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3화

시사회를 마친 나는 다른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자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플루토 씨는 ‘언니네 집 다녀올게’라면서 훌쩍 가 버렸지만.

“플랫 씨가 방 예약해 준 거 아니었나요?”

“플루토의 방은 처음부터 예약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다행히도 여신의 변덕 때문에 남의 돈이 허투루 낭비되는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플루토 씨가 호텔에 묵지 않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저희한테 알려 주기 전에 이미 플랫 씨가 예약 마쳐 두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처음부터 대충 예상은 했다. 키키와이의 숙소야 혼자 사는 곳이니까 그냥저냥 참고 살겠지만 플루토가 린딘에서 묵으려는데 오커스 행장님의 집이 아닌 호텔에 묵을 이유는 없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신의 집이 호텔보다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수천 년 전부터 인간들의 신앙과 존경, 그리고 공물을 받으며 살아온 진또배기 신이다.

심지어 그냥 올림포스에서 은거하는 것도 아니고 피조물들 사이에서 똑같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은행장으로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당한 급여를 받고 있을 테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주식 배당도 쏠쏠할 것이다.

그런 분이 사는 집인데 어련하겠지.

집은 팔면이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고 평범한 아파트 따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한 층 넓이를 혼자 사용하는 데에다 높이도 2~3층 어치 있는 펜트하우스.

그게 아니라면 거대한 개별 주택이리라.

“저였어도 그럴 거 같습니다. 자매랑 어지간히 사이가 나쁜 게 아니라면.”

“시사회에 같이 올 정도다. 관계는 무난하다고 봐도 되겠지.”

“처음엔 좀 의외였다니까요. 자기 친동생을 정규 행원도 아니고 그냥 비정규직 창구 담당자로 두는 걸 보고 아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으려나, 같은 생각도 했고.”

“신들의 가정사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네놈 일이나 똑바로 처리해라, 김지안.”

“암요, 그래야죠.”

가족 앞이라 그런 걸까, 어째 엘라마의 태도가 평소보다 사근사근한 것 같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였다면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다며 재떨이든 서류든 던졌을 거 같은데, 오늘은 꼬박꼬박 대답해 주고 있는 듯해서.

어쩌면 업무 시간이 아니라 그런 걸지도?

“그쪽이 김지안 대리님 되시나요?”

그때였다.

딸의 손을 잡고 근처를 걸어가던 엘라마 차장 댁 사모님이 내게 말을 걸은 건.

“네, 그렇습니다만….”

무슨 생각인가 싶어 일단 대답을 했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 왔다.

“우리 그이가 김지안 대리님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해요.”

“아, 그렇습니까….”

“그걸 듣고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인 게 아닐까 싶어서요. 앞으로도 저희 바깥사람을 잘 부탁드립니다. 성격이 조금 그래서 그렇지 따뜻한 사람이에요.”

“크흠.”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다 자신의 아내가 하는 말을 들은 엘라마가 노골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불편하다는 티를 냈다.

그나저나 아내에겐 화 안 내는구나, 이 사람.

아무래도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부인이 하는 이야기라 절반 정도 걸러 들을 생각이었지만 의외다.

내 이야기를 자신의 부인 앞에서 한다는 건 사실인 모양인데, 그것 자체가 예상하지 못했던 거라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보통 부인들은 남편이 집에서 직장 이야기하면 싫어하지 않나?

“저녁은 호텔에서 먹든지 알아서 처리해라. 룸서비스를 먹든 호텔 안의 레스토랑에서 먹든 방 번호에 달아두면 나중에 샤펜도라 씨가 대신 지불해 준다고 하니 부담 갖지 말고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하더군.”

“어우, 진짜 신경 많이 써 주시네요. 황송해서 어쩐담.”

엘라마가 화제를 돌렸고 나는 그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잽싸게 그 말을 받았다.

“소장님도 호텔에서 드실 거예요?”

“오늘? 내일 조식과 저녁이라면 고려해 보지.”

“아하. 저도 저녁은 친구랑 밖에서 좀 먹고 와야겠습니다.”

“그러든가. 네놈이 어디서 뭘 먹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오늘 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

뭐, 말려도 나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부하 행원들이 아내나 약혼자를 데려온 상황에서(라즈마 과장이 데려온 것의 정체가 무엇인진 알 수 없다만) 다 같이 식사를 하자는 식으로 행동을 제한할 생각이 없는 듯해서 다행이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나저나 여기서 2박 묵고 월요일 새벽 비행기로 돌아가 출근한다고 그랬나.

아주 잠깐, 오늘 저녁에 밀라를 호텔로 데려와 맛있는 걸 먹여 볼까 고민해 보았다.

아무래도 린딘의 5성급 호텔에서 고급스러운 코스든 뭐든 먹어 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가족 데리고 온 행원들을 위해 플랫 씨가 특별히 식사비를 전액 지불하겠다고 감사하게도 말씀해 주셨다.

밀라 녀석에게 맛있는 걸 먹이는 것도 뭐, 시사회에 같이 참석한 파트너랑 맛난 거 먹으라는 플랫 씨의 배려에 감사하는 의미로 데려가는 거니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로렐트리에서 날라다니며 개봉 전부터 벌써 다큐멘터리와 예능에 불려 다니는 왕년과 현재의 무비 스타가 지닌 재력을 일개 행원인 내가 걱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건방진 일이다.

