쩌죠.”
“지금은 플랜B가 없어요. 그냥 우리 사람들하고 뭉치는 수밖에요.”
한이와 나라는 방어벽의 철문을 통과하면서 잠깐 동안 철문을 쳐다봤다.
나라가 쇠사슬로 다시 철문을 묶으려 하자, 한이가 나라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곳은 지킬 가치가 없어요. 어차피 우린 우리 사람들만 만나서 여길 떠나면 돼요.”
잠시 망설이던 나라도 쇠사슬을 그냥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래요. 우리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네요.”
좀비들이 몰려오자 둘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쇠사슬을 풀 줄 몰라, 늘 서울교 위에서 서성이다 죽음을 맞이했던 좀비들은 당당하게 철문을 통과하며 여의도로 입성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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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마지막화 - 하얀 사람들 (5부. 희망) +후기+감사 인사
배트를 든 성배와 창을 든 소희, 그리고 산탄총을 든 진모가 63빌딩 앞에 나란히 섰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빌딩이 마치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건 셋 모두 똑같은 마음이었다.
“자, 한 번 가볼까. 아저씨, 저 쏘면 안 돼요.”
가슴을 쭉 펴며 무뚝뚝한 농담을 던지는 성배에게 진모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대답했다.
“난 지금부터 저것들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소희의 얼굴에도 밝음과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성배 오빠, 그래도 아무나 죽이진 말아요. 꼭 죽여야 될 사람들만….”
“야 인마! 아직도 날 모르냐. 상대가 날 죽일 마음이 없으면, 내가 먼저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대화가 끝나자 성배가 먼저 성큼성큼 빌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소희가, 끝으로 진모가 사격자세를 취하며 따라 들어갔다.
성배가 빌딩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몽둥이와 오함마, 도끼를 들고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펑! 철컥!
성배가 손 쓸 틈도 없이 진모의 산탄총이 불을 뿜었다.
진모는 일부러 덤벼드는 사람의 다리만을 명중시켰다.
다리 한쪽이 터져나간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뒹굴었다.
진모는 다시 장전을 마친 총구를 하얀 옷의 사람들에게 들이밀었다.
“미리 말하지만, 난 일부러 당신들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방아쇠 당기는 걸 망설이지도 않을 겁니다.”
잠시 동안 하얀 옷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 역시 두려움 보다 자신들의 신에 대한 믿음이 훨씬 컸다.
“신이 우릴 지켜줄 거야!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말하셨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면 그만큼 우리가 안전할 거라고!”
광기어린 눈동자로 성배를 비롯한 소희와 진모를 노려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그들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그래, 니들은 이래야 돼. 이래야 내가 맘 놓고 싸우지, 이 씨발새끼들아!”
하얀 옷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열 명 남짓 됐다.
무거운 오함마를 휘두르며 남자들이 먼저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성배는 아슬아슬하게 남자들이 휘두르는 오함마를 피하며 한 명씩, 한 명씩 배트로 정강이와 팔꿈치를 가격했다.
알루미늄 배트로 정강이를 맞은 사람은 곧바로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가격당한 사람은 오함마를 떨어트리고 자신의 팔꿈치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이런 허약한 인간들이…. 하, 참나.”
성배는 단 한 번의 공격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이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괴로워하는 것도 잠시, 다시 일어나 성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약한 상대라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던 성배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 팔과 다릴 잡혔다.
성배의 활약에 넋 놓고 있던 소희가 그제서야 창을 꼬나 잡고 성배에게 다가갔다.
소희의 창질은 생각보다 화끈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배의 다릴 잡고 늘어진 남자의 등을 창으로 찍어버렸다.
“커헉!”
남자가 성배의 다릴 놓자, 성배는 몸을 크게 흔들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또 한 명의 남자를 떨어트려버렸다.
성배의 팔을 놓친 남자는 균형을 잃고 소희 쪽으로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소희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두 손으로 창을 비틀어 쥐고 다가오는 남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진모가 손수 갈아준 톱날 모양의 창날은 사람의 피부조직을 너무나도 쉽게 뚫고 들어갔다.
허벅지를 찔린 남자의 하얀 옷은 시뻘건 피로 금세 물들었다.
소희가 창으로 남자들을 처리하는 동안 뒤쪽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던 여자들은 진모가 막아서고 있었다.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지 않으면 쏘지….”
