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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에 신고해 준 사람 있잖아요. 저 구해 준 사람. 혹시 누군지 아세요?”
“글쎄. 아버님이 충분히 사례를 했다는 것 외엔 모르겠구나.”
주 회장과 똑같은 답변이었다. 희옥의 얼굴이 정말 모르는 것으로 보여 괜히 여기까지 다시 발걸음을 했나 싶어 은하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혔다.
내내 속이 좋지 않았다. 두통도 있었고, 그날 일을 무리하게 떠올리려 하면 악몽까지 꿨다.
그냥 이대로 잊고 살라는 듯이 온몸이, 머리가 그날을 떠올리는 걸 거부한다.
“왜, 무슨 일 있니?”
멍하게 앞만 보고 있는 은하가 이상해서 희옥이 물었다.
“아뇨. 아닐 거예요.”
주 회장이 오면 확실해지리라.
천운이었다고 했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 경과를 본 뒤 수술을 하자고 할 정도로 다리의 상태는 긴 흉터가 남는 것 외엔 괜찮을 거라고 들었다. 흉터가 남는다는 사실도 화가 났다.
가장 힘들 때 윤서우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미친 듯이 서러웠다.
엄마가 옆에 없는데 언니라도 있어 줘야지.
우리는 가족이었으니까. 얄팍하지만, 윤서우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가족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만 있어도 서우가 달려왔는데 장례식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원망, 분노,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은하가 숨을 참았다.
턱 끝이 덜덜 떨렸다.
잊고 잘 살아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이마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괜찮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몸이 어디 안 좋으면 최 박사님을….”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흠칫 놀란 은하가 말했다. 어쩐지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거 하나는 있었네.”
“네?”
“고모 발인날, 아버님이 그날 새벽에 어딜 가셨다가 비를 많이 맞고 돌아오셨는데 전에 없이 괴로워하셨어. 비서나 보좌진도 없이 다 두고 나갔다 오셨더라고. 그냥 고모 돌아가신 것 때문에 그러나 했었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좀 달랐어.”
그때를 희옥이 회상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와 딸의 영정 사진 앞에 앉아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이러다 큰일 치른다고 옷을 갈아입으시라 해도 주 회장은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할 일을 해야 했다고 하시더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희옥의 말에 은하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어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린다.
그때 회장님이 들어오신다는 집사의 말과 함께 현관이 열렸다. 들어와서 소파에 앉아 있는 은하를 힐끗 본 주 회장이 말했다.
“서재로 오너라.”
뒷짐을 진 채 유유히 그가 먼저 서재로 향한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걷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잠시 정신이 아득했다.
“은하야.”
어쩐지 이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내내 그랬다. 도망가듯 결혼을 선택한 것도 그래서다. 제 가정을 이루고, 이들을 외면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희옥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표정 없는 얼굴로 은하가 겨우 주 회장의 뒤를 따랐다.
서재의 거대한 문이 닫힌다.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나는 주 회장의 서재는 밤에 항상 불이 켜져 있었다.
“언젠가는 네가 나를 찾아오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회한에 젖은 목소리는 노쇠한 자의 것이다. 깊게 서재의 의자에 앉아 먼 창밖을 보면서 주 회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제 아이 살리겠다고 젊은 아이 하나를 그렇게 완전히 사람 구실도 못 하게 해 놓았으니 자신의 끝이 좋지 못할 건 뻔했다.
“제가 올 줄 아셨어요?”
“생각보다 늦어서 이상하긴 했지.”
가늠할 수 없는 눈이 창에서 시선을 떼고 은하를 바라봤다. 젊은 시절의 제 딸, 하영을 그대로 닮은 착하고 어여쁜 손주였다.
자식을 먼저 보내 놓고 무슨 낯으로 산단 말인가. 그런데 손주들이 그를 버티게 만들었다.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왜….”
“은하야.”
주 회장이 은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그게 꼭 마치 저를 전부 아는 것 같아서 은하가 멈칫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소파에 앉을 생각도 못 한 채 주 회장과 거리를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외할아버지, 나….”
은하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자꾸 이상한 꿈을 꾼다고. 그 꿈에서 서우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무서워요.”
뒷말을 힘겹게 꺼내 놨다. 배 속에서 아이가 요동쳤다. 숨을 급하게 들이쉬며 은하가 허리를 잠시 지탱했다.
