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8화
“아하하! 아핫하하하!!!”
린딘 교외에 있던 여신의 저택에서 사라졌던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66차원 모처.
그는 행성의 극지에 자리 잡은 얼어붙은 지하 저택에서 바닥을 구르며 웃어 댔다.
“이백 년 묵은 한을 이렇게나 쉽게 풀다니.”
정장 입은 몸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름은 베리알 뉴블랙 따위가 아니었다.
그 정체는 기록과 함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진 탓에 이제는 그 존재의 뿌리조차 찾을 수 없게 된 저주받은 존재.
끔찍한 죄를 범한 다음 차원신용금고에서 쫓겨난 결과 그는 다른 이름을 사칭할 수도,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줄 수도 없게 되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범차원 세계에게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다는 뜻.
그는 은행이 아닌 세상에서 추방당했고,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타인과 교류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본래 세상에 속한 것을 탐할 수 없어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것도, 손으로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영혼.
그랬던 사내가 이렇게 멀쩡히 타인에게 말을 걸고, 명함을 건네고, 이름이 없는 주제에 생자를 상대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고오오오!!
매섭게 불어닥치는 한기 속에서 사내만이 들을 수 있는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범용한 이들은 들을 수도 없고, 들어 봤자 그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드는 악마의 목소리.
죽음의 문턱에서 고대의 어둠과 계약한 이름 없는 남자는 자신의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알고 있습니다. 분부대로 합지요.”
주인 되는 악마가 조바심을 잃고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만큼 목표를 손에 넣을 기회가 지척까지 다가왔다는 뜻일 터.
악마의 감정과 동조한 사내 역시 광기 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든 잠재력을 보는 여신의 눈이 곧 손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충분한 힘을 지닌 자가 지니게 되면 피조물들의 세상이 향하는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궁극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진 신들의 지보.
“크흐흐.”
한때 은행에서 쫓겨나 죽는 날만 기다리던 자신이 당시의 고용주였던 오커스 디스파테르 여신을 무력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어쩌면 저번에 늙은 엘프의 영혼을 집어삼킨 것처럼 조만간 신의 영혼 역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모두가 허황되다고 비웃을 만한 상상을 하며 사내는 소파에 앉았다.
뜨거운 김이 오르고 있던 커피잔은 그의 손에 쥐어진 순간 살얼음이 낄 정도로 온도가 내려갔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신들이 남긴 온기를 앗아가는 저주받은 힘은 다음 먹잇감을 주시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 * *
그날 밤은 유난히 길었다.
엘라마에게 악마와 그 대행자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하긴, 신이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그 대척점에 악마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애써 침착한 척 중얼대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하여튼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난 그냥 은행원으로서 내 할 일 열심히 하면서 응당한 사회적 스테이터스와 연봉, 그리고 추가로 행복한 가정이 갖고 싶었을 뿐이다.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정당한 보수와 안정적인 인생을 누리면 그거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어째서 악마 같은 것과 엮이게 되어 버린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나는 아까 만났던 베리알 뉴블랙이란 사내를 떠올렸다.
정장 차림이었던 나는 은행 배지를 차고 있었고, 당연히 놈이 수상한 헛소리를 했을 때 직무권능을 사용해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 말은 즉, 놈의 명함에 적힌 이름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아예 직무권능이 통하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
하긴, 악마의 하수인인지 대리인인지 하는 놈한테 신의 권능이 통한다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겠지.
그게 아니니까 그 침착한 엘라마가 아까처럼 불안하다는 듯 호들갑을 떤 것이 아닌가.
비록 차원신용금고의 감추어진 역사에 관해선 아는 게 없는 나지만 그 엘라마가 침착함을 잃고 저렇게 구는 걸 본 이상 이번 사태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었다.
엘라마는 명함을 직접 행장님께 보여 드린다고 했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까.
겁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던 명함의 감촉이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겉보기엔 평범한 종이 명함인데 쥐고 있는 나의 체온을 송두리째 앗아가려 드는 것만 같은 느낌.
그것은 분명 직무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느끼던 신비로운 온기와는 정반대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힘을 지녔다는 말엔 어폐가 있을 것 같다.
명함은 밑 빠진 독처럼, 텅 빈 진공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근거는 없지만 이쪽 세상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기묘한 직감 같은 것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뭐, 행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몸을 뒤척였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 * *
“뭐라고요?”
겨우 잠이 들었다가 점심에 깨어난 내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엘라마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행장님이 입원하셨다고요?!”
<그래. 네놈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시 머리가 혼란스러워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행장님이 나를 부를 수도 있다는 거야 뭐 저번에 독대해서 이것저것 5분 동안 이야기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정이 존재한다고 추측해 내긴 했다.
