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80화
2시간의 러닝타임이 끝났다.
테이크 어웨이의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잔잔하게 흐르는 엔딩롤.
주요 장면에 삽입되었던 OST가 메들리로 흐르는 가운데 스크린엔 촬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표시되고 있었다.
관객석은 이미 눈물바다로 변해 있었다.
액션 영화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시적인 미장센.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플랫이 연기한 주인공이 보여 준 기적 같은 연기.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다시 한번 무기를 든 아버지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고, 결말은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이 관객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엔딩롤이 멈춘 다음 한참이 지난 다음에도 관객석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흐흑….”
가족이란 무게를 짊어지고 걷던 남자에게서 소중한 것을 앗아간 범죄자들은 모두 업화 속에서 불타 없어졌다.
복수를 마친 가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죽은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온 사회가 정치적 올바름과 약자의 권리만을 부르짖으며 짓누른 탓에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던 남성성을 대변하는 듯한, 모두가 원해 왔던 아버지의 큰 등.
비록 창작물의 등장인물이라고는 해도 관객들은 자신들이 그리워하면서도 잊고 있던 강인한 뒷모습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점점 퇴색되어 가는 가족의 의미와 그 따뜻함을 결여를 통해 보여 주는 매스터한트의 역설적인 시점은 천재의 이름이 아깝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왕년의 천재 아역이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찍은 상업 복귀작을 볼 생각으로 시사회를 찾았던 이들 역시도 영화가 지닌 깊이에 충격을 받아 연신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김지안도, 김지안의 선배 은행원이자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뛰어난 실적을 보이는 영화광 프레드도 동시에 직감했다.
자신들이 방금 관람한 영화가 걸작이라고.
가장 중요한 액션부터 사소한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연기로 빚어낸 캐릭터와 그 감정선, 거기에 단단한 서사까지.
큰 것을 욕심내거나 특정 배우 하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를 도구 삼아 이야기를 보여 준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다룬 결과 완성된 작품이었다.
어두운 과거를 딛고 일어났지만 상실로 인해 복수의 늪에 빠져들게 되는 비극적인 영웅 서사는 왕도 그 자체였지만 장면을 구성하는 요소와 그 조합 방식은 감각적인 세련미와 절제를 통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밸런스로 마무리 지어졌다.
이 부분은 틀림없이 감독의 천재적인 스토리텔링 능력과 장면 구성이 이루어 낸 쾌거.
단순히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고 가능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시 매스터한트 감독이야….”
관객석 한복판에 앉아 있던 김지안의 입에서도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한편 그 옆에 앉은 밀라는 여전히 엉엉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김지안은 뒤늦게 밀라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챙겨 두었던 손수건을 건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구매해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챙겨왔는데, 바로 사용할 곳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킁. 고마워요, 오빠.”
밀라는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고 김지안이 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았다.
거뭇거뭇한 다크엘프의 눈화장이 손수건에 번지고 있었지만 어차피 남에게 빌려줄 목적으로 가져왔던 물건이었다 보니 김지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밀라가 우는 사이 전방에 앉아 있던 여신들을 주시했다.
과연 피조물이 만들어 낸 걸작이 창조자들의 심금을 건드릴 수 있을지 호기심이 든 까닭이었다.
그리고 김지안은 보았다.
“푸엑취. 아, 울다 코 다 막혔어.”
“훌륭하군. 브라보. 역시 아폴로 오라버님이 인정한 재목이야. 로렐트리의 미래를 맡길 만하군.”
플루토와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상기된 얼굴로 회색으로 돌아간 스크린을 주시하며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른 광경이었다.
인격을 지니고 있다 해도 신은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다.
당연히 그만큼 감정도 무디어졌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신들에겐 피조물들이 보여 주는 모든 행동이 이미 익숙한 것이고 수천 번은 넘게 보아온 것일 테니까.
그런데, 신들조차 사람이 만든 작품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이야.
정확히는, 울고 있는 건 플루토뿐이고 오커스 쪽은 평상심을 유지하는 중이긴 하다만.
‘망각이란 개념이 없는 신조차 감동하게 만들기 위해선 기존에 그들이 보아온 것을 토대로 신선한 변주를 주어야 했을 텐데.’
영화를 만드는 데에 관여한 게 아닌 이상 김지안이 작품에 깃든 철학과 감독의 의도를 전부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큰 수확이 있었다.
‘영화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대화로도 충분히 신의 호감을 사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
한 가지 확신이 김지안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지금이라면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을 상대로 이것저것 어려운 질문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진심은 신에게도 닿는다는 말,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두 여신이 한낱 피조물의 작품을 보고 저렇게나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고 나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본점에서 일할 수만 있다면, 언젠가 행장님께 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야.’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신화에 등장하는, 오만하고 피조물의 사정 따위 개의치 않는 그런 유형의 신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창조해 낸 피조물 사이에 섞여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범차원 세계의 신들은 퍽이나 ‘사람다운’ 면이 진했다.