진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옷의 여자들 역시 몽둥이를 들고 진모에게 달려들었다.
“우리의 신을 거역한 너희들은 모두!”
펑 하는 산탄총의 굉음이 여자의 말을 잘라버렸다.
진모 역시 망설임이 없었다.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진모는 달려오는 여자의 다릴 향해 산탄총을 발사한 것이다.
두 다리가 전부 터져나간 여자는 공중에서 눈 깜짝할 정도의 순간을 머무르다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충혈 된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자신의 터져버린 다리는 보지도 못한 채, 바닥을 뒹굴며 괴기한 비명을 질러댔다.
진모는 산탄총을 다시 장전했다. 철컥하는 장전음이 순간 고요해졌던 빌딩의 로비에 울려 퍼졌다.
“아냐, 우린 죽지 않아! 신이 우리와 함께 할 거야!”
고요함도 잠시 나머지 하얀 옷의 사람들은 일제히 성배와 소희, 진모에게 달려들었다.
몇 번의 산탄총의 굉음과 날카로운 창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거친 쌍욕과 배트의 타격음이 잠시 주변을 가득 메웠다.
하얀 옷을 입었던 사람들의 옷은 더 이상 하얀색이 아니었다.
약간의 상처를 입은 성배와 머리채가 뜯긴 소희, 그리고 아주 깨끗한 진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숨통들은 붙어있으니까 나중에 신이 원상복구 시켜줄 거야. 그치, 이 새끼들아.”
신음 소리만 내며 바닥을 기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진모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성배 군, 소희 양. 10층이야. 10층에서 멈춰있어.”
진모는 다급하게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하지만 성배가 마음이 급한 진모를 만류했다.
“아저씨, 안 돼요.”
“왜 그래? 성배 군.”
“계단으로 갑니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그래요. 아저씨 계단으로 가요.”
소희와 진모를 먼저 보낸 성배는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10층 버튼을 누르고 잽싸게 계단으로 뛰어올라갔다.
“너무 빨리 뛰지 마세요. 힘 빠지면 싸워보기도 전에 지치니까.”
“네, 오빠. 역시 성배 오빠는 우리 해피엔딩스의 싸움 반장다워요.”
뜬금없는 소희의 말에 성배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고 물었다.
“해피엔딩스는 뭐냐?”
“아, 그거 우리 팀명인데요.”
“나 없는 동안 별짓 다 했구나. 아무튼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천천히 심호흡해라.”
어느새 10층에 다다른 그들은 잠시 계단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각자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성배를 필두로 비상계단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 세 곳이 전부 트여있는 형태로 생긴 10층은 책상과 의자는 하나도 없었다.
벽과 바닥은 물론이고 곳곳에 있는 기둥마저도 전부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천장 이곳저곳엔 밧줄을 묶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이는 갈고리 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갈고리들엔 밧줄이 단단히 묶여있었다.
성배가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뒤따르던 소희가 천장에 묶여있는 밧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는 원래는 사무실 같은데 왜 천장에 저렇게 밧줄을 묶을 수 있는 갈고리들이 달려있는 걸까요?”
진모는 말없이 천장만 쳐다봤고, 성배 역시 잠깐의 생각 후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10층은 우리가 예전부터 임대했던 곳이죠.”
어디선가 범식이 나타나며 소희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그의 곁엔 정희를 비롯해 몇 명의 사람들이 역시나 하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구만, 큰아버지, 큰어머니. 근데 그 잘난 신은 어디 계시나…?”
성배의 껄렁한 말투에 하얀 옷의 사람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성배는 오히려 밝게 미소 지으며 다시 한 번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주둥이들이 얼어붙었어? 왜? 계획대로라면 나는 영호한테, 아저씨랑 소희는 현준이한테 당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서 여기까지 오니깐 이해가 안 돼?
성배의 말에 정희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의 신이 분노하실 겁니다.”
“이 아줌마야. 지금 당신이 믿는 그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분노를 걱정할게 아니라, 당신 눈앞에 서 있는 이 차성배의 분노나 걱정하시지.”
“역시 인간들은.”
정희가 말을 시작도 하기 전에 진모가 산탄총을 정희 쪽으로 들이댔다.
