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54)화 (5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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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러고 보니 뭐가 내가 처음이야. 너 발레 하는 여자 좋아하잖아. 은하 말대로.”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서우도 거기에 고개를 동의했던 게 한동안 강태윤이 은하를 데리러 다녔다.

모든 발레 공연을 따라다녀서 발레 하는 애들 중에 강태윤의 여자 친구가 있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은하의 1년 선배, 저희들과 동갑인 여자애가 태윤과 사귄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동안 은하도 그렇게 생각해 서우에게 호들갑을 떨었었다.

“응. 그때 너 은하 선배랑 사귄다고….”

“수연이?”

이름까지 기억하는 그에게 어쩐지 실망감이 들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서우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걘 주지형 여자 친구였지.”

“어…?”

“왜. 주지형이 네가 첫사랑이라 다른 애 안 사귈 줄 알았어?”

어쩐지 지형의 이야기를 하는 태윤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첫사랑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로 인해 서우가 당황했다.

“아니. 아니야.”

“주지형이 숙모님께 들키면 안 된다고 양수연이랑 만나는 게 나라고 생각하게 해 달랬어.”

둘은 생긴 것도 비슷했으니까.

“왜?”

그런데 비슷하다 해도 태윤이 그런 제안을 승낙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태윤은 어느새 제 허벅지에서 반쯤 일어나 빤히 궁금한 눈으로 보는 서우에게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때 걘 피아노로 완전히 나갈지, 미국으로 기업 승계를 위해 유학을 갈지 숙모님과 냉전 중이었으니까. 여자 친구 이야기까지 겹치면 연애질이나 한다고 바로 한국 쫓겨날까 봐.”

태윤과 지형이 이 정도로 사이가 좋았나, 서우는 그래도 내심 서운했다. 그때는 정말 강태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은하도 제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했고. 소문은 금방 가라앉았지만, 은하가 미라를 태윤에게 소개시킬 때 했던 말을 듣자 그때 일이 서우 또한 생각났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나는 어머니 때문이었으니까.”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뜻이 맞았을 뿐이다. 태윤이 윤서우를 좋아하는 게 맞을 거란 확신을 어머니가 갖고 있었다.

“선생님?”

“너 좋아하는 거 안 들키려고.”

좋아한다는 말을 저렇게 담담하고 빠르게 뱉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서우의 머리를 다시 제 허벅지에 누이며 태윤이 그걸로 오해했을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몇 번 만나는 척만 했을 뿐이다.

“그러기엔 아직도 이름 기억하잖아.”

“윤서우, 질투해?”

“그런가 봐.”

“걔가 잊을 만하면 연락 오거든. 주지형이 연락 안 받는다고 연락처 알려 달라고.”

“네 연락처를 알아?”

“메일로 와.”

헤어진 게 언젠데 아직까지 종종 주지형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와서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태윤은 그럴 때마다 가감 없이 지형의 연락처를 알려 줬고, 지형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소리치면서 매번 연락처를 바꿨다.

“아…. 난 또….”

이제 오해가 풀렸냐며 그가 서우의 머리를 다시 쓸어 준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뒷목이 뻐근하도록 올라온 그의 허벅지 사이의 열기에 더워서 서우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궁금했으면 물어보지.”

“그때는 안 친했잖아. 내가 어떻게 물어봐.”

윤서우도 속았는데 제 어머니는 속지 않았다. 태윤이 그저 조용히 서우의 이마를 쓸어 줬다.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걸.”

“아….”

“내내 후회했어.”

긴 시간, 그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고백할 걸 그랬다.

나는 내가 너를 어떻게 할까 봐 감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고. 내 어머니가 너를 어떻게 할까 봐 마음을 죽이고 있었다고.

“지금 이렇게 그래도 얼굴 보고 있잖아.”

서우의 목소리가 어쩐지 떨렸다.

태윤이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을 가린다. 나붓하게 접혀서 내내 웃고 있던 눈가가 싸늘하게 굳었다. 입가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시선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채다.

“그래. 그러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마.”

코 아래로 입술만 보인다. 잠시 헛숨을 들이 삼킨 서우가 대답을 찰나간 망설인다.

