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55)화 (5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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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아!”

베개를 집어 던지고, 테이블에 있는 화병까지 집어 던져 온통 유리 조각투성이였다. 그걸 고용인들이 급하게 사모님이 다칠까 봐 치우고 있었으나 완전하지 않았다.

서우가 맨발의 그녀에게 달려갔다. 슬리퍼에 유리가 박힌다. 작고 깡마른 그녀를 어떤 힘이 있어선지 몰라도 번쩍 들어 올렸다. 이대로 크게 다칠까 놀라서다. 마른 손이 자신을 꽉 끌어안았다.

“나쁜 것들. 내 딸이 이렇게 왔는데! 이렇게 엄마 보러 왔는데 거짓말만 하고!”

목이 쉬어라 소리를 친다. 마른 손가락이 제 뒤에 있는 고용인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서우가 엉금엉금 그녀를 안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가 앉혔다. 삿대질을 하던 손이 어느새 서우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말한다.

“왜 이렇게 말랐어. 응?”

항상 고아하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수줍게 웃으시면서 우리 딸 밑에서 고생한다고 하시면서 맛있는 과자를 보내거나 향이 좋은 차를 내어 주던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주 회장이 한 달에 한 번, 그녀를 위한 음악을 부탁했을 때 수락했다.

“연주는 다 끝내고 온 거야?”

“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일찍 왔어요.”

“이거 봐. 오늘 우리 딸 온다고 했다니까. 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잖아.”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는 걸 서우가 닦아 줬다. 힘이 빠져 바들거리는 손을 노부인이 꽉 붙잡는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났는지 뿌리칠 수 없는 힘이었다.

“유리가 깨졌는데 그렇게 다니시면 어떻게 해요. 다치시면 저 마음 아파요.”

“으응…. 미안해.”

그렇게 고용인들에게 화를 내고 하영을 데려오라고 소리쳤던 노부인이 금세 미안하다고 말한다. 서우가 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남은 유리 잔해를 치우고 자리를 비웠다. 황 집사가 마실 것을 가져온다고 해서 그녀까지 나가자 온전히 방 안에 서우와 노부인, 둘만 남았다.

“엄마가 오늘 우리 딸 꿈을 꿨지 뭐야.”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게 전부 제 잘못 같았다. 딸을 잃은 충격으로 온 치매였다. 서우가 목울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똑같네요. 나도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그랬다고 하자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서우의 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활짝 웃는 얼굴에서 예전의 그 예쁘고 고아한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우리 딸,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상했어.”

그새 자신의 얼굴이 상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렇게 물어보는 게 꼭 오랜만의 자식을 보면 보이는 엄마의 마음 그대로 같아서 서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잘 먹고 다니는데.”

“엄마 밥. 엄마 밥 안 먹어서 그렇구나. 응?”

매번 자신이 오지 않을 때면 이러셨던 걸까. 마음이 조여들었다. 서우가 러그 위에 주저앉아서 노부인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져 주면서 그녀가 기분 좋게 웃는다.

“나이를 먹어도 애라니까.”

항상 화가 나 있고 예민하던 선생님도 노부인 앞에선 어린아이처럼 굴 때가 있었다.

가끔, 그래서 서우는 자신의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선생님이 태윤과 은하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아서 노부인을 보고야 부모님을 떠올렸다.

“엄마, 오늘 나랑 둘이 놀까요?”

“엄마야 너무 좋지.”

꽃보다 더 예쁘게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서 가슴 어딘가가 떨어져 나간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자주 와 볼걸. 사람들이 뻔뻔하다고 손가락질해도 그게 대수라고.

“아가씨.”

황 집사가 트레이에 차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한 번 노부인이 쓸어버렸던 테이블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올려놓는다.

노부인의 차는 항상 적당히 식어 있었다. 뜨거운 물에 데인 적이 있어서다.

“우리 딸, 배고프댔는데.”

“그럼 식사를 준비할까요?”

“내가 할게. 황 집사, 나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

“어머나, 우리 사모님. 제가 황 집사인 건 알아보시겠어요?”

“별 실없는 소릴.”

노부인이 이상한 소릴 한다는 얼굴로 황 집사를 바라봤다.

서우가 오자 눈에 띄게 좋아져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진정제를 맞고 하루 종일 누워서 주무셨을 게 분명했다.

“아가씨, 잠시만요.”

“하영아, 이리 와. 엄마랑 같이 옷 골라 줘야지.”

“네.”

서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근처에 벗겨져 있는 슬리퍼를 가져와 바닥에 대주자 노부인이 그걸 신고 일어났다. 매번 휠체어 신세를 지던 그녀의 걸음이 오늘따라 힘 있었다.