“그 말도 안 돼는 얘기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요. 정확히 세 번만 묻겠습니다. 우리 아들 정배랑 우리 딸 예지 어딨습니까…?”
진모의 과감한 행동에 성배와 소희는 물론이고, 범식과 정희를 비롯한 하얀 옷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
진모는 그들의 놀람과 상관없이 무겁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한다.
“한 번 더 묻습니다. 우리 아들 정배, 그리고 우리 딸 예지 어딨습니까?”
“당신들은 이러다 정말로 신의 분노를 피하지 못할 겁니다! 저 미지의 존재들이 왜 생겼는지! 왜 이곳이 이렇게 안전해졌는지! 당신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겁니까! 당신들을 여기로 이끈 건 다 신의 계획이란 말입니다!”
정희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범식은 갑자기 손을 들고 천장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자신들을 해하려는 저들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희가 그의 기분 나쁜 행동에 인상을 쓰며, 조금 뒷걸음질 쳤다.
성배는 무표정한 얼굴로 범식이 하는 짓을 보고만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우리 아들 정배랑! 우리 딸 예지 어딨냐고 이 미친 새끼들아!”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진모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총구를 정희의 머리에 겨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흥분한 진모는 떨리는 손가락을 방아쇠에 얹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없어! 우리가 여기 온 건, 그 개 같은 신의 계획이 아니라 단순히 빛나던 63빌딩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그냥 아이들만 데려와. 그냥 데려오라고!”
정희는 끝내 진모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만, 그만 하세요. 아이들은 위층에 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 중 한 여자가 소리쳤다.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소희와 진모가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잠시 후 소희와 진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정배와 예지는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정배와 예지 말고도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있었다. 그 아이들은 전부 극심하게 말라있었고,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 아이들을 보자 하얀 옷의 사람들 몇 명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눈물을 쏟아내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그 광경을 본 소희는 어이가 없어 하며 창을 치켜 들었다.
“지금 연기하는 거예요? 왜 이제 와서 눈물을 흘리고, 왜 이제 와서 아이들을 안아주는 거예요? 왜!”
“죄송해요. 저희는 정말 무서웠어요. 모든 게 두려웠는데, 정말로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기도를 드린 다음부터 모든 게 편안해지고, 안전해 졌어요.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에 우리도 처음엔 전부 거절했지만, 힘센 남자들이 나서서 행동하는 탓에 우리들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한 여자의 말에 소희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다그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대지 마세요. 당신들은 앞으로 저 아이들의 죽은 부모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잘 지켜야할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당신들을 찾아내서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요.”
사람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괜찮겠지…. 진짜 믿어도 되겠지.”
성배는 그 사람들이 못 미더운 듯, 소희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소희는 사람들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믿어야죠. 저 여자가 아까 장소를 말할 때의 눈빛은 단순히 우리를 무서워서한 게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아이들을 걱정하는 눈빛이었어요.”
“그래, 소희 네 말대로 이 사람들은 진짜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암 덩어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면 암은 반드시 사람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기 마련이지.”
성배는 진모와 아이들, 그리고 소희와 하얀 옷의 사람들을 엘리베이터에 태워 내려 보냈다.
10층에 남은 사람은 성배와 정희, 그리고 범식뿐이었다.
성배는 정희와 범식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천천히 그리고 나지막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제부터 진짜로 신이 필요할 거다.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니들은 선을 넘었어.”
말을 마친 성배는 배트로 범식의 머리를 강타했다. 범식은 그대로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정희가 뒷걸음질 치자 성배는 성큼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밧줄로 묶어 버렸다.
“내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니들이 믿는 신이 그러더라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제물로 바치라고.”
“아냐! 거짓말 하지 마! 우리의 신이 왜 당신 꿈에 나타나!”
“글쎄. 어디 거꾸로 매달려서 자알 생각해봐.”
성배는 그렇게 말하며 정희를 묶은 밧줄을 천장에 걸린 갈고리에 연결해 버렸다. 밧줄을 팽팽히 당겨서 사무실 기둥에 묶은 성배는 이번엔 범식도 똑같이 묶어서 천장에 매달아 버렸다.
“어때,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기분이. 아마 그 신께서 많이 좋아하실 거다.”
성배는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정희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빌딩 1층으로 성배가 내려가자, 정신 차린 하얀 옷의 사람들은 아이들과 함께 앞으론 잘 살겠다는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돌아갔다.
