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짐승의 발자국 (13)화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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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를 집에 데려다준 뒤 태윤이 향한 곳은 종로에 있는 L 호텔 바의 라운지였다. 이미 와 있던 그의 오랜 친구들이 있는 룸으로 들어가자 이미 반쯤 비어 있는 술병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 강태윤, 오늘 동생네 간다고 못 온다며.”

“어떻게 귀국하고 한 번을 모임에 안 나오냐?”

가장 가까운 소파에 앉자 민재가 슬금슬금 그 옆으로 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그럭저럭 어울렸던 무리였다.

성인이 되고 학교를 졸업하자 슬슬 하는 일들이 갈리기 시작했다. 후계자 수업에 들어가거나 집안에서 하는 사업의 사원부터 시작한 이들도 있었고, 적당히 인생을 즐기며 사는 부류도 있었다.

“기분이 왜 그래?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민재가 술을 한 잔 따라 주며 말했다.

무의미한 태윤의 시선이 주변을 한 번 훑어봤다. 가장 큰 룸을 빌렸는지 열댓 명이서 끼리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눈이 마주치면 손을 올려 보이며 저마다 알은 척을 해 왔다.

비슷한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교육을 받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평생 볼 사이들이었다.

적당한 인간관계.

계속 태윤이 음악을 했다면 별로 만나지 않았을 관계이기도 했다.

문득, 아직 유럽에서 공연 중일 사촌인 주지형이 생각났다. 슬슬 한국에 다시 들어올 시기이기도 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안 좋진 않은데.”

입꼬리를 올려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이에게 웃어 주는 태윤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엔 아무리 그라도 기분이 곤두박질친다.

“너 이런 얼굴 할 때는 꼭 윤서우 때문이더라.”

그나마 가장 친한 민재가 그러지 않아도 태윤이 생각하고 있던 그 이름을 내뱉었다.

“어…. 윤서우? 그 독종?”

윤서우의 이름을 들은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가 이내 태윤의 시선을 느끼고 서둘러 입을 닫았다.

“독종이었지. 그런데 우리 중에 윤서우 한번 안 좋아해 본 애들 없을걸?”

“그렇긴 하지.”

“서우가 예쁘긴 했어.”

“예쁘다기보단 분위기가 좀 묘했지.”

화제가 순식간에 전환됐다. 저마다 저들이 생각하는 서우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어릴 때부터 서로 집안 행사에 참석하다 보니 자연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윤서우를 알았다. 자신의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자랑스럽게 서우를 연주대 위에 앉혀서 사람들에게 선보였으니까.

잔뜩 긴장한 채 드레스를 입고 하프를 켜는 어린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다 한마디씩 하던 그들이 이내 비슷한 눈을 하곤 태윤을 바라봤다.

윤서우가 독종이란 소리를 듣게 한 인물이었다.

친절하고 모두에게 사랑스러웠던 윤서우.

그런데 오로지 태윤과 은하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야, 누가 주 쌤 성격을 견디냐? 독종이나 되니까 견뎠지.”

툭, 말을 내뱉는다.

주 선생님. 이 중에도 몇이 태윤의 어머니에게 레슨을 받았던 적 있었다. 하프뿐만 아니라 피아노나 다른 악기도 잘 다뤘고, 유명 음대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태윤의 어머니는 끝없이 제 뒤를 이을 하피스트를 키우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었다.

“자식들도 못 하겠다고 두 손 두 발 드는데, 윤서우 그 독종은….”

더 이상 그만 말하라고 옆에서 눈치를 주자 이내 혼자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달은 남자가 멋쩍게 입을 닫았다.

“최한수라고 했었지?”

“강태윤이 내 이름을 다 기억하네?”

태윤이 지금까지 서우의 이야기를 크게 떠들었던 최연수 쪽을 향해 물었다.

그 순간 아주 잠깐의 음악과 새로운 음악이 재생되는 간극이 생겼다. 유독 태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 최한수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담배를 태윤이 입에 물었다.

칙.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이고 내뱉자 뿌연 연기가 일순 시야를 가린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한 팔을 팔걸이에 올린 채 다리를 꼰 태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영광이네. 학교 같이 다닌 지가 언젠데. 난 강태윤이 내 이름 기억할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일부러 최한수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제 술잔을 갖고 태윤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미묘한 알력이 있었다. 대충 머리가 크면 자신이 어떤 사업체를 물려받게 될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미리 정해지기 마련이다.

강태윤은 모든 게 애매했다. 차기 그룹 총수는 그의 삼촌이 될 것이며, 그 삼촌에겐 이미 태윤만 한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쟁쟁한 사업체를 갖고 있거나 이미 후계자 코스를 밟고 있는 다른 동기들과는 달랐다.

강태윤도 딱히 그들과 어울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 어릴 때부터 봐 왔다고 해도 선이 분명하게 그어졌다.

굳이 서로에게 도움 되지 않는 관계는 이어 갈 필요가 없다고 배운 이들이었다.