밥 사 주신다는데 감사하게 얻어먹는 게 도리에 맞겠지.

하지만, 오늘 저녁은 내가 사겠다고 밀라에게 말해 두고 막상 남의 돈으로 밥을 쏘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이 말이다.

꿈에도 그리던 본점 근무가 결정되었는데 밥 한 끼 쏘는 정도야.

지금부터 예약이 가능한 곳이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좋은 곳으로 가야지.

내일 저녁 이 호텔에서 밀라한테 먹일 음식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데로.

“지금부터 예약 잡을 수 있으려나, 근데.”

그런 고민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찍고 숙박하는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오빠 이따 몇 시에 볼까요?>

<가게 잡고 생각하자. 아직 저녁 먹으려면 한 시간 넘게 남았으니까 거리 너무 안 먼 곳으로 찾아볼게.>

<그럼 오빠 묵고 있는 호텔 1층에서 기다려도 돼요? 혼자 있기 심심해서….>

“어….”

<그건 너 맘이지, 뭐.>

방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여자애가 같은 건물에서 기다려 준다고 하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가게만 좀 찾아두고 바로 내려갈게.>

나는 복도에서 답장을 마친 다음 방으로 들어갔고, 그다음 절규했다.

“……?!”

34층 3408호실.

카드키를 찍고 내가 들어간 방은 혼자 사용하는 방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2층 높이를 혼자 쓰는 펜트하우스.

이상하다, 분명 35층도 있던 것 같은데.

그놈의 마도 공학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신비로운 기술로 구현한 걸까.

“침실이 대체 몇 개야….”

위층과 아래층을 돌며 확인해 봤는데 방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호화로웠다.

최근 판매되었다는 33차원 카펠리노 디 드리아데의 세계수 가구까지 갖춰진 말도 안 되는 라인업.

진짜 어지간한 부자가 아닌 이상 묵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숙소.

왜 홀몸인 나한테 이런 좋은 숙소를 잡아 준 걸까.

아까 고맙다고 굳이 사인회 진행되는 도중 일어나서 고개 숙인 것도 그렇고 진짜 부담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그렇다고 방 바꿔 달라 그랬다간… 아무래도 실례겠지?”

플랫 씨한테 밉보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 전에 내가 방을 바꿔 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엘라마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만일 엘라마 소장이 그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플랫 씨와 가족 단위로 만나고 있는 절친한 사이인 듯한데 자기 친구의 호의를 무시했다고 나한테 노발대발할지도 모른다.

“…….”

어쩔 수 없다.

내 입장에선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플랫 씨 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 경우엔 고객님의 의견을 중시하는 게 맞겠지.

솔직히 말해서 이거 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뇌물 같다고 안 좋게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사전에 엘라마가 말했던 이유가 납득이 갔다.

솔직히 말해서 다른 출장소 행원들에게도 말하기 꺼려진다.

혹시라도 그들이 묵고 있는 방이 나와 다르면 남들이 날 어떻게 볼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아서.

“내일 저녁은 여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뷔페 중에 골라서 가 봐야겠다.”

밀라 데리고.

일단은 오늘 뭘 먹을지 걱정인데….

“어?”

잠시 침대에 앉아 협탁을 보니 제공되는 서비스 중에 레스토랑 예약을 호텔 컨시어지가 대신 잡아 주는 게 있었다.

최대 1시간 전까지 미리 컨시어지에게 연락하면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준다는데, 캔슬 대기석을 중간에서 낚아채 주는 거려나?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에 묵어 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것도 해 주는지 몰랐다.

그 외에도 컨시어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리스트로 좌륵 적혀 있었는데 호텔에서 이런 것까지 도와주는구나, 싶을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연 돈을 낸 만큼 추가되는 서비스가 다양한 모양이다.

“서둘러야겠네.”

벌써 시간이 오후 다섯 시를 넘기려 하고 있다.

나는 곧바로 호텔 내선 전화로 컨시어지 직통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24시간 교대제로 고객의 수요에 응해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급 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컨시어지는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연락을 받아 투숙객의 방 번호와 이름, 그리고 용무를 확인했다.

“혹시 6시에서 6시 반 정도에 예약 잡을 수 있는 괜찮은 음식점 있을까요? 네. 코스요. 가능하면 예산은 주류 포함해서 인당 30만 굴덴 근처로.”

컨시어지는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나 기호를 물어본 다음 5분 내로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대답했다.

“참. 가능하면 택시로 30분 거리 이내의 가게였으면 좋겠네요.”

무리한 조건을 하나 더 추가. 안 되면 진짜 호텔에서 먹든지 하는 수밖에 없겠지.

밀라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아서 호텔 방 전화가 아닌 내 스마트폰으로 직접 연락 달라고 부탁한 다음 다시 겉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5성 호텔의 컨시어지다.

괜찮은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를 식사 시간 1시간 전에, 심지어 예산까지 제한 걸어 두고 예약을 잡아 달라는 부탁은 내가 보기에도 난이도가 상당하지만, 능력이 출중한 사람일 테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복도를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을 지나치던 그때 문자가 왔다.

<김지안 님. 컨시어지입니다. 예약 가능한 업장을 세 곳 확인했습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실지요?>

와, 이게 되네.

“내가 진짜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밀라를 기다릴 겸 통화 버튼을 눌러 컨시어지와 연락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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