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90화
신 역시 실수를 한다는 사실은 조금 전 총통의 용인술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밝혀지며 이해했다.
눈알 하나가 미대 낙제생의 손에 들어간 결과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이 탄생했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유용한 것인지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맙소사….”
“무슨 일이지, 김지안 대리.”
“아뇨, 그냥, 인류 역사의 중대한 비밀 하나를 알아 버린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오커스 행장님은 말했다.
내가 사용하는 직무 권능은 눈이 지닌 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직무 권능을 얻기 이전엔 눈이 몸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기에 눈의 힘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권능을 나눠 받으며 오른쪽 눈이 완전히 힘을 각성했을 거라는데, 솔직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튼.
무려 신의 몸의 일부가 내게 이식되어 있다는 사실이 일단 꽤나 충격적인데 그로 인해 누군가가 호시탐탐 내 눈을 가져가려고 시도할 거란 이야기는 더욱 골치가 아팠다.
행장님의 잘못이 없는 건 확실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내게 시한폭탄을 심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덕에 내 인생이 어떻게든 좋고 안락한 쪽으로 바뀌긴 했으니 감사하지만 일단은 눈앞에 닥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만 어떻게든 해결된다면… 나는 너를….”
행장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쿨럭…!”
“언니!!”
“행장님?!”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었는데, 갑자기 입가에 손을 갖다 대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내는 게 아닌가.
“괜찮다…. 권능이 빨려 나가면서 일시적으로 몸이 허약해졌을 뿐이야.”
피 토하는 게 단순히 몸이 쇠약해진다고 일어나는 거였다면 나는 키키와이에서 몇 번씩은 각혈했을 것이다.
플루토가 너스 콜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간호사는 물론 의사까지 달려와 오커스 행장의 수발을 들었다.
손과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새 수액을 연결하고 몸 상태를 살피느라 분주해진 병실.
나와 플루토는 의료진이 점거한 침대에서 물러나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 다음 복도로 나왔다.
“…미안, 대리님. 이상한 일로 걱정 끼쳐 버렸네.”
“괜찮아…. 행장님 아프신 건 큰일이 맞잖아. 플루토 씨가 마음고생이 많네, 가족이니까….”
한마디씩 주고받은 우리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은 고통 같은 걸 느끼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고대의 저주이니 뭐니 하는 것에 당해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비슷한 이야기가 내가 살던 세상에도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스 신화에도 독에 당해 고통받다 죽은 반신의 이야기가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우울해졌다.
은행이 세 개의 파벌이 티격태격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음에도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살아 있는 현세의 여신 오커스 디스파테르가 그 압도적인 권능을 은행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쇠약해진 상태.
행원들에게 분배된 권능 역시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문득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병실을 찾아갔던지라 아예 전원을 꺼 둔 상태였는데, 다시 켜자마자 메신저 앱의 각종 단체 채팅방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새빨간 미독 메시지의 숫자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연수원 동기 채팅방은 물론 특채 5인조 채팅방, 그리고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채팅방과 포독스 지점 채팅방까지.
차원신용금고 관계자들이 있는 채팅방에선 모두가 하나의 공통적인 화제에 관해 떠들고 있었다.
<직무 권능이 평소 같지 않아.>
<출력이 10분의 1까지 줄어든 것 같은데.>
<감사팀 쪽에선 업무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데요?>
<인사부도 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똑바로 돌아가는 건 전산 시스템 하나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고객 응대나 일반적인 업무야 별문제 없는데 이대로는 퍼포먼스가―>
곳곳에서 혼란에 빠진 이들의 절규가 들려오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직무 권능이 없어진다고 해서 은행이 똑바로 굴러가지 않는 건 아니다.
실제로 차원신용금고 외에도 다양한 은행이 범차원 세계에는 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신이 아닌 평범한 이들이 행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니까, 직무 권능으로 고객의 장부가 장난질을 친 건지 알아보지 못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마법적인 수단으로 당사자와 직접 연락이 가능해지는 식으로 업무의 편의성과 효율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다른 은행이 하는 것만큼은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정상이라는 뜻이다.
직무 권능이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이지, 은행이 굴러가는 데 있어 필요불가결한 힘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동안 익숙했던 업무 환경이 갑자기 변하는 건 행원들에게 막대한 스트레스를 주기 충분한 요인인 게 틀림없었다.
<혹시 행장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무엇보다, 그동안 든든하게 차원신용금고를 이끌어 온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건강 상태에 관한 걱정까지 행원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상황.