진모와 소희, 그리고 성배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같은 일이 더는 반복되지 않기를 빌었다.
“아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이랑 나라!”
“그래, 맞아! 성배 군, 일단 가자고!”
진모는 소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성배와 둘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뛰어오는 한이와 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성배 군, 저기 오는 게 나라 양하고 한 군 맞지? 근데 내가 눈이 안 좋아서 그런데….”
성배는 멀리서 한이와 나라를 쫓아오는 엄청난 숫자의 좀비를 보고 허탈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맞아요. 좀비 맞네요. 참나, 우린 어떻게 사건이 늘 연다발로 몰려올까요. 이제 좀 쉬어볼까 했는데….”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진모와 성배의 앞으로 소희가 튀어나갔다.
“뭐해요! 일단 언니랑 한이 씨 구해야죠!”
“아참, 미안해 소희 양.”
“그래그래, 이 차성배가 또 간다. 이 빌어먹을 세상아!”
세 사람은 일단 뛰었다.
좀비떼로부터 쫓기는 나라와 한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라 양! 한 군! 벌려!”
진모가 고함치자 나라와 한이가 간격을 벌리며 달려왔다.
펑! 철컥! 펑! 철컥!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오던 좀비들은 곧바로 진모의 산탄총에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많이 지쳐 보이는 나라에게 성배가, 역시 지쳐 보이는 한이에게 소희가 각각 달려가 그들을 바짝 쫓아오던 좀비들을 일격에 죽여 버렸다.
“먼저들 가세요. 우린 좀 더 막을 수 있어요.”
“아뇨, 소희 씨. 그 정도 숫자가 아닙니다.”
한이의 말대로 몇 마리 처리한다고 나아질 상황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진모가 예지를 안았고, 성배가 산탄총을 받아들었다.
특히 지쳐 보이는 나라는 소희가 곁에서 완벽하게 지켜주었다.
진모와 나라가 앞서 달렸고, 그 뒤에서 소희와 한이, 성배가 쫓아오는 좀비들을 간간히 처치하며, 무작정 도망가고 있었다.
“이 좀비들 밖으로 유인해야 돼!”
“아뇨, 형. 우리가 그 미친 광신도들 목숨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아냐, 아이들이 있어. 그리고 암 덩어리는 내가 잘라냈으니깐 이 사람들 살려줘야 돼!”
자세한 상황을 몰랐던 한이는 그제서야 성배의 말을 수긍했다.
한이는 곧장 나라에게 다가가 기관단총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기관단총의 총성에, 좀비들의 상당수가 한이를 쫓기 시작했다.
“일단 이 좀비들을 다시 서울교 쪽으로 유인하죠.”
“한이야! 적어도 5분 이상은 뛰어야 하는데, 지금 네 체력으론 무리야! 우리끼리 흩어지는 것도 위험하고.”
그때였다.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울리며, 어디선가 차들이 나타났다.
정신 차린 하얀 옷의 사람들이 한이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차를 가지고 도로로 나온 것이었다.
몇몇은 차로 좀비를 들이 받고, 몇몇은 경적을 울려대며 좀비를 분산 시켰다.
사실 체력이 거의 바닥났던 한이도, 하얀 옷의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도와주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은 좀비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각자 차를 잡고 올라탄 한이와 성배는 총으로 좀비들을 난사했고, 많이 지친 나라는 우선 아파트 고층으로 아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피신했다.
진모와 소희도 차를 잡아타고 종횡무진 좀비들 속을 누비고 다녔다.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좀비의 거센 공격에 고립되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좀비군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한이, 소희, 진모, 그리고 언제나 천하무적인 성배의 활약에 힘입어 결국 모든 좀비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좀비들이 정리되자 나라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아이들과 내려왔다.
“죄송해요. 전혀 도움이 되질 못했네요.”
그런 나라의 머리를, 성배가 다가가서 거칠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인마. 너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환자였잖아. 한이랑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만으로도 고맙다.”
이상하게 어색한 성배의 말투와 행동에 소희의 장난기가 또 발동했다.
“뭐야, 지금 언니 머리를 쓰다듬은 거예요? 진짜 둘이 어디 교회라도 가서 신 앞에 간단하게 맹세하고, 결혼식이라도 올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소희의 말에 성배가 멋쩍은 듯, 그 특유의 말투로 큰소리를 쳤다.
