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_
어디야?
퇴근 시간 즈음이 다 돼서 태윤에게 전화가 온 걸 받았다.
“나 영화 보러 왔어.”
누구랑?
“혼자.”
뭐 보는데?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랑 이야기.”
제목부터 저러니까 저게 제일 슬프겠지 하고 영화관에 서서 서우가 포스터를 읽었다. 휴대폰 건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도 말해 놓고 뭔가 민망해서 따라 웃자 태윤이 말했다.
어느 영화관인지 말해 줘. 곧 갈게. 같이 봐.
“영화 지금 시작해. 주소 찍어 줄 테니까 와서 기다리려면 기다리고.”
완전한 거절은 아니었다. 먼저 보고 있을 테니 천천히 퇴근하고 오라며 서우가 전화를 끊고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눈이 너무 퉁퉁 부어서 반드시 오늘 느낌에 강태윤을 만날 것 같아 부랴부랴 영화관에 왔다.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 타임을 선택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산했다. 자신과 저 앞에 앉은 한 명 빼고 사람이 없어서 어쩐지 잘못 골랐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슬프기만 바랄 뿐이다.
눈가는 퉁퉁 부어 만지기만 해도 따끔거렸다.
영화 오프닝이 시작되고, 곧 사람이 없는 이유를 서우는 알게 됐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랑 이야기는 반어법 표현이었나 보다. 슬픈 이야기보다 억지 개그를 유발하는 통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부디 강태윤이 할 일 없어서 이 영화 리뷰를 찾아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턱을 괴고 멍하게 스크린에 시선을 주고 있을 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옆자리에 앉는 기색이 들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텅 빈 영화관에서 누가 제 옆에 앉는단 말인가.
그런데 사람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익숙한 향수 냄새를 맡았다.
“저런 걸 보고 있었어?”
그가 속삭인다.
앞좌석과 거리가 꽤 멀었는데 목소리를 원래 그의 톤에서도 한참 낮춰서 어쩐지 더 위험하게 들렸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어?”
“뻔하지. 저런 거 볼 사람 너밖에 없어서 표 남을 줄 알았어.”
머쓱하게 서우가 손가락을 세워 볼을 긁었다. 태윤이 잠시 10분 정도 영화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나가자.”
“아직 남았는데.”
“내가 더 재미있게 해 줄게.”
그도 이게 10분 만에 말도 안 되는 개그 영화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서우가 결국 태윤을 따라 조용히 영화관에 나왔다. 나오면서 보자 이미 한 명 있었던 사람은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안쪽보다 확실히 밝은 바깥으로 나가자 절로 고개가 땅을 향했다.
태윤의 손이 서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이 반쯤 감길 정도로 부어 있는 걸 보면서 그가 혀를 찼다.
“윤서우.”
“지하철을 탔는데 누가 엄청 큰 꽃다발을 들고 탔지 뭐야.”
그 어설픈 거짓말을 그가 서늘하게 바라본다. 꽃가루 알러지로 부은 눈과 그냥 운 눈이 어떻게 틀린지 사실 잘 알지 못했다.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눈 양쪽 끝이 붉게 짓물러 있다.
“필요 없는 알레르기약 쓸데없이 먹이기 전에 제대로 말해. 알레르기 맞아?”
“응, 맞아.”
눈을 똑바로 보고 서우가 말하자 태윤이 한쪽 입꼬리만 냉랭하게 올렸다.
“속아 줄까, 말까.”
“…속아 줘.”
“하. 이걸 진짜.”
재빨리 속아 달라고 말하는 그 빠름에 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속아 달라고 냉큼 대답하는 윤서우 때문에 마음이 저릿해서다. 태윤이 잠시 서우를 대기 의자에 앉혀 두고 음료수와 팝콘을 파는 매점 앞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직원에게 이야기를 하고 결제한 뒤 얼음만 담긴 음료 컵 하나를 들고 온다. 그리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안에 얼음을 몇 개 넣고 주머니를 만들었다.
요즘 시대에 손수건이라니.
잘 배우고 예쁘게 자란 도련님 같아서 서우가 슬쩍 웃었을 때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가 얼음주머니를 서우의 눈가에 댔다.
“아!”
“아플 거야. 얼마나 눈을 비비고 울었어?”
“사실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울었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재미는 더럽게 없었으니까.”
태윤이 서우의 말에 긍정했다. 진짜 속아 줄 모양인지 더 이상 묻지 않는 그를 다행이라고 여기며 시원하게 열을 식혀 주는 주머니에 얼굴을 맡겼다.
이리저리 서우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가 많이 차가워지기 전에 떼어 준다.
“응….”
“골라도 꼭 그런 걸 골랐어.”
