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_
못 들은 척 인사도 마쳐서 그녀가 재빨리 반대 방향으로 가던 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다시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쥔 지압기를 서우가 세게 주물렀다. 솟아 있는 돌기가 손바닥을 깊게 자극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것도 모를 만큼 앞만 보며 발을 재촉했다.
“거기서 이름을 왜 불러.”
우리가 꼭 은하의 염려대로 친한 사이 같잖아.
옷도 돌려주고 싶은데 받을 사람도 아니고 비서실에 가지고 가는 것도 이상했다. 사실 그걸 그가 출근하기 전 본부장실에 뒀다가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몰라 세탁소에 맡긴 옷은 제집에 그대로 있었다.
…강태윤은 그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 최대한 조용히 문제없이 회사에서 버텨 내고 싶었다.
시큐리티 게이트에 거의 도착할 즈음, 위에서부터 내려온 차 한 대가 서우가 걸어가는 반대쪽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내린 남자의 키가 컸다. 어쩐지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뒤로 물러섰다. 서우가 물러선 만큼 2차선의 단지 도로를 건너 그가 성큼 다가왔다.
“거기 가만히 있어.”
주춤대며 서너 걸음 더 물러나자 다가오며 미간을 찡그린 채 강태윤이 말했다.
“왜, 왜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선 안 될 사람을 보는 듯한 서우의 얼굴에 태윤의 시선이 닿았다.
“회사도 아닌데 본부장님에, 말은 왜 높여?”
본부장님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면 완전히 사적인 사이가 될 것 같아서다. 서우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강태윤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리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갑자기 다가와서 막연하게 그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가 지레 놀랐다.
“이 정도 관계가 좋아서요. 본부장님, 우리 선은 지키죠.”
잠깐 사이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서우가 입을 열었다.
아직 손안에 쥐고 있는 지압기가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도 모르고,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도 느끼지 못했다.
“선? 무슨 선?”
그가 짧게 웃음을 터트린다.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없는 서늘함에 가까웠다.
태윤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드럽게 갈라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이질적이다.
휴일이라 평일과 다르게 리넨 재질의 베이지색 블레이저와 바지, 그리고 타이 없는 새하얀 라운드 넥 티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
매번 블랙이나 짙은 네이비색 슈트만 보다 밝은 색상을 입고 있는 강태윤을 보니 더 날것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슈트를 갖췄을 때의 강태윤보다 어쩐지 지금이 더 방종하고 오만해 보였다.
서우가 저절로 시선을 아래 뒀다.
발목이 언뜻 보이는 바짓단 아래 연한 블루 스웨이드 로퍼만 보며 그를 피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강태윤이 트집이라도 잡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말꼬리를 잡는지 모르겠다.
…그냥 가던 길 가지.
동생의 집이니 당연히 올 수 있었던 곳인데 거기서 마주친 건 우연이라고 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결혼할지도 모르는 당사자를 은하의 집 앞에 내려 주고 다시 돌아 제게 돌아온 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너 이러는 거 은하가 싫어해.”
태윤이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거기서 강은하 이름이 왜 나와?”
“미라 씨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라며. 그분 만나. 너 이러는 거….”
“결혼 전제?”
그가 픽 웃는다. 아주 재미있는 소릴 들었다는 듯이.
“제발… 나 곤란하게 하지 마.”
“내가 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얼떨결에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결혼전제, 네가 해.”
“뭐?”
“네가 하라고. 나랑.”
심장이 어떤 몹쓸 기대와 어쩌면 흥분으로 쿵쿵거렸다.
그 사실이 서우는 구역질이 날 만큼 싫었다.
여전히 제멋대로에 남을 곤란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는 강태윤이 자신조차 해묵은 감정을 끄집어내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으랬지.”
돌발적인 강태윤의 행동에 서우가 다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자 느린 목소리로 두 번째 경고를 던진다.
강태윤이 제 앞에 두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아래를 보고 있는 서우의 시선을 기어이 낚아채고 있었다.
거대한 몸이 웅크려도 위압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시선이 터질 것 같은 강태윤의 허벅지로 향했다.
크고 어느 피아니스트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강태윤의 손이 지그시 서우의 로퍼 위를 내리눌렀다.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명백한 행동이었다.
발등과 발가락 위로 얇은 인조 가죽 너머로 태윤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태윤의 눈빛이 빛났다.
저 눈은 결코 방금 결혼을 말한 남자의 눈이 아니다. 듣고 싶은 걸 들어야겠다는 욕망에 끓는 점이 선명하게 서우에게 보였다.
