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_
또다시 손가락이 입술을 건드린다. 처음보다 좀 더 노골적인 손길이었다. 태윤의 시선이 음험했다.
자신이 치던 피아노는 당연히 섬세할 수밖에 없다. 윤서우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손가락의 움직임을 좇으니까 좀 더 느리고 공들여서 한 곡을 완성시키게 된다.
“그걸 느낄 때마다 아래가 터질 것 같았거든.”
그의 첫 몽정에서도 피아노가 나왔다. 윤서우가 옆에서 예쁘게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고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아래가 잔뜩 젖어 있었다.
그때 강태윤은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이 욕망하는 게 뭔지.
어느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서우의 몸도 그에 맞춰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쉬운 얼굴로 살짝 닿았던 입술에서 손을 뗀 태윤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너는?”
그렇게 태윤이 다시 물을 때조차 서우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그의 말대로 그의 손가락을 바라봤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수치심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던 혼자만의 비밀이 낱낱이 상대에게 까발려진 수치심과 같았다.
“내려 줘. 나, 제발….”
“내가 피아노를 칠 때 어땠어?”
땀이 훅 난다. 열린 창틈을 타고 들어온 소음들에 집중하려 해도 도무지 지금 이 말을 하는 태윤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어.”
서우의 말에 태윤이 짧게 웃었다. 손가락이 재미있다는 듯 툭툭 핸들 위를 친다.
“거짓말. 젖었으면서.”
느른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태윤이 말했다.
보지 않아도 그쯤은 안다. 음악이란 대개 그랬다.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누가 더 얼마나 잘 아름답게 포장해서 분출해 내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뿐이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서우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있지. 말했잖아. 결혼 전제로 만나 보자고.”
그러려면 서로의 욕망과 원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가 다정한 낯으로 말했다.
뒤늦게야 서우는 이상하고 어딘가 미친 강태윤의 결혼 전제를 운운했던 그 말이 자신을 놀리려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진심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너… 미쳤구나.”
사는 세상이 다르고 서로가 딛고 있는 발판이 다르다.
그의 말은 서우의 세상이 아닌, 강태윤의 세상이 뒤집힐 말이었다.
“이제 알았다니 유감이네.”
태윤의 눈가가 나붓하게 접혔다. 기가 차서 입을 다물었다. 열이 주체할 수 없이 오른다.
붉어진 얼굴의 서우를 힐끗 보면서 어느 정도 꽃가루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태윤이 차창을 올렸다. 다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다.
바깥의 소음마저 들리지 않는 공간이 어쩐지 서우는 더 숨이 막혔다.
차가 향한 곳은 혹시 강태윤이 자신의 집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집과 가까운 곳이었다.
저도 모르게 다세대 주택으로 가득 찬 동네를 지나치자 안도의 숨이 입안을 맴돌았다.
차가 멈춘 곳은 부암동에 있는 주택 단지였다.
얼마 전, 완공돼 사계절이 뚜렷한 북한산 뷰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한강 변의 신축 아파트 못지않게 비싼 분양가를 자랑해 기사에도 여러 번 올랐었던 걸 서우가 기억해 냈다.
동네가 비슷하다고 해도 빈부 격차는 하늘과 땅 수준이라 그냥 기억 속에 항상 공사를 하던 곳이 완공됐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이제 막 입주를 시작해 빈 세대가 많았다.
단지는 한남동에 있는 은하의 집과 비슷해 보였다. 단지를 지키는 가드들과 이미 차에 부착된 출입 카드로 들어갈 수 있는 보안 등이 그랬다.
단지를 감싼 북한산의 푸릇한 여름 모습이 서우의 눈에 들어왔다.
일렬로 지어진 단지의 가장 끝, 걸리는 것 없이 북한산의 전망이 다른 집들을 거치지 않고 한눈에 전부 보이는 집의 차고에 결국 차가 섰다.
“내려.”
그 말만 남기고 강태윤이 먼저 주차장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문에 가서 섰다.
아직 차 안에 앉아 있는 서우를 지그시 고개를 돌려 응시했다. 천천히 차 문을 열고 나오자 그제야 그가 지문을 인식하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 채 따라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그저 보이는 강태윤의 너른 등을 멍하니 지켜보며 발을 놀렸다.
