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2화
갑작스러운 은행장의 호출.
그녀의 곁에 따로 수행 중인 이사나 플루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떼어 놓고 혼자 나를 찾아왔다고 보는 게 맞겠지.
옆에 있는 밀라는 불안하다는 듯 나와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을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긴장으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 레믈리에 대리도 같이 있었나. 걱정 말게. 잠시 공적인 일로 할 이야기가 있을 뿐이야. 당연히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5분이면 끝날 거다.”
5분. 그 단어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잠시 우리 둘만 남기고 자리를 비워 달라.
인사부 근무자로서 남다른 눈치를 지닌 밀라는 금방 행장의 말뜻을 알아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밀라의 눈은 딱 5분 만이다, 라고 나와 행장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꿀꺽
밀라의 뒷모습이 복도 저 멀리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던 나는 행장의 얼굴을 보았다.
밀라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정도지만 그녀가 발하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안대를 끼고 있어서 어딘가 험악해 보이는 인상을 주지만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여신 특유의 비현실적인 미모와 더불어 차원신용금고의 행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에도 더더욱 눈을 마주치기 꺼려지는 상대.
하지만 오커스 행장은 지극히 편안한 태도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차원신용금고는 여러모로 그대에게 신세를 지고 있지. 이번 영화만 보아도 흥행이 확정된 작품에 미리 투자했으니 적잖은 수익을 낼 수 있을 거야. 이 수익은 우릴 믿고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를 위한 배당과 예금을 맡긴 고객에게 제공되는 이자, 그리고 임직원의 급여와 은행의 유보금이 될 것이다.”
행장은 가능한 한 상세히, 내 행동으로 인해 차원신용금고가 연관된 이들이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되었는지 알려 주었다.
한 명의 은행원이 업무를 처리함으로써 일으킨 나비효과가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 자신이 인지하고 있고 그 공로를 높게 평가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습니다.”
그 칭찬에,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돈이 필요해 은행을 찾아온 사람에게, 그 사람이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을 은행이 융통할 수 있도록 서류를 작성해서 올렸다.
나와 다른 행원의 차이? 그런 게 과연 있을까?
내가 특별히 성실하고 선량하고 노력을 멈추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잘 풀린 걸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은행에서 플랫 씨를 무시하고 이야기조차 듣지 않았던 건 은행원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일이었을 뿐이다.
나는 해야 할 일을 규정대로 처리했고,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일을 수행하지 않은 이들과 비교당하며 칭찬받을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걸, 제대로 내 입을 통해 말해 보고 싶었다.
“해야 하는 일을 한 것 갖고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얼떨떨합니다. 행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정말로 감사한 일이지만 일개 대리와 이렇게 독대해 주시고 말씀 나눠 주시는 걸 주위에서 본다면 저를 좋지 않게 볼까 걱정됩니다.”
“하하….”
오커스 행장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마치, 누가 감히 자신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있겠냐고 말하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래. 속 좁은 사람들도 있지, 내 은행에서 일하는 이들 중에는 말이야.”
내 은행.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은 차원신용금고를 ‘내 은행’이라고 표현했다.
조금 전에 은행을 믿고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행장이 한물간 예전 세대 기업 오너들처럼 기업을 완전히 사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이는 어디까지나 은유 같은 것이리라.
자신의 지배력이 닿는 영역,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걸까.
외견은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갖췄다는 것 말고는 인간과 같지만 과연 그 껍데기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인성이 아닌 신성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한마디였다.
“그들이 그대를 해할 수 없을 거라고, 내 보증하겠네.”
행장은 그렇게 덧붙였다.
“보증, 인가요…?”
은행 서류에선 꽤나 자주 볼 수 있는 두 글자였다.
보증. 얼마나 무서운 단어인가.
한국인이 두려워하는 금융 관련 어휘를 꼽는다면 차압이나 자기회생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게 뻔한 단어.
그리고 이 단어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신들에겐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 방금 내 입으로 보증이라고 말했다.”
행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신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 따위 없으니까.
어지간한 일이면 자신이 가진 막강한 권능으로 해결이 가능하고, 누군가를 속일 이유 따위 살면서 마주할 일이 전혀 없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그들은 같은 신조차 기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사랑스러운 피조물에게도 절대로 거짓을 고하는 일이 없었다.
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건 그들의 신성과 연관된 중대 사항이었다.
신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은 신의 진실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신에게 존경과 공물을 바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방금 행장이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증한다고 말한 건 정말로 말 그대로의 뜻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를 파벌 싸움이든 행내 정치든 휘말려 다치지 않도록 약속해 주겠다는 소리.