“야 야! 아오, 신은 개뿔. 예수고 부처고 사이비고 당분간 신과 관련된 얘기 꺼내지도 마라.”
그런 성배의 옆으로 나라가 다가오며 조용히, 그리고 살벌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한 번만 더 함부로 내 머릴 쓰다듬으면, 그 손을 두 번 다시 쓰지 못하게 만들어줄게요.”
나라의 살벌한 말에 성배는 억울한 듯, 나라의 어깨를 잡고 말한다.
“너 왜이래. 어제 우린… 그러니까 네가 아프지 않았다면 우린 저기….”
“우리가 뭐요? 성배 씨 자꾸 저랑 엮이려고 하시는데, 전 성배 씨한테 관심이 없어요.”
나라의 냉정하고 차가운 반응에 성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뭐야! 너 나 좋아 하는 거 아니었어? 침대에 누워있는 내 옆에 앉기도 하고, 나한테 스킨십도 하고, 고맙다고도 했잖아.”
“옆에 앉고, 어깨 좀 만지고, 감사인사 하면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요? 성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나라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말은 냉정하게 했지만 나라의 표정은 밝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아주 환한 미소를 그녀는 성배 몰래 짓고 있었다.
성배를 제외한 모두는 그 사실을 눈치 챘지만, 성배만은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역시, 우리 노친네 말이 맞았어. 여자는 엄마 빼고 다 요물이야. 저런 요물….”
촉촉한 성배의 눈을 뒤로하고, 진모와 한이, 소희, 나라는 하얀 옷의 사람들과 다시 마주했다.
서로 말없이 모여 있는 모두를 바라보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소희가 하얀 옷의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전했다.
“정말 여러분들 믿고 떠날게요.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소희의 말에 하얀 옷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진실로 그들의 마음을 전했다.
“정말 다시 태어날 겁니다. 믿어 주세요. 이 아이들을 어른이 될 때까지 우리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던 성배가 성큼 다가오며 그들에게 말한다.
“혹시라도 63빌딩에 가서 그 인간들 풀어주는 건 아니겠죠?”
“아뇨, 이젠 더 이상 그들을 믿지 않아요. 그 사람들을 가장 믿고 따르던 강한 남자들도 모두 죽었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여의도 반대쪽으로 가서 살 겁니다. 아직은 여기가 안전하니까요.”
이번엔 진모가 따뜻한 한마디를 건넸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죄 짓고 삽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벌 받고, 모두가 나쁜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실수는 실수라고 모두가 인정하셨으니, 앞으로는 실수한 만큼 더욱 열심히 살아남으시면 돼요.”
“진모 아저씨 말이 맞아요. 전 경찰이었어요. 아니 지금도 경찰이에요. 앞으로도 경찰일 것이고요. 이런 저도 많은 죄를 짓고 삽니다. 그렇지만 저는 인간이기에 계속 노력합니다. 오늘 죄를 지었어도, 내일은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노력하는 거죠. 여러분들도 앞으로 많은 일들이 닥칠 거예요. 그때마다 오늘을 기억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나라의 말에 하얀 옷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끝으로 한이가 그들에게 다가가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우린 인간이에요. 하지만 짐승처럼 행동하면 짐승이 되는 겁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행동해야 진짜 인간입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여러분들 아니었으면 우린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고, 하얀 옷의 사람들은 서울교 방어벽까지 한이 일행을 마중 나왔다.
좀비를 처리한 직후 이미 많은 대화를 나눈 터라, 짧은 인사만이 오고갔다.
하얀 옷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한이 일행을 보고 물었다.
“근데 어디로들 가실 건가요? 여러분들만 괜찮다면,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새 출발하는 것도 괜찮을 텐데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한이 일행 모두의 표정은 똑같은 미소로 가득 찼다.
일행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역시, 다들 비슷한 생각인가 본데. 그렇지 한 군?”
“뭐, 이쯤 되면 우린 진짜 가족 아닌가요? 그렇죠, 소희 씨.”
“우린 이미 가족이에요. 해피엔딩스는 하나잖아요!”
“아냐, 소희야. 그 팀명은… 이따가 차에서 다시 정하자. 근데 다들 정말 거길 가고 싶은 거예요?”