“…아.”
별안간 그가 선 바람에 아무 생각 없던 서우의 얼굴이 단단한 등과 부딪쳤다.
서둘러 두어 발자국 물러나자 태윤이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너머로 보이는 곳은 생활감이라곤 없는 넓은 거실이었다.
아무것도 놓인 게 없는 빈집.
거대한 창으로 북한산이 보이고, 거의 저물어 가는 노을이 흰 대리석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여기가 어디야?”
서우가 물었다.
그럴 리 없는데 가슴이 조금 울렁거렸다. 꼭 어릴 때 자신이 지냈던 마을의 정경 같아서다. 그때도 태윤의 별장에서 커다란 유리창으로 바깥을 보면 이렇게 산이 보였다.
어느새 어린 두 사람은 없고, 훌쩍 큰 어른이 된 채 그곳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묵직한 음성이 어디냐고 묻는 서우에게 되돌아 왔다.
강태윤은 자신과 뭘 하고 싶은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곳에서 그저 노을이 지고, 저물어 가는 어둠을 틈타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별채에서 지내는 걸로 아는데 독립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 말 없으면 갈게. 이렇게 자꾸… 그러지 마.”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이런 돌발 행동 말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만큼 강태윤과 자신은 공통점이 더는 없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하던 음악 이야기도 그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자신이 하프를 그만둔 뒤엔 할 수 없었다.
어떤 공통점도 이제는 없다.
고개를 떨구며 피곤한 얼굴을 한 서우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피곤했다. 내내 은하의 집에서 긴장을 한 채였다는 걸 공교롭게 지금 이 순간 깨닫고 만다. 언제부터 이렇게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지 굳이 세지 않았다. 가장 편하고 가족 같았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는데.
은하와도, 그리고 강태윤과도.
어느새 완연한 어둠이 내려왔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서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소리 없는 웃음을 지은 태윤이 느른하게 물었다.
“그렇게 미리 겁을 먹으면 꼭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잖아.”
“…강태윤.”
속삭이듯 제 이름을 부르는 서우의 곁으로 태윤이 물러난 만큼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굳은 채 얼어붙은 그녀의 곁을 스친 손이 뒤에 있던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다. 갑자기 환해진 거실이 적응되지 않았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태윤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어떤 짓을 할 수도 있을 거란 마음이 불쑥 들었었기 때문이다.
고작 불을 켜려고 그랬던 건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스위치에서 손을 뗀 강태윤은 여전히 몸을 물리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서우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마치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듯 집요했다.
남자치고 유독 붉은 입술이 뜸을 들이다 이내 열렸다.
“이제 나 안 좋아해?”
얼굴이 붉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그 해묵은 마음이 들춰 내기만 해도 아파서 오히려 서우는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걸 보는 태윤의 눈가가 차갑게 굳었다.
“철없을 때 동경했지. 그게 언젠데. 나는….”
“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는다.
왜.
새삼 깨닫고 만다. 자신이 좋아했던 걸 강태윤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구나. 그런 사실을 알자 온통 심장을 토해 내고 싶었던 지난날들이 지나갔다.
“너 안 좋아한 지 오래됐어.”
“나를 계속 좋아해야지, 서우야.”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런데 강태윤 눈이 어떤 끓는 점을 넘긴 것 같아 보였다. 자신이 대회에서 실수할 때도,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자책하며 혼자서 울 때도 꼭 이런 목소리로 위로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
강태윤과 10년을 붙어 있었는데 그의 진심을 본 적은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태윤이 좋았었다. 어릴 땐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지켜 주는 강태윤이 어쩌면 동화에서나 나오는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서우의 정말 모르겠다는 말투에 태윤이 상냥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부터 알아봐.”
그 작은 머리로 다른 생각하지 말고.
서우가 아까 말했던 은하에 대한 이야기나 박미라에 대한 말을 직설적으로 덧붙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강태윤이 꼭 이 장소를 서우에게 기억이라도 시키듯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데려다준다고 말하고선 등을 돌린다.
혼란스러운 서우만이 그 자리를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