“태윤아, 나 일주일만 쉴까? 그때 회사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네 마음대로 해.”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을 돌린 서우가 일주일만 회사를 쉬겠다고 말한다. 재미있었다. 서로의 눈을 가린 채 하는 대화는.

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꿀처럼 다정했다. 서우에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그의 눈에는 얼음 조각이 맺혀 있다.

“응. 좀 피곤해서 그러고 싶어.”

“근교로 여행이라도 갈까?”

“그것도 괜찮고.”

서우가 숨을 내쉬었다. 정리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아서다.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너 하고 싶을 때 하프 켜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뭐든 함께해.”

“그건 생각해 볼게.”

“보수적이네, 윤서우.”

태윤의 장난스러운 말에 서우가 웃었다. 손을 떼면 눈꺼풀을 깜박이는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지, 비스듬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덮어 둔다. 어느 쪽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윤서우는 어차피 제 곁에 남을 테니까.


 

***


 

늦게까지 자고 일어난 서우가 정오에 가까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하는 날에 이렇게 오래 자 본 건 처음이었다. 태윤을 믿고 그냥 회사를 가지 않았다. 반듯했던 제 인생에 유일한 일탈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강태윤을 등에 업고 말이다.

어차피 자신이 하는 일은 비서 업무 보조였다. 인수인계가 필요 없는 일이었다.

비서실에 다니면서 느낀 건, 없는 자리를 만들어 줬다는 사실이다. 제 옷과 신발을 사 모으던 강태윤이라면 그럴 만했다. 다시 없을 딱딱한 얼굴을 하곤, 잘 버티면 정직원으로 전환시켜 준다고 말한 그의 속내는 어땠을까.

“꼭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자신이 결국엔 그를 향해 다시 마음을 열게 될거라고 어떻게 강태윤은 확신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는데.

회사를 나갈 때나 다름없는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입술에 생기라곤 없는 것 같아 오래된 립스틱을 찾아 발랐다. 어디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사람답게 보였다.

단화를 꺼내 신고 정리된 집을 나왔다.

집주인에게 집을 내놓겠다고 문자를 먼저 넣어 놓고, 서우가 익숙한 성북동으로 향했다.

날짜가 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이 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옷이 구겨질까 봐 괜히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걸어오는 길이 꽤 길어서 오늘은 땀에 젖은 얼굴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항상 그랬듯이 잠시 망설이다 벨을 눌렀다.

- 무슨 일이시죠?

“저, 윤서우예요.”

- 어머나, 오늘 오시는 날 아니잖아요.

“잠깐 사모님을 뵐 수 있을까요?”

-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으셔서….

황 집사가 말을 흐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는 노부인을 떠올렸다.

“괜찮아요. 잠깐 얼굴 뵙고 싶어서 그래요.”

- 잠시만요.

잠시 뒤 대문이 열렸다. 본채 쪽에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서우가 곧장 별채로 가는 오솔길에 발을 디뎠다.

곤란한 얼굴의 황 집사가 현관에 먼저 나와 있었다. 서우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오늘 무슨 날인지 모르겠네요.”

“네?”

“아침부터 아가씨를 찾으셨거든요. 자주 이러시진 않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서우 아가씨가 오지 뭐예요? 꼭 오시는 걸 아시기라도 한 것 같잖아요.”

황 집사가 곤란함과 반가운 얼굴을 동시에 했다. 평소에는 조용히 넋이 나간 채 가만히 계셨는데 한 번씩 화를 내고 힘을 쓸 때마다 다들 진을 뺐다.

지금도 안에서 두 명이 사모님이 다치지 않게 조심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더 안 되겠으면 최 박사를 불러 진정제를 놔야 했는데 아무래도 노쇠한 분이라 최대한 그들이 먼저 진정시키는 게 목표였다.

“제가 봬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가요, 아가씨.”

서우가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쾅!

이거 놓지 못해!!!

샌 목소리로 절규 같은 음성이었다.

사모님, 이러지 마세요. 아가씨는 지금 프랑스에 계신다니까요.

우리 하영이 데려와. 하영이!

사모님! 그러다 넘어지세요.

서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황 집사를 앞질러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리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다 숨이 막힌다. 생전에 선생님이 썼던 방이었다. 캐노피가 높게 달려 있는 침대와 드레스룸,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러그까지 전부 선생님이 살아 있을 적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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