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1화
베르게네프 감독이 전용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드워프의 짧고 굵은 몸이 조금 움직여 봤자 다른 종족들은 이렇다 할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늘씬하고 키가 큰 도베르인 플랫이 상체를 일으키자, 상영관에 있던 모두가 숨 쉬는 것을 잊고 그쪽을 쳐다보았다.
-지이익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간에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 차원신용금고의 근속 2년 차 대리가 앞에 서 있을 때.
“뭐야, 누구야, 저 사람.”
김지안이 서부 포독스 지점에 근무하던 시절을 모르던 행원들이나 차원신용금고 행원이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 근무하는 참석자들은 그 모습이 신기한지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건가.”
당연한 생각이었다.
사인회 중에 배우와 감독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날 이유가 따로 있을까.
갑작스러운 스케줄이 끼어들어서 자리를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 관객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화장실에 가기 위함이 틀림없다.
그렇게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꾸벅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을 포함해 투자자나 업계 관계자에게도 고개를 숙인 장면이 목격된 적 없던 플랫 샤펜도라가, 일개 은행원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인사하고 있었다.
‘이건 특종이야.’
시사회에 초대된 사람들 중엔 회사원과 은행원만이 아닌 기자 역시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이 정중한 인사가 불러일으킬 파장을 기대하며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 * *
“플랫 씨…?”
플랫 씨가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한 순간 나도, 밀라도, 다른 사람들도 선 채로 얼어붙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고 그저 한없이 비현실적인 상황.
어째서 내 인생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데엔 김지안 대리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
아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 일을 다했을 뿐인데.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은행이 돈을 빌려줄 수 있도록 창구에 앉아 단순한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스타가 되어 버린 플랫 샤펜도라가, 이젠 내게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사람이.
단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객인 플랫보다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이런 좋은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사회에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것저것 너무 일방적으로 호의를 받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내가 말하자 충격을 받아 멍 때리고 있던 밀라도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흐르는 적막. 상영관 내에선 그야말로 쥐 죽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런 상황이 닥칠 줄 알았다면 시사회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플랫에게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한 본점 이사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을 거란 사실을.
다만, 지금은 그들의 눈치를 볼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가 문제지.
“그,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어떻게든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쥐어짜 냈다.
플랫 샤펜도라는 고개를 들고는 나와 밀라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제가 늘 느끼는 거지만, 김지안 대리님에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선 필수 불가결한 재능이죠.”
옆에 있던 매스터한트 감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다.
다만, 나는 그쪽 업계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거니와 지금 뒤에서 수많은 차원신용금고 행원들이 지켜보는 중이라 그들이 원하는 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칭찬,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셔요.”
“……!!”
“……!!”
이번엔 냉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나도 밀라도 질끈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우리가 무슨 얘기하는지 상영관이 조용해서 남들한테 다 들리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꼭 하셔야 합니까, 플랫 씨.
“…감사합니다.”
나와 밀라는 결국 매스터한트 감독과 플랫 씨의 사인을 받은 다음 곧바로 도망치듯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이게 왜 이렇게 되지. 미안. 내가 괜히 오자고 해서.”
“아, 아녜요. 오빠. 저 재밌었어요. 진짜로.”
인구 밀도가 비교적 낮은 장소로 탈출하자마자 우린 황급히 변명 비슷한 말을 서로에게 쏟아 냈다.
그리고 그 뒤엔, 길고 어색한 침묵이 자리를 대신했다.
“…….”
“…….”
서로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확인하지 않아도 밀라의 얼굴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갔다.
아마 지금 내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 얼굴은 무지막지하게 뜨거웠다.
아마도 혈류가 머리에 집중된 탓에 색깔도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겠지.
밀라의 경우 피부색이 가벼운 갈색이니까 나와는 홍조를 띠었을 때 조금 다른 색깔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아마 크게 차이는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지안 오빠.”
먼저 입을 연 건 밀라였다.
“저희, 생각보다 그, 뭐랄까, 커플처럼 보이나 보네요.”
“아, 어, 응, 으음, 어, 어으.”
한편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무슨 의도로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걸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신발이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맨발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오빠.”
“아, 그야 내가 잘생겼고 너도 나름 생겼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애써 침착한 척 농담으로 자리를 모면하려 했다.
“아, 그거 직접 본인이 말하는 거 디게 재수 없는 거 알아요?”
“재수 없으면 어쩔 건데.”