생전에 그녀가 좋아했던 색을 안다. 우아한 연보라색 원피스를 골라 드리자 소녀처럼 웃는다.

“우리 딸이 엄마 취향을 잘 알지, 그럼.”

머리는 황 집사가 예쁘게 다듬어 드렸다. 평소에는 손도 못 대게 하시는데 오늘은 그래도 좀 자를 수 있었다며 서우에게 고마움을 말한다.

둘이서 손을 꼭 잡고 태윤의 집에 있는 것처럼 오로지 하프 하나만 있는 거실로 갔다.

“놀고 있어. 여기서 이거 가지고 놀고 있어, 응?”

하프 옆에 서우를 앉혀 두고 그걸 가지고 놀고 있으라고 어린아이 다루듯 이야기하셨다.

“엄마는요?”

“엄마는 우리 딸 밥 해 올게. 외국에서 엄마 밥 먹고 싶었지?”

서우가 입술을 말았다. 이내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밥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게 좋은지 노부인이 설레는 얼굴로 황 집사를 재촉했다.

“황 집사, 오늘 도미 싱싱한 거 들어왔나?”

“사모님이 직접 하시려고요?”

“우리 하영이가 배가 고프다는데 내가 직접 해야지. 얼마나 내 밥이 먹고 싶었겠어.”

황 집사와 함께 거실을 나서자마자 하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선생님의 손때가 묻은 곳에서 울음을 참았다. 이전과 같이 그저 원하는 곡을 연주해 드리고, 인사를 한 뒤 나오면 될 거라 여겼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조 섞인 목소리가 음울하게 나왔다. 서우의 손이 하프의 현을 매만졌다.

“하영아.”

“네.”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나갔던 노부인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서우가 하프에서 고개를 들자 문가에 기댄 그녀가 인자하게 묻는다.

“그런데 그 애는 안 왔니?”

“누구요?”

“은하랑 항상 다니던 애 말이야.”

치매에 걸린 뒤 손주들도 찾지 않던 분의 입에서 은하의 이야기가 나온다. 항상 같이 다니던 애는 혹시 저일까.

“아….”

“네가 데리고 왔었잖니. 너 닮은 애.”

욕심이 어찌나 많은지 밤새 하프 소리가 끊이지 않아 불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땐 노부인이 정원 밖에서 가끔 그 연주 소리를 들었노라 했다.

어떻게든 하나만 파고 욕심 있는 게 꼭 제 딸과 닮았다고 웃는다.

“못… 못, 왔어요. 엄마, 걔 나쁜 애예요.”

“그럴 리가. 우리 손주들이 얼마나 좋아하던데. 꼭 내 사위처럼 다정하던걸.”

자신에 대한 기억이 당연히 좋지 않을 거라 단언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노부인의 입에서 나온 저는 밥 한 끼 해 먹이고 싶은, 딸인 하영을 닮은 아이였다.

“내가 꼭 딸이 둘이나 생긴 기분이었지 뭐니.”

너도 밤새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하프를 놓지 않아서 얼마나 고생이었는 줄 아느냐고 타박이 돌아온다.

자신은 그녀에게 그저 굴러들어 온 돌이 아니라 어린 날의 딸의 기억이었구나.

서우가 깨달았다. 그래서 저를 하영이라 부르며 노부인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을 보고 걸어온 그녀가 부드럽게 주름진 손으로 서우의 볼을 닦아 준다.

“뭐가 또 우리 딸 마음을 속상하게 했을까.”

“엄마…. 저 이제 못 와요.”

“왜…?”

“저 멀리 가요. 멀리 가서 이제 못 와요. 한 달이 지나도 못 올 거예요.”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노부인이 고개를 젓는다.

“우리 딸, 가지 마. 가지 마. 엄마 너 보내기 싫어.”

서우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눈물을 그냥 뒀다. 자신에게 애원하는 그녀를 가만히 안고 토닥이면서 서로가 진정하길 기다린다.

“미안해요. 더 이상 안 되겠어요.”

“꼭 가야 하니? 우리 딸이 또 크게 되려고 그러는 거니?”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서우의 얼굴을 만지고, 또 만져 본다. 희미해지는 그녀의 기억에 억지로라도 끼워 맞추고 넣어 놓고 떠올리려는 몸짓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우가 따뜻한 그 손에서 엉엉 울었다.

“우리 어린 하영이.”

어쩌면 알고 계신 게 아닐까. 자신이 선생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도 모른다.

서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하다고 계속해서 되새김질하자 노부인이 쓸쓸하게 말했다.

“밥은 먹고 가. 딸, 멀리 가는데 엄마가 밥했어. 응?”

따스한 밥을 먹고 가야 멀리 가는 속이 든든하지.

서우는 그날 처음으로 엄마의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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