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9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패닉? 고작 그 정도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지금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한 줌의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막막한 순백의 설원.
악마의 대리인인가 하는 자식이 노리는 게 바로 나라고 통지받은 순간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저요?”
그러다 겨우 짜낸 두 글자는 비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악마의 대리인이 노리는 건 그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대의 오른쪽 눈.”
“…….”
왜 그런 걸 원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오른쪽 눈.
하필이면 그 부위다.
은행에서 일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꿈.
누군가가 내 눈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안구를 이식한 악몽 말이다.
꿈에서 내가 교체당한 건 바로 오른쪽 눈이었다.
“…행장님.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겠습니다.”
“궁금한 게 무엇인가.”
“저번엔 때가 되면 알려 주신다고 하셨지만 지금 행장님께서 직접 놈이 절 노리는 중이라고 언급하신 이상 당사자로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
오커스 행장은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서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 뿐.
“…그래. 이걸 아는 것이 그대의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하도록 하지. 애초에 그대가 악마의 눈에 띄기 시작한 이유를 제공한 게 바로 나였으니까. 어떻게든 책임을 지는 게 맞겠지.”
“뭐라고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키우고 말았다.
“설명,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행장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그동안 계속 답을 찾아 헤매고 있던 수수께끼가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인해 해소되게 생겼지만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일시적이라곤 해도 여신이 힘을 잃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기존의 상식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적인 상황.
그로 인해 제대로 머리가 기능하지 않는 와중에도 나는 꾸역꾸역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건 참… 믿기 힘든 이야기군요.”
설명을 들으면 머릿속에 들어찬 안개가 조금은 걷힐 줄 알았지만 이게 웬걸.
오히려 이야기를 듣기 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아니, 일단 행장의 말에 모순되는 부분은 없으니 사실일 거라곤 생각하지만….
뭐라 해야 하나 이걸….
그,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나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해야 하나?
“당장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곤 생각하지만 이번만큼은 무리해 주어야겠다. 그대가 좀 더 은행원으로서 성장하고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다음에 말할 생각이었는데, 운명이 자꾸 우릴 기이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군그래.”
행장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나와 행장 사이에 끼인 플루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릴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언니의 용태가 신경 쓰이기보단 그녀가 하는 소리를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긴 했다.
전혀 현실감이 없고 와닿지 않아서 문제지.
“음… 그게….”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까.
내 오른쪽 안구가 원래 행장님의 것이었다는 부분부터?
확실히 꿈에서 안구를 교체당하긴 했다.
그렇다고 내 오른쪽 눈깔이 갑자기 행장님의 왼쪽 눈처럼 신비로운 녹색을 띠게 된 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진즉에 오드아이 모델 데뷔를 노렸었겠지.
당시 안구를 적출, 교체당하는 꿈을 꾼 뒤에도 내 오른쪽 눈동자는 계속 왼쪽 눈동자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지금은 잠들어 있다는 신들의 왕이 한 짓이라고 그러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쪽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DJ 칼리드의 앨범 제목처럼 안구 교체는 신이 한 짓이니까 인간 따위가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없도록 조금의 티도 나지 않게 잘 해내셨겠지, 아무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안구를 교체당했다는 말 자체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 꿈이 사실이었다고 치면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을 전부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였고 눈을 바꿔치기 당하는 악몽을 꾼 이후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그날 이후 나는 그림을 그리려 시도할 때마다 인간의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기묘한 증상에 시달렸다.
정신과 전문의부터 뇌 의학의 권위, 신경외과 의사까지 찾아가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은 모두 내 증상을 망상으로 취급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건 현대 의학이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범차원 세계에 근원을 둔 마법적인 힘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면 납득은 간다.
“요약하자면 신들의 왕이 저를 눈의 힘을 담는 그릇으로 선택한 탓에,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뜻이군요.”
“부끄럽지만, 그대가 말하는 대로다. 김지안 대리. 나도 어째서 아버님이 피조물의 자유 의지를 짓밟는 듯한 행동을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분명 그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곤 모르고 계셨을 테지…. 내가 대신 사과하마.”
그런 부작용이 일어날 거라곤 신왕께서 생각하지 못했을 거란 말을 들은 순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리스크가 동반되는지, 어떤 규모의 콜레트럴 대미지가 발생하는지 예상하지 못한 채 일을 저지르는 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의 특징이다, 신이 아니라.
그러니까 신, 그것도 신중의 왕이라는 작자가 스스로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일단 마음대로 행동했다 이 말 아닌가.
그런 존재를 정말로 신으로 취급해도 되는 걸까.