“어디 생존자 아파트? 아, 나 진짜 이 사람들이 거긴 안 된다니까!”
성배의 생뚱맞은 소리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성배를 노려봤다.
“뭐야, 왜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글쎄, 생존자 아파트라면 난 안가. 가려면 아저씨하고 당신들끼리 가던가! 정배, 넌 삼촌이랑 남을 거지?”
성배의 질문에 정배가 오랜만에 헐크 흉내를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전 예지를 지켜야 돼요.”
정배의 말에 어른들은 모두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고, 예지는 정배를 끌어안으며 한없이 밝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하얀 옷의 사람들과 작별을 했다.
밴을 주차해둔 곳으로 다시 돌아간 그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밴에 올라탔다.
“근데 정말 생존자 아파트 가는 거야? 아, 진짜 거긴 안 된다니까.”
“성배 씨, 정말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아님 진짜 몰라서 그래요?”
“뭐가?”
“우리가 모두가 가기로 생각한 곳은 생존자 아파트가 아니에요.”
나라의 말에 성배는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배가 계속 투덜대자, 보조석에 앉은 한이가 뒤를 돌아 성배를 보며 말했다.
“충청도 벙커. 거기로 가야죠.”
“뭐? 다들 거기를 말한 거였어?”
“네. 궁금하잖아요. 가장 안전할 수고 있고요. 하여간 이상하게 끌려요.”
“근데 어딘지 알아? 윗대가리들 짱박혀 있는 곳이면 쉽게 찾기도 어려울 텐데.”
이번엔 소희가 성배에게 대답했다.
“우리가 언제는 뭐 제대로 알고 갔나요? 이렇게 또 가보는 거죠. 가다보면 해답이 나오잖아요. 예지를 구하기 위해 수백 마리의 좀비를 처치한 것처럼, 악마 같은 놈들에게 잡혀간 나라 언니를 구할 때처럼, 있지도 않은 신을 믿으며 우릴 해치려 한 광신도들을 물리친 것처럼요.”
“그래…. 근데 아저씨랑 니들 말이야.”
“응, 왜 그래 성배 군?”
“아니 좀 섭섭해서요. 나 없을 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부 생각이 그렇게 같은 수가 있죠? 나만 빼고…. 후우우우우, 담배도 쓰네. 꼭 왕따 같잖아요.”
삐진 성배의 어깨를 예지와 정배의 조막만 한 손이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재롱 섞인 안마에 성배의 삐진 마음은 눈 녹듯이 녹았고, 그는 오랜만에 좀비 흉내를 내며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함께 놀기 시작했다.
진모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나라는 기관단총을 분해해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고, 한이는 칼에 들러붙어 굳은 피를 다른 칼로 떼어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 아시죠, 출발하면 아무도 못 내려요.”
소희는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따지고 보면 하루 조금 지난 시간을 잠들어 있었을 뿐이지만, 밴의 엔진음은 어느 때보다 웅장하게 들렸다. 마치 달리지 못해 화라도 난 것처럼 밴은 거대한 소릴 질러댔다.
“자, 해피엔딩스의 다음 목적지는 충청도 벙커! 과연 우리는 그곳에서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 것인지…. 출발!”
“아 글쎄, 해피엔딩스는 아니라니깐!”
그렇게 소희의 말에 모두는 입을 모아 반대를 했다.
하지만 팀명에 대한 의견은 달라도, 그들이 찾는 희망은 언제나 같은 곳에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가는 길에 확정된 희망은 없을 지라도, 그들은 계속 찾아갈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 그 희망을.
누군가는 말했다. 희망 없는 삶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삶이냐고.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이, 방금 좀비가 된 저 사람들에겐 희망이었다고.
- 좀비로 뒤덮인 세상 시즌2 완결 -
시즌2 재밌게 보셨나요?
지금부터는 후기인데요. 굳이 안 읽으셔도 되지만, 그래도 좀비로를 재밌게 보셨다면 읽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독자님들과 제 머릿속을 조금이라도 공유하고 싶어서요 ㅎㅎ.
그리고 특별 감사에 독자님의 아이디가 나올수도 ^^...
시즌1에선 주인공들의 만남, 그리고 주인공들을 좀비들과 한 장소에 던져놓고 벌어지는 액션을 위주로 썼습니다.