“…과분한 호의입니다. 제가 거절하면 취소할 수 있을까요?”
“그대의 마음은 잘 이해하네만, 안타깝게도 불가능하다네. 내가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정한 결론이니까 말이야.”
행장의 왼쪽 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신비로운 푸른빛이 서려 있었다.
마치, 한낱 인간 주제에 신의 의견에 토를 달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거절하겠나.
나는 다시금 고개를 깊이 숙여 행장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닥을 주시하는 내내 내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사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범차원 세계로 데려오려 한 건 다름 아닌 오커스 디스파테르다.
신의 권능으로 내가 차원을 넘어 면접장에 올 수 있도록 만든 건 바로 이 여신이라는 소리다.
그녀는 주위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평범한 화가 지망생을 은행원으로 맞이하려 했다.
낸 적도 없는 특채 서류가 그 과정에서 통과되고, 나는 면접에서 철부지나 할 법한 소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정식 행원으로 발탁되어 이렇게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고 있다.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런 사람을, 드디어 5분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긴 하지만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물어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당장 본점 근무가 확정된 것도 아닌 상황인데.
나는 빠르게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행장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두 개를 물어봐도 상관이 없네. 다만, 자네의 연인과 정해 둔 5분의 제약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연인은 아니지만 감사합니다.”
“아. 내가 실례했군. 아무튼, 정정해 줘서 고맙네.”
잠시 밀라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통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행장에게 물었다.
“제 눈에 관해, 행장님은 아시는 게 있으실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하자 디스파테르 행장은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글쎄요, 그건 아직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계속 생각했거든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제가 어째서 이쪽 세상에 불려오게 된 건지.”
고민한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짐작이 가는 건 오래전부터 꾸기 시작한 악몽뿐.
내게서 화가라는 꿈을 앗아간 지독하리만치 고통스럽고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그 악몽 말고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말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군. 나머지는 자네가 린딘에서 근무를 시작한 다음 기회를 찾아보도록 하지.”
“그 말씀은―”
“1년 정도만 기다리게. 키키와이에서 이대로 실적을 유지한다면 금방 자네 차례가 올 테니.”
“…감사합니다.”
내가 인사하자 행장이 방긋 미소를 지으며 회중시계를 꺼냈다.
“5분, 지났군. 다음에 또 보자고. 김지안 대리.”
칼같이 대화를 중단한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은 내게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한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멀리서 대기 중이던 이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빠, 얘기 잘 끝났어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밀라는 내 뺨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행장에게 싸대기라도 맞은 게 아닌지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어휴. 엄청 마음 졸이고 있었다니까요.”
“니가 왜.”
“그, 어쩌면 갑자기 다른 부서로 이동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부서? 어딜 말하는 거야.”
“홍보부 있잖아요.”
“홍보부는 왜.”
“아니, 그, 오빠 잘생겼다고 본점 행원들 난리인 거 얘기했지 않아요? 예전에 플랫 씨랑 같이 사진 찍었는데 전혀 안 꿀린다고 막.”
“아니, 그런 건 좀….”
적성에 맞지 않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홍보부여도 좋으니까 일단 본점에 간 다음 부서 이동을 신청하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던 참이라서.
하지만 이내 나는 잡념을 털어냈다.
내가 그동안 익힌 재주를 살릴 수 있는 곳에서 일해야 마땅하다.
행장과 구D 파벌의 푸쉬가 있는 데에다 지구와 달리 행원마다 직무권능이라는 게 존재하다 보니 당당하게 실력으로만 들어간다고는 말 못 해도 나는 융자 관련 부서에서 일하길 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행장님이 뭐래요?”
아무것도 모르는 밀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내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걸 보고 덕담이라도 들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그게….”
이걸 미리 말해도 되는 걸까.
근데, 밀라는 인사부 근무니까 어차피 1년 지나기 전에 알게 되겠구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밀라에게 말했다.
“나, 1년 뒤에 본점 간대.”
“네? 정말효?!”
요도 아니고 효.
밀라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목소리가 뒤집힌 게 부끄러운지, 아니면 비밀이 새어 나가선 안 된다고 판단한 건지 입을 틀어막았다.
“어. 아무튼 그렇게 됐어. 부서 이름은 못 들었고, 행장님이 말한 거니까 틀림없을 거 같아.”
“와, 어떡해. 오빠 오늘 우리 저녁에 맛있는 거 먹어요. 제가 한턱 쏠게요.”
“무슨 소리야. 이동하는 건 난데 내가 사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듣고 보니 그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