당연하지만 사람들이 불안감을 조금 품는다고 해서 차원신용금고가 무너질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일을 벌인 악마의 대리인인가 하는 녀석이 그 정도로 멈출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행장님이 힘을 회복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두 달… 그나마 행원들이 직무 권능 없이도 업무에 적응하기 충분한 시간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있던 건가.”
“무슨 일이야, 대리님.”
“플루토 씨. 행장님의 힘이 없어도 은행이 잘만 굴러간다고 사람들이 여기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어… 글쎄?”
“내 생각인데, 악마의 대리인인가 하는 자식은 행장님을 자리에서 몰아내려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앗.”
플루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이마를 감쌌다.
행장님의 말에 따르면 신들은 그동안 범차원 세계를 이 잡듯 뒤지며 악마의 대리인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모습을 나타낼 경우 언제든 사냥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놈은 대담하게도 대도시 린딘 한복판에서 내게 접근했다.
여태껏 수백 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신들의 추적을 따돌리던 지능적인 놈이 아무 생각도 없이 두 달 동안 행장님의 권능을 무력화시켰을 리는 없다.
분명 이사회에 동료나 부하를 만들어 둔 다음 최적의 타이밍을 노리다가 행동을 일으켰을 터.
“행장님의 측근들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행장님이 약해진 틈을 타 정례 이사회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자가 있을지도 몰라.”
“…알겠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대리님의 직감을 믿어 볼게.”
다소 뜬금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도 플루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 *
그로부터 30분 후, 나와 플루토는 마중 나온 세단을 타고 차원신용금고 본점으로 이동했다.
본래라면 행장님만 사용 가능한 프라이빗 통로로 진입해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
곧바로 본점 꼭대기 층에 위치한 회의실로 올라갔다.
“일찍 왔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세 사내였다.
그중 둘은 익숙한 얼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소장이자 차원신용금고의 최연소 차장인 슬리크 엘라마.
그리고 서부 포독스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 델 몬테 지점장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지안 대리입니다.”
마지막 한 명은 초면이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저만큼 나이를 먹었을 것 같은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오크였다.
단안경과 정장을 착용한 그는 흔히 지구의 창작물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종족과는 거리가 먼 신사적이고 이지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어째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만 사전에 이곳에 오며 플루토에게 그가 디스파테르 신용금고 시절부터 행장님을 모시던 최측근 중 하나라는 사실을 들은 참이었던지라 표정을 차분하게 관리하고 그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이렇게 모인 건 다름 아니라 행장님의 건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네. 추가적으로, 김지안 대리가 행장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온 참이니 그에 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네.”
자신을 빌토 스파인이라고 소개한 오크 임원은 현재 행장님과 차원신용금고가 처한 상황을 짤막하게 요약해 주었다.
악마의 대리인으로 알려진 이름 없는 사내는 과거 차원신용금고에서 추방당한 자로 무려 영혼 담보 대출로 도시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범죄자였다고 한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틀림없이 자신을 쫓아낸 행장님과 차원신용금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것이 스파인 이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놈은 행장님의 건강 악화와 권능 무효화가 두 달밖에 지속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분명 그 기간 동안 행동을 일으킬 테죠.”
엘라마가 덧붙이자 델 몬테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마침 김지안 대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사회 내부에 적의 끄나풀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제 말이 맞나요?”
“그렇습니다. 놈의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뭘 원하는지는 얼추 짐작이 갑니다. 행장님께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굳이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나는 병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세 명 앞에서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나의 오른쪽 눈에 관한 이야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거, 문제가 커지고 말았군요.”
“놈이 뭘 노리는지 얼추 짐작이 가는군….”
가라앉은 표정으로 엘라마가 중얼거렸다.
“김지안 대리의 눈을 취해 사람의 잠재력을 판단하는 능력을 얻고, 이사회를 조종해 은행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지금 상황으로선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군요. 적은 신출귀몰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보디가드를 늘리는 정도로는 대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행장님의 저택에서도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마도 공학 보안장비로는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죠.”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델 몬테 지점장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듣고 있던 플루토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있잖아, 나한테 생각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지 않을래?”
정체불명의 적과 은행의 미래를 걸고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행장의 여동생이지만 그 어떠한 실적도 보인 적 없는 비정규직 창구 담당자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평소였다면 가볍게 웃어넘겼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나 그녀의 정체 또한 행장님과 같은 여신.
우리 셋이 고개를 끄덕이자 플루토가 자신 있는 어조로 의견을 늘어놓았다.
“다른 신들을 이번 사태에 끌어들이면 돼. 악마의 힘과 맞서려면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