하지만, 그 행장님이.
무려 여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병이 들고 죽는 건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사건이지 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엘라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행장님의 입원은 아마도 사실.
여신도 똑같이 피조물처럼 상처받고 다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범차원 세계가 생겨난 이래로 일어난 적 없는 기이한 사건이 발생한 걸까.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네놈은 신이 어째서 신이라 불린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쵸… 역시….”
<이쯤 말하면 알아들었겠지만 이번 일은 대외비다. 네놈과 나, 그리고 행장님의 측근 두어 명 외엔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습니다.”
<주소는 지금 보내겠다. 당장 튀어와라.>
“예.”
엘라마는 곧바로 병원 이름과 병실 번호를 메시지로 전송했다.
나는 곧바로 호텔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다.
* * *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밀라와의 식사까진 5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굳이 이번 일을 알려선 안 된다는 생각에 밀라에겐 약속을 미루자고 말하지 않았다.
행장님이 날 부른 데에 중대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5시간씩이나 걸릴 것 같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였다.
어쨌든, 병실에 도착했을 땐 시계는 이미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행장님의 병실은 VIP 병동의 호화로운 1인실이었기에 찾아가는 게 어렵진 않았는데 가는 동안 소지품 검사 등 온갖 안전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암살 시도라도 있던 걸까.
아니면 입원한 유명인들의 팬이 어떻게든 들어오려는 걸 막으려고 저러는 걸까.
한 번도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VVIP가 붙는 건 모두 서민에겐 알아먹기 힘든 법이라는 사실을 은행원 생활을 통해 파악하고 있었기에 불편한 티를 얼굴에 내는 일 없이 순순히 병원 측 인원의 요구에 순응했다.
“그럼, 이쪽으로.”
마침내 안내받은 1인용 병실.
경호원이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김지안이군.”
“예. 행장님.”
침대에 누워 있는 건 틀림없이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이었다.
그 옆에는 언니의 손을 꼬옥 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는 플루토 디스파테르의 모습이 있었다.
“대리님 와 줬구나.”
힘없이 미소를 짓는 플루토의 얼굴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남을 골탕 먹일 생각만 하고 빙글빙글 속을 알 수 없는 웃음만 보이고 있던 평소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표정.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한눈에 봐도 오커스 행장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평소 보이던 기백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창백하고 수척한 얼굴. 누가 봐도 심각한 병자 그 자체였다.
“적의 함정에 빠졌다. 행장에 여신씩이나 되는 자가 방심하고 있다가 이런 수법에 당하다니, 진심으로 면목이 없군.”
“함정… 입니까?”
“그래. 함정. 놈은 명함이 내 손에 들어올 걸 예상하고 고대의 저주를 걸어 놓았다.”
“놈이라 하시면, 설마….”
내가 묻자 행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그날 호텔에서 만난 그 자식이다.
대뜸 나를 찾아와 스카우트하겠답시고 명함을 내민 그놈.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엘라마를 만났을 때 더 자세히 이야기했어야만 했다. 어쩌면 그걸 듣고 행장님이 놈이 내민 명함의 정체를 더욱 자세히 파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나.
“신경 쓰지 마라. 그대가 눈치챌 수 있던 일이 아니었다.”
오커스 행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죄책감을 품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한 모양인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 정도 힘을 지닌 악마의 대리인이 세상에 남아 있을 줄 몰랐던 우리의 실책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열심히 환자복을 입은 행장을 살피고 있었다.
저주라면, 대체 어떤 일을 당한 걸까.
애초에 병원에서 저주나 그런 걸 고칠 수 있긴 한 건가.
나는 범차원 세계 출신이 아니고 신에 관한 지식도 없기에 이런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붕대를 감고 있는 행장님의 오른손.
무언가에 베이기라도 한 걸까.
신을 상처입힐 수 있는 저주라니, 대체 얼마나 강력해야 그런 게 가능한 걸까.
“그나저나 용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외상은 크지 않으니 문제는 없다. 다른 게 걱정이지.”
오커스 행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신의 권능의 9할 이상이 몸에서 빠져나가 흩어졌다. 다시 힘을 끌어모으려면 족히 두 달은 걸리겠군.”
“…맙소사.”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신의 권능을 새어 나가게 만드는 저주에 당했다면, 은행원들의 직무권능은 어찌 되는 걸까.
그래도 두 달이면 원래대로 회복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 부분은 약간이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어진 행장의 말은 안심하기 시작하고 있던 내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회복을 기다리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두 달 동안 차원신용금고에 혼란이 일어날 게 뻔하군. 놈이 그 틈을 노려 무언가 공격을 시도하겠지. 예상되는 놈의 타깃은, 바로 그대다. 김지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