그러나 시즌2에선 주인공들과 같은 사람인 미친놈, 악마 같은 사내들, 신에 미친 광신도들을 한 장소에 던져놓고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시즌1에 비해 좀비와 펼치는 액션은 줄었지만, 시즌2에선 훨씬 더 풍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좀비로를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인물들과 대사였습니다.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확실한 개성을 부여해서 굳이 '누가 말했다'라는 묘사 없이도 누가 대사를 치는 건지 독자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이와 나라, 소희 이 세 명의 대화를 제외하면 전부 다른 느낌으로 서로를 부르게 썼습니다.
예를 들자면 진모는 늘 '양'이나 '군'을 붙여 구분을 지었고, 성배는 늘 반말에 건방진 말투를 부여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말했다' 나 '입을 열었다' 같은 묘사를 사용한 이유는 역시 제 고집보다는 읽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편한 게 좋은 작품이 아닐까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또 대사를 쓸 때 저는 직접 연기를 해봅니다. 또라이 같죠? ㅎㅎ;;
그런데 이게 결코 우스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대사를 끄적일 때와 제가 직접 차성배가 돼서 껄렁하게 대사를 던져보고, 한이가 돼서 차분하게 대사를 던져보는 게 정말 대사를 쓰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매 대사를 그렇게 쓴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분량에 대한 제 고집이었습니다.
너무 과하게 많거나, 적으면 자르거나 붙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생각한 한 편(화)의 흐름을 단순히 분량 때문에 인위적으로 나누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주 2회라는 모험적인 (사실 꼬박 주 3회 이상 올리긴 했습니다만) 분량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독자님들께서 이런 점을 파악해 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저는 뿌듯할 거 같습니다.
말이 길어지네요. 근데 두 달 정도를 좀비로 시즌2를 쓰다 보니, 독자님들과 공유하고 싶은 게 많네요.
사실 중간에 이야기를 조금 덜어 냈습니다. 너무 질질 끄는 건 아닐까?, 너무 신파인가?, 너무 궁색한가? 이건 스릴피자가 아니라 러브피자가 쓴 것 같은데;; 등의 이유였습니다.
괜히 저 혼자만의 걱정으로 실컷 써놓고 지워버린 이야기들 (성배가 희선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지낸 날들 [심지어 섹스씬도;;] 소희+한이 팀이 한이의 가족을 구하러 가서 벌인 목동아파트 이야기) 이 조금은 아쉽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시즌3에서는 더 풍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아, 참! 시즌제로 가는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제가 상상력이 그렇게 뛰어나지가 않습니다. 제 머리로는 도저히 한 흐름으로 쭉 가는 연재는 상상도 못합니다.
솔직히 굳이 하라면 또 못할 건 없겠습니다만, 제가 확신을 갖고 이야기를 써야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도 확실한 재미를 느끼실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금... 아니 오래 기다려 주십시오.
다행히 좀비로가 시즌별로 완전히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큰 갈증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
오래 기다려 주시면 시즌3는 많이 완성을 해놓고, 일주일에 4,5 번 연재 하는 형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물론 각 화의 분량은 조금 줄어들겠지만요 ㅎㅎ; 아무래도 문피아의 흐름이 적은 분량이더라도 매일 보는 걸 선호하는 거 같아서요. 분량에 대한 제 고집 따위는 시즌3에선 버리겠습니다.
우선은 취직부터 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무조건 빨리 돌아오겠다는 거짓말은 하기 싫었습니다. 취직하고, 일터에 적응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생각해서 조금씩 쓰다보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여간 어디 가서 뒤지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올 테니깐, 기다려만 주세요!
좀비로를 제대로 끝내야 그 뒤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하늘에서 괴물들이 쏟아지는 이야기나 초능력자들의 대결을 그린 이야기 등을 자신 있게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동안 좀비로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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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감사 - 시즌1이 끝나고, 연이은 취업 실패로 우울할 때, 그저 14편 짜리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던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봐주신 ~함사장님~. 게다가 시즌2의 첫 댓글을 달아 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 같은 듣보잡 작가의 글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 계셨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셔서 시즌2를 열심히 달렸습니다.
이야기에서 너무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는 요소요소를 지적 해 주셨던 ~夢劒行~ (무식해서 뭐라고 읽어야 할지 ^^;) 하여간 한자님 ㅋㅋ.