“거기 무슨 일이십니까.”
단지에 주차돼 있는 차가 이상해선지 경비가 나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리쳐 묻는다.
그제야 태윤이 가볍게 일어나 흙이 묻은 손을 털었다.
이때다 싶어 자리를 피하려는 서우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차에 타, 윤서우.”
여긴 은하의 집이 있는 단지였다.
더 이상 소란이 일었다간 정말 은하가 나올지도 모른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서우가 서둘러 건너편에 주차된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약간 망설인다.
이곳에 앉아 있었던 가느다랗고 아름다웠던 여자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운전석 앞에 선 채 그런 서우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태윤이 바라봤다. 결국 서우가 차에 탔다.
흔들림도 거의 없이 출발하는 차에서 옅은 꽃향기가 맡아졌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을 때 차창이 열렸다. 바깥의 눅진하게 데워진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남들보다 심한 편이었다. 가까이만 가지 않으면 괜찮았으나 밀폐된 공간에서는 가끔 기도가 부어오르기도 했다.
그걸 꼭 강태윤이 기억하고 있어 창문을 열어 준 것 같아 맥이 풀렸다.
조금이라도 잊기를 바랐던 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잊어서 미움 같은 것도 옅어졌으면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도 가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이지 않을까.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랐다.
“저기 앞에 지하철역에서 세워 줘.”
당연하게 그럴 줄 알았지만 완전히 무시당하고 지하철역이 금세 차 뒤편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차는 익숙하게 여름의 밤 도로를 내달렸다.
“저녁 약속 있다면서.”
“아아, 있었지.”
대수롭지 않게 그제야 태윤이 대꾸한다.
“같이 온 분도 기다리고, 은하도 기다릴 거야. 그 정도로 예의 없는 사람 아니잖아, 강태윤.”
제 이름이 마지막에 약간 머뭇거리면서 나오자 운전하던 태윤이 픽 웃는다.
“오히려 그 여자가 나랑 있으면 어색하지. 은하 친군데 둘이 어련히 잘 있을까.”
꼭 그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처럼, 혹은 모르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태윤이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안다.
“미라 씨야. 박미라 씨.”
“내 이름 하나 부르는 건 어려워하면서 한 번 본 사람 이름은 꽤 친근하게 부르네.”
한숨과 함께 서우가 그냥 시트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볼일이 끝나면 얌전히 내려 주기만을 바랐다.
어디선가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태윤이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뒷좌석으로 휴대폰을 던져 버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가방 안에서도 휴대폰 소리가 들렸다.
태윤처럼 확인하지 않아도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짝 긴장한 숨을 서우가 삼켰다.
전화를 받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섞였다.
계속 자신과 태윤이 어떤 사이가 되지 않을지 걱정했던 은하에게 정말 네 말대로 엮여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차 안에 있다는 이야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서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곧 전화를 받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대로 서우의 무릎에 있는 에코백을 집어 들어 뒷좌석으로 아무렇게나 그가 던졌기 때문이다.
“강태윤!”
“그래. 내 이름 불러. 네 입에서 다른 사람 이름 나오는 거 생각보다 더 별로거든.”
“너….”
도로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에 잠시 차가 멈춰 섰다. 서우를 돌아보며 태윤이 비스듬히 핸들에 거대한 몸을 숙인다.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을 자르고 다시 입을 연다.
“엿 같다고 말해야 알아들을 거야, 서우야?”
자신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게 그에게 엿 같은 일이라고 되새김질하듯 듣고 나서야 그녀가 숨을 몰아 삼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강태윤의 키와 덩치 말고는 똑같았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짐승이라고 가끔 선생님은 제 아들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난폭한 놈이 피아노는 또 섬세하게 쳐서 강태윤의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혼낼 것도 절반은 덜어냈다고 웃어 버리셨다.
그 말에 서우 또한 동의했다.
무엇도 참지 않는 성질과 달리 강태윤이 피아노 위에서 내는 소리는 정말 섬세하고 나긋했으니까.
서우의 기막힌 시선이 핸들 위에 올려진 손가락에 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말했다.
“옛날부터 느꼈는데 너는 꼭 이걸 볼 때마다 탐욕스러워진단 말이야.”
태윤이 손을 뻗었다.
긴 남자의 손이 자신의 얼굴로 다가왔다. 좁은 차 안에서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태윤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서우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건드렸다. 건반을 누르지 않고 그저 가만히 만져 보는 어린아이처럼.
“윤서우가 이걸 빨고 핥고 싶어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