놀란 주 회장이 다가오려 하자 됐다고 손을 내젓는다. 지금 듣지 않으면 다음이란 없다. 다시는 이런 용기를 내지 못하리라.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멀쩡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그걸 견뎌 내는 스스로를 보면서 은하가 두려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내 다리, 다리… 서우 언니가… 언니가….”
의사들은 그 거대한 나무들이 쏟아졌는데 이만하길 천운이었다고 했다.
은하야, 괜찮아. 괜찮아. 언니 여기 있어. 괜찮아.
희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윤서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그렇게 말했던 사람이라, 그냥 너무 아프고 죽을 거 같아서 그런 목소리가 위로처럼 환청으로 귓가에 들렸다고 생각했다.
“서우가… 그 아이가 너를 구했다, 은하야.”
숨을 홉 들이켰다. 한 손으로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은하가 그대로 옆에 있는 소파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주 회장을 바라봤다. 덤덤한 얼굴로 그가 은하를 마주한다.
“어떻게 저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해 주실 수가 있어요.”
자신의 다리를 제 손으로 감싸고 버텨야 했을 윤서우를 떠올렸다.
가슴 어딘가가 부풀어 올라 잘게 찢어지는 끔찍한 느낌에 짐승 같은 소리가 울음처럼 터져 나왔다. 그 망가진 손으로 제 다리를 주무르며 괜찮냐고 묻던 그 다정한 눈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위선이라고 명명했던, 그 눈은 위선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내가 어찌해야 했을까.”
“말해 주셨어야죠! 적어도 저한테는!”
은하가 소리쳤다. 커다랗게 뜨인 동공이 엉망으로 흔들린 채다. 은하의 말에 주 회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투과할 수조차 없이 깊고 검은 눈동자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너는 그럼 살아 있었을까.”
소리 지르던 어깨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
“흐읍.”
은하가 숨을 들이마셨다. 꼭 뭔가를 아는 그 얼굴을 피했다. 마주 볼 수 없었다. 저 눈이 자신의 속내를 가장 깊숙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아서다.
“은하야.”
“외, 외할아버지가 말을 안 해 주셔서 내가 서우 언니를….”
“강은하!”
큰 소리로 주 회장이 은하를 불렀다. 그럼에도 그를 보지 않는다.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작은 몸을 덜덜 떤다.
이러다 아이가 잘못되든, 은하가 잘못되든 할 것 같아 주 회장이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았다.
“나는… 아니야. 내가 그런 게….”
주 회장의 눈이 침잠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비통 어린 탄식을 내뱉는다. 그 소리를 들은 은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 회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그 이유를 눈치챘다. 내리누르고 입을 다물어 버린 제 죄를 그가 알고 있구나.
전부 다.
“그게 왜 네 잘못이겠니. 그건 사고였다, 은하야.”
엄마는 왜 서우 언니만 싫어해? 이렇게 비 오는데 언니가 거기서 어떻게 와.
우리가 데리러 가자. 응? 아이, 이참에 언니랑 좀 풀라구. 언니 대학 가면 나가서 산다는데 엄마가 하도 모질게 대해서 다시는 엄마 안 보면 어떻게 해? 엄마도 그런 거 싫잖아. 언니 데리러 가자, 응?
몰라. 나 혼자라도 데리러 갈 거야. 거기 택시도 안 잡힌다는데 내가 택시 잡아서 가지, 뭐.
진짜? 엄마도 역시 서우 언니가 걱정되지? 그래, 같이 가. 돌아오는 길에 태윤 오빠 빼고 우리 여자들 셋이서 맛있는 것도 먹자.
…엄마에게 윤서우를 데리러 가자고 졸랐던 건 저였다.
겨울비가 무심하게 쏟아지던 날, 납골당에 택시가 다니지 않아 늦어진다던 윤서우의 전화를 받고 내도록 엄마를 졸랐다.
그때 은하는 느끼고 있었다. 태윤의 유학이 결정되고 서우가 대학을 핑계로 나가 살면서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막연하게 느꼈다.
언니도 함께 오빠랑 유학 보내라는 제 말에 운전을 하던 엄마가 크게 화를 냈고 서로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비가 많이 내리던 차선을 침범하는 걸 느끼지 못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고요?”
은하가 허탈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