비록 작가인 저와는 생각이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좀비로에 애정을 갖고, 이럴수도 있지 않냐며 의견을 제시해 주셨던 ~깡치님.~ (늘 주장하지만 저는 정답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독자 님들과의 의견 차이가 늘 존재합니다.)
늘 기분 좋은 댓글을 달아 주셔서 저 또한 미소 짓게 만들었던 ~에너빅님.~
처음으로 저에게 직접적인 응원글을 남겨 주셨던 ~맬맬울어님.~ 시즌2도 봐주셨겠죠? ㅎㅎ
시즌2가 시작하기 딱 일주일 전에 시즌1을 읽어 주시며, 재밌다고 2를 기대 한다고 해서 시즌2의 산뜻한 출발을 예고해 주셨던 ~뚜부님.~
좀비 매니아로 추정되시는 ~Calten님.~ 시즌2도 만족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솔직히 제가 댓글을 이해 못했던.... ~민밈님과 아시나요님.~ 혹시라도 이걸 보신다면 제발 댓글의 해석 좀 부탁드립니다.ㅠㅠ 너무 궁금해요. 민밈님의 시즌2 2화에 달린 - 예의바른 여자들이라는 댓글과 아시나요님의 시즌2 4화에 달린 - 그 물건을 부를때는 성배, 먹을때는 고기라는 댓글요.
아주 맘에 와 닿는 좋은 응원을 해주신 ~아황님.~ 나중에 알고보니 3년전 작품임에도 아직도 인기있는 소설을 쓰신 작가님이셨습니다.
현실적인 좀비물이 너무 두려워서 중도 포기하신 ~도오옥자님.~ 원래는 공포영화도 안 보신다고 하셨는데, 글이 재밌어서 시즌1만이라도 읽었다는 댓글이 뭔가 되게 밝은 희망을 저에게 주신 것 같았습니다.
시즌2 6화 반전과 12화 재회...는 제가 가장 신경쓰고, 여러 번 고쳐가며 완성시킨 이야기 였습니다. 그 두편은 올리고 나서도 가장 많이 확인하고 긴장됐었습니다. 특히 6화는 웹소설치고 너무 힘을 준게 아닌가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런 6화에서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 주시며, 저에게 좋은 존재감을 드러내 주셨던 ~떠돌이나그네님.~ 그 뒤로도 자주 댓글을 달아주시며, 다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충족을 시켜 드렸는지 궁금하네요^^;
시즌2를 시작하며, 급격히 위축된 자신감으로 인해, 매일 연재가 당연시 되는 이곳에서 매일 연재를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작품들과 비교해서 쪽수로 따지고 보니, 사실 무료 소설로서는 그렇게 적지 않은 분량을 주마다 꼬박 올리긴 했습니다. 지금이야 연재가 끝나서 제 스스로 말할 수 있지만, 연재중에 제가 이것 좀 알아봐달라고 할 순 없었습니다.ㅎㅎ;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옐로우보이님~께서 이점을 알아봐 주셨습니다.
그때, 상당히 뿌듯했습니다.
시즌2 초기에 독자 분들께 설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주시며 나타나신 ~홀아비야님.~ 그 이후로도 재밌게 보신다는 댓글로 힘을 주시더니, 급기야는 정말 감히 꿈도 꾸지 않았던 추천글을 써 주셨습니다.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문피아 앱을 실행해서 좀비로에 들어와봤는데, 선작수가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치솟았던 그 좋은 기억. 처음엔 이게 뭔일인가 싶었으나, 혹시?... 라는 마음으로 추천게시판을 가보니 좀비로가 떡하니 올라와 있었습니다. 시즌1을 끝내고 선작수가 20정도였고, 몇 번의 홍보를 하며 50이 됐었는데, 추천글 한방에 80, 90이 찍히면서 아주 신나게 소설을 썼습니다.
끝으로 ~여백님, 환담님, 약스님, 이십삼님, 썩은오택님, 쏠트님, hanatampa님, 쌍가락지님, 어머니님, 혁이님.~의 소중한 댓글 또한 잘 보았습니다. 시즌2의 끝까지 재밌게 봐주셨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봅니다.
그럼, 다시 볼 그날까지 다들 희망하시는 것을 이루시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재밌게 보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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