여태까진 신들이 애써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실제로 자신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저들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김지안은 이전까지 스스로가 색안경을 끼고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안에게 있어 눈을 바꿔치기 당하는 꿈을 꾸게 된 건 인생의 흐름을 틀어 버린, 하나의 분기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 일로 인해 삶이 틀어져 버린 이상 상세한 설명을 들은 자격 정도는 있을 거라고, 김지안은 생각했다.
상대가 신이고 나발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에겐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의무가 있다.
김지안은 그런 의념을 담아 조용히 오커스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옆에 있던 밀라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김지안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의 완벽함에 찬사를 보낼 뿐.
시사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김지안은 여전히 앞줄에 앉은 여신에게 볼일이 남아 있었고.
잠시 김지안을 향해 고개를 돌린 오커스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 * *
“여운 미쳤네….”
상영이 끝나고 시작된 사인회.
김지안과 밀라는 각각 지참하고 있던 시사회 티켓과 진행 요원이 나눠 준 영화 포스터를 들고 줄을 섰다.
“아니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티슈 챙겨오는 거였는데….”
밀라는 부랴부랴 화장실로 달려가 번진 눈화장을 고친 다음 내 옆에 딱 붙었다.
녀석의 몸이 너무 작은지라 줄 선 덩치 큰 사람들에게 눌려 찌그러지지 않도록 의도치 않게 어깨를 감싸야만 했다.
덕분에 밀라가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는 모양새가 되었는데 샴푸 향기가 코를 타고 뇌를 직접 헤집고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 진짜 조그맣네.’
이 정도 뇌용량으로 어떻게 인사부의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는 걸까.
이렇게 보니까 사람의 몸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
머리통 크기만 보면 컴퓨터 본체보다 훨씬 작은데 성능을 따지고 보면 같은 크기의 기계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속으로 정보를 입출력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지 않는가.
“…….”
밀착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좀 이 녀석이 이성으로 보여 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야, 너무 붙지 마.”
“아니. 오빠, 이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사방에서 떠밀려서….”
“으음.”
일단은 영화 내용을 떠올리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지금 중요한 건 플랫 씨와 매스터한트 감독에게 사인을 받고 짧게라도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시사회가 끝난 다음 둘에게 나와 사적으로 얘기할 시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할 말이 있다면 지금 미리 마쳐 둬야겠지.
나중에 메시지를 보낼 수야 있겠지만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눈을 보고 해야 예의가 아닌가.
무려 전용기까지 보내서 린딘으로 데려다주고 푹 쉬다 가라고 호텔까지 잡아 주셨는데.
일개 행원인 내가 당연한 업무를 처리한 결과 이렇게 사치스러운 대접을 받는 건 조금 어색하다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이건 평생 살아도 경험할 일이 없는 호사가 아닌가.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 뭐라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은행원 외에 줄 서고 있는 다른 회사 사람들로 추정되는 참석자들을 보니 죄다 손에 한가득 선물을 들고 있었다.
플랫 씨와 매스터한트 감독, 그리고 스태프들을 위해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한 사람도 있고 두툼한 손편지를 가져온 사람도 보인다.
심지어는 한눈에 비싼 걸 알아볼 수 있는 고급 샴페인을 어떻게 가져온 건진 몰라도 얼음이 잔뜩 담긴 양동이에 담가서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저걸 선물하기 위해 비슈티 과장이 사용하는 아차원 격납고 같은 마도공학 기술이 응용된 가방 같은 걸 사용한 모양이었는데 시사회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의 우상에게 깊은 인상을 주겠다고 칼을 갈고 나온 게 느껴졌다.
반면, 차원신용금고는 투자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굳이 선물을 들고 오지 말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나도 그렇고 다른 행원들도 뭔가 가져온 게 따로 없었다.
“아.”
정정.
자세히 보니 다른 행원들이 알아서 선두를 양보한 행장님과 다른 고위 임원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비싼 물건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윤택이 반들반들한 고급 종이봉투.
“저 양반들 진짜….”
나는 그제야 임원진의 진의를 깨달았다. 그게 정말로 오커스 행장의 의사일진 모르겠지만 최소 이사회의 결정인 건 틀림없었다.
“지들만 얼굴도장 찍으려고 선물 잔뜩 사 왔네. 징하다, 아이고.”
“아하하…. 이사들이 다 그렇죠.”
내 말을 듣고 밀라가 힘없이 웃었다.
공은 상사의 것, 책임은 부하의 것.
은행의 악습을 나타내는 한 문장이 오늘만큼은 머리보단 가슴에 더 가까이 와닿는 기분이었다.
“에휴, 됐다. 그냥 감사하다고 인사나 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리길 어언 15분.
마침내 나와 밀라가 사인을 받기 위해 티켓과 포스터를 들고 플랫 씨의 앞에 섰다.
그런데, 먼저 감사하다고 인사를 꺼내려고 한 그때.
-덜컥
“엉?”
플랫 씨와 매스터한트 감독이 사인회 중 처음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