강태윤 역시 그랬다.

피아노를 오래 쳐 국내외 콩쿠르 입상 경력도 있어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그쪽으로 나갈 줄 알았다. 그렇다고 강태윤이 학업에 소홀한 건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가 음악을 끝까지 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은연중 EA의 주 회장, 강태윤의 외할아버지가 장손인 주지형이 아니라 강태윤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실제로 MBA 과정까지 빠르게 끝내고 돌아온 강태윤을 마주하자 그게 사실이라는 소문이 확실시됐다.

그다지 친근한 성격도, 그렇다고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는데 강태윤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모두가 그와 친해지길 바랐다. 자연히 학교에 다닐 때조차 항상 중심이 됐다.

그걸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던 몇몇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강태윤에게 다가가는 걸 민재가 혀를 차며 바라봤다.

“오랜만에 봤는데 한잔해야지, 응?”

최한수가 면전에 대고 돌아가신 고인 이야기까지 입에 올려놓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지고 온 잔을 단번에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그리고 거기에 새 술을 따라 태윤에게 내밀었다.

“야, 얘가 얼마나 깔끔 떠는 놈인데….”

그걸 마시겠냐고 민재가 제지하려는 순간이었다.

치익.

길게 한 모금 빤 담배를 그대로 술잔에 비벼 끈다. 호박색 액체 위로 금세 담뱃재가 떠올랐다. 한수의 얼굴이 멍청하게 일그러졌다.

태윤이 말없이 빤히 그를 바라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표정이 오만했다. 사람 하나의 평가를 나름대로 마쳤는지 픽 웃으면서 가느다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내가 너랑 잔 맞댈 사이는 아니지.”

일종의 혐오가 스치는 싸늘한 눈에 최한수의 얼굴이 술기운이 아닌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다.

“너, 강태윤 이 새끼….”

씩씩거리는 순간 눈치 있는 다른 놈이 뒤에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강하게 태윤과 떨어트려 놓는다.

“최한수, 넌 술만 먹으면 지랄이야. 네가 먼저 실수했어.”

최한수가 이 지랄을 해서 모두가 다시금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을 한 뒤 은하가 공식적인 모임에선 대부분 빠졌고, 태윤 역시 미국으로 간 뒤로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윤서우야 어차피 후원이나 받아서 사는 고아였으니 증발하듯 없어졌는데 굳이 알 바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강태윤이 윤서우 일에는 참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담배꽁초가 술잔이 아니라 최한수의 입안에 비벼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었다고 강태윤이 제법 성질을 갈무리하는 법이라도 배운 모양이라고 민재는 생각했다.

모두가 서우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 떠들던 입을 닫았다. 갑자기 오랜만에 윤서우의 이름이 들먹여지자 본의 아니게 고인이 되신 분까지 들먹거리게 돼 찝찝한 얼굴들이었다.

“미안하다, 태윤아. 우리가 실수했어.”

“그래. 어머님 이야기까지 한 건 우리가….”

태윤이 짧게 웃고 일어났다.

어쩐지 오랜만에 윤서우와 붙어 있게 되니 더 기분이 가라앉아서다. 이런 자리에 부른다고 나온 이유는 그래서였다.

“윤서우.”

그가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민재가 서둘러 같이 일어난다. 사과의 말을 뱉던 놈들 중 하나가 태윤의 말에 멈칫거렸다.

“잊고 살았으면 쭉 잊어. 술 냄새 나는 입으로 뱉지 말고.”

느른하게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그가 룸 안을 벗어났다. 민재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 뒤를 쫓아 나왔다. 루프트탑 바라 반대쪽은 개방돼 있어 내려가기 전 태윤이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야, 이러고 가면 어떻게 해.”

“그럼 저기서 웃고 떠들기라도 할까.”

태윤의 지긋한 말에 민재가 질렸다는 얼굴로 난간에 몸을 기댔다. 수많은 불빛들이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도심이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친구의 자태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웃고 떠들라는 게 아니라 그래도 이왕 들어왔으면 웃는 낯으로 보는 게 좋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을 말자.”

품에서 담배를 꺼내 건네자 태윤이 받아 들었다.

“윤서우지? 둘이 만났어?”

민재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그렇지 않고야 태윤의 기분이 이렇게 바닥일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났어.”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무슨 갑자기 그런 곳으로 발령받았나 했네.”

좌천이다 뭐다 저들 사이에선 떠들었는데 민재는 뭔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말을 듣는 내내 태윤은 한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수많은 불빛 어딘가에 있을 윤서우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내 말 듣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대꾸도 없이….”

“어떻게 하면 좋아할까.”

“뭐?”

“그 생각 하고 있어.”

얼굴에 농담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민재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대체 뭐라고 대꾸해 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다.

생각이나 하게 꺼지라는 듯 담배를 든 손을 젓는 태윤을 보면서 결국 민재는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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