태윤의 말이 맞았다. 제일 슬프다길래 제일 슬플 줄 알았던 게 오산이었다. 슈트 차림의 덩치가 큰 그가 제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다정하게 눈가를 봐 주고 있자 자꾸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의 뒤를 지나가며 힐끔대는 눈들이 부끄러워서 그만 나가자고 태윤의 손을 잡았다.
“밥은?”
“먹었어.”
두 그릇이나 먹었다. 먹지 않을 수 없어서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오래 있고 싶어 하는 노부인의 마음이 느껴져서 최대한 많이 먹어서 여전히 배가 불렀다.
“점심 같이할까 하고 갔는데 없더라고.”
“어제 쉰다고 했는데 그냥 두지, 점심에 뭐 하러 와. 연락을 하고 오든가.”
“쉰다고 하길래 누워 있을 줄 알았거든.”
뭔가 해 줄까 싶어 그릇까지 사 들고 서우의 집으로 갔다가 고스란히 그녀의 집 앞에 놓고 왔다. 집에 가면 깜짝 놀랄 거라는 태윤이 벌써부터 무서웠다.
“그럼 점심부터 굶은 거야?”
“응. 밥 먹었으면 나 밥 먹는 것 좀 봐 줘.”
서우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겠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저녁 시간인데 아직까지 밥을 안 먹었다니 괜히 신경 쓰여서 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손이 서우의 옆 머리칼을 스친다. 볼에 붙어 있던 머리칼이 얌전히 귀 뒤로 넘어갔다.
“진작 굶고 다닐 걸 그랬네.”
이렇게 네가 신경 쓸 줄 알았으면.
태윤의 말이 반은 농담처럼 구분되지 않게 서우의 양심을 찔렀다.
***
주 회장과 약속을 잡고 밤늦게 은하가 본가에 도착했다.
결혼한 뒤로 이곳에 제대로 온 적은 손에 꼽았다. 주말 내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이까지 시터에게 맡길 정도로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윤서우의 손이 망가졌다.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않았다. 제 다리를 주물러 달라 뻗으면서도 괜히 싫어서 그쪽으론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싫어서인지, 그저 아무 말 없이 제 다리를 아프냐고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가 가증스럽게 들려선지 모르겠다.
“네가 별일이구나. 그렇게 한번 들렀다 가래도 오지 않아 놓고선.”
채희옥이 오랜만에 보는 은하에게 말을 던졌다. 갑자기 늦은 시각, 찾아오겠다고 하고선 곧장 왔다. 주 회장이 출타 중,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라 해 희옥이 잠들지 않고 은하를 맞은 참이었다.
오늘은 어떤 날도 아닌데 여기에 있는 게 새삼스러웠다.
제 엄마 제사에나 겨우 싫은 내색을 하고선 참석하던 아이가 아닌가.
“외숙모, 안녕하세요.”
“나야 안녕하지.”
어쩐지 저 남매를 보면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욕심 많은 제 어미 밑에서 자라다 죽고 난 뒤엔 하나는 재빨리 시집을 가 버리고 하나는 회사를 물려받겠다고 미국으로 갔다.
분명 제 아들인 지형이 물려받아야 할 회산데 엉뚱한 사촌들에게 넘어가게 생겼다. 그럼에도 속상하기만 할 뿐, 그렇다고 시누이의 자식들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살아생전 주하영과 매번 싸웠던 희옥이라 미운 정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인사를 한 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부른 배에 손을 얹고 있는 은하를 바라봤다. 첫째를 낳을 때도 낳고 난 뒤 알렸지, 분만실에 들어가서는 그들을 부르지 않았던 아이였다. 친정엄마가 없어서 저를 부르기도 껄끄러웠으리라.
바깥양반이 그리 정이 많은 양반도 아니었으니 삼촌인 그를 부르기도 어려웠을 테고, 외조부 내외는 더 어려워한 아이니 고민하다 아이를 낳고야 연락했을 게 훤히 보였다.
“언제가 예정일이니?”
“11월 5일이요.”
“얼마 안 남았구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네.”
단답으로 은하가 답했다. 불편한 기색이 뻔히 보였다. 별로 어려운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저렇게 벽을 세우는 아이에게 더 이상 무어라 한단 말인가.
희옥이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곧 오신다니까 뵙고 가렴.”
“…저….”
일어나려는 희옥을 은하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희옥이 멈칫하더니 자신을 먼저 부른 은하를 멋쩍게 바라본다.
“그래. 뭐 할 말 있니?”
입술이 달싹였다. 뭔가 중요한 말 같아 그녀가 다시 앉아 기다렸다.
“혹시… 저 사고 났을 때 기억나세요?”
“아….”
그 사고는 의도적으로 이 집안에서 금기가 됐다.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않은 말을 별안간 자신에게 묻는 은하로 인해 희옥이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