그딴 존재가 세상의 법칙을 정해 왔으니 피조물 중에 개 같이 구는 놈들이 많은 게 아닌가.
자신보다 훨씬 약한 피조물의 삶에 개입해서 그 꿈을 완전히 망쳐 놓은 다음 책임도 지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다니.
그딴 녀석을 신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한다는 행장의 말에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행장님의 탓은 아니죠. 저지른 사람, 아니, 신이 나쁜 거니까.”
“아버님 입장에선 더 큰 대의를 위한 행동이었을진 몰라도 김지안 대리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면 그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겠지.”
“뭐, 어쩌겠어요. 인생이 전부 마음대로 흘러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제가 불평하겠어요. 지금은 이렇게 안정적인 직장도 있고 좋든 싫든 스릴도 넘치니까 뭐… 저는 만족합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남들보다 겪은 일의 스케일이 컸을 뿐.
내가 살던 세상에선, 대한민국에선 대부분의 사람이 크고 작은 이유로 인해 좌절하고 꿈에서 멀어진다.
비단 나만 겪어 본 불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는 부모의 강요로 인해, 누군가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누군가는 그릇된 멘토와의 만남으로 인해, 누군가는 타고난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누군가는 사회의 급격한 변혁으로 인해, 또 누군가는 예기치 못한 타인의 부주의가 일으킨 사고로 인해, 누군가는 국가가 제멋대로 정한 규율로 인해….
기회를, 신체의 일부를, 돈을, 시간을, 젊음을, 정신력을, 열정을, 희망을 지금 이 순간도 잃어버리고 있다.
자기 자신이 어리석고 게으르거나 노력하지 않아 무언가를 잃는다면 그나마 억울하지야 않겠지만.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이들이 소위 ‘불가항력’이라 불리는 거대한 중력에 의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지상에 고꾸라져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겪은 일도 본질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확률로 인해 발생하는 불행.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장애물.
그와 마주했을 뿐이다.
단지 이를 행한 주체가 가정이나 사회나 군대, 국가 같은 게 아닌 신이라는 명확한 개체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만 다를 뿐.
“분명 힘들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게 되는 건 저만 겪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 점을 위로로 삼겠습니다.”
“…신이라는 자가 이런 무력한 말밖에 하지 못함을 용서해 다오.”
“괜찮습니다. 행장님 잘못도 아닌데. 제가 살던 나라에선 연좌제 따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저는 그쪽 부류가 아니거든요.”
오커스와 플루토, 두 여신이 모두 쓰게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겪어 온 오랜 세월 동안 피조물인 인간에게 위로받는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나도 살다 살다 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김지안 대리는, 회화에 능했었지.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3-1차원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그대의 그림을 본 게 계기였어.”
“……?!”
그런데, 행장님의 입에서 이번엔 흘려들을 수 없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제 그림을… 보셨다고요?”
“저택 안방에도 걸어 두었지.”
이쯤에서 내 얼굴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이 바뀐 다음 그린 그림은 전부 흑역사인데….”
“인간과 신의 시야가 조화되기 전 겹쳐 보일 때에나 보이는 신비로운 광경이다.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으으….”
쩔쩔매는 날 보고 이번엔 플루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점잖게 미소를 짓는 쿨한 언니와는 대조적인 모습.
하지만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건 틀림없었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감내하기로 했다.
“행장님께는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화가 그만둔 절 주워 주셨잖아요.”
“감사받을 일도 아니고, 그대가 지닌 나의 눈의 힘을 살리려면 은행에서 일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제공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고.”
“그런 말씀은 마세요. 저희 쪽 세상에선 화가가 되지 못하고 좌절한 인간이 독재자가 되어 대량 학살을 일으키는 관습이 있거든요.”
“그, 그게 정말인가?!”
“대리님네 차원 장난 아니네…?”
음. 아무래도 3-1차원의 역사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군.
“절 비참한 운명에서 구하신 겁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데 안 믿고 버티겠어?
“그렇군… 김지안 대리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독재자라. 그 눈을 지니고 있었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어. 그러고 보니 아버님께서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아.”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쭈어도….”
“내게 눈의 그릇을 보호하라고 힌트를 주신 걸지도 모르겠는데, 안구를 이식하는 그릇을 고를 때 묘하게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끌린다고 하시더군.”
“…….”
“화가들은 타인의 잠재력을 보는 눈의 권능을 악용하는 일 없이 괜찮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고 그러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돌아와 실패했다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했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혹시 그 시기가 언제쯤인지….”
“대략 90년 가까이 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만.”
“…….”
미대에 뜨겁게 합격한 콧수염 총통이 누구의 작품인지 밝혀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