다행히 밀라는 평소처럼 내 농담을 받아 주었고 우리는 잠시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
잊고 있었는데 왼손에는 아까 받은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괜히 목이 타서 뚜껑을 열고 그대로 원샷을 하려 했다.
옷에 흘리지 않도록 입을 대고, 벌컥벌컥.
“오빠, 저도 물.”
“응. 아니, 뭐?”
내가 무어라 항변하기도 전에 밀라가 조심스럽게 내가 쥐고 있던 물병을 빼앗아 나머지를 전부 들이켰다.
“푸하. 살 것 같네.”
“…….”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무어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괜찮아요. 오빠. 이런 거로 미안해하는 거 웃기잖아요. 오빠는 재밌는 영화 보려고 저 데려와 준 거고, 저는 그거 너무 고맙거든요.”
“아, 뭐. 그럼 된 거지. 아하하.”
“진짜, 즐거웠어요.”
“그래?”
“네. 영화도 너무 좋았고, 사인도 받았고.”
“다행이네.”
“설레더라고요.”
마지막에 밀라가 모기 날갯짓만 한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뭐?”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해 본 소리.”
“뭐야. 제대로 못 들었는데.”
“아 됐다니까. 못 들었으면 말아요 그냥.”
툴툴대는 녀석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왁. 아아. 세팅 오래 했는데.”
“됐어. 머리 안 해도 넌….”
예뻐.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외모 칭찬 정도야 평소에도 하고 살았는데, 어째서일까.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 안 해도 뭐요?”
“아니, 귀엽다고.”
“전 귀엽기도 한데 예쁘거든요.”
“그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 진짜?”
밀라는 능청스럽게 눈웃음을 치고는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돌렸다.
“…지안 오빠도 본점 와서 일하면 좋을 텐데.”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키키와이는 좀 뭐랄까, 너무 리조트 분위기라. 역시 사람은 대도시에 살아야지. 키키와이는 노후에 살면 좋은 곳이고, 은퇴한 다음이나.”
“그쵸. 안 그래도 거기 땅값 진짜 비싸더라고요. 어지간히 돈 모아두지 않으면 집 못 살 정도로.”
“에이, 린딘이랑 비슷하지 않나?”
“키키와이가 더 비싸요.”
“그렇구나. 부동산은 딱히 체크 안 했는데. 네 덕분에 이것저것 알아가네.”
“그쵸? 오빠는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와. 뭐야, 평생 나 재무설계 해 주고 이것저것 도와주려고?”
“음. 그건 급여 얼마 주는지 봐서. 근데 오빠 사장할 거 아니잖아요?”
“그야 모르지. 아니다, 난 그냥 명예퇴직까지 직장 매달려 있다가 그냥 편안하게 연금 받아먹으면서 노후 보낼 거 같아. 명퇴까지 일하면 퇴직금도 많이 주겠지?”
“그건 오빠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죠.”
“너 인사부 짱 먹으면 많이 신경 써 주라. 맛있는 거 사 줄게.”
“그건 좀 끌리네요. 같이 먹으러 가는 거면 전 좋아요.”
평소처럼 시답잖은 헛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오갔다.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묘한 기분.
밀라의 탄력 있는 머리카락이 자꾸 내 심장을 붓끝처럼 쓰다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뇌에 스며드는 샴푸의 향기.
괜히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동기를 여자로 보다니.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밀라를.
어지간히 고팠으면 이럴까.
근데,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스물아홉 살에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 보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 이쪽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 게 운명일지도 모르지.
운명 같은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마음속에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충동이 거세게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괜히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이 지랄맞은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최대한 주둥이를 단속해야만 했다.
-두근
심장이 혹시라도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이런 편안한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
밀라는 동기이자 절친, 그리고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전우로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굳이 이 편안한 관계에서 벗어나야 할까?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밀라가 다른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어머니가 되고 더 나이가 들 때까지, 계속.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의문이 들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살아 보려고 노력했는데, 이쪽 세상에 와서는 더더욱.
지금 나는 이상하리만치 겁을 먹고 망설이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여 후회하게 된다면.
밀라의 생각이 나와 같지 않다면.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걱정과 의문.
나는 쉽게 그것에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김지안 대리, 잠깐 시간 좀 내주지 않겠나.”
나와 밀라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섰다.
나팔바지를 입은 여인.
고개를 들자 안대를 쓴 얼굴이 보였다.
오커스 행장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