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79화
“미치겠네….”
이사회를 대동한 행장님이 나타난 다음 곧바로 상영관이 개방되며 은행원과 다른 시사회 참석자들이 밀물처럼 안으로 들이닥쳤다.
질서정연하지만 신속하게, 은행원이 아닌 참석자들 역시 하나의 조직에 속해 사회생활을 하는 자들로 보였다.
차원신용금고가 이번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출자한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다만, 딱히 오늘이 투자자 전용 시사회라고 들은 적은 없던지라 시사회에 참석한 다른 기업 관계자 역시 투자사 중 한 곳에서 온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아닌가? 진짜 투자자 전용 시사회였던 건가….”
그냥 시사회라고만 들은지라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기에 판단 자체가 불가능.
일단은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밀라의 팔을 꼭 잡고 영화관 안으로 빠르게 걸어가 내 이름이 적힌 좌석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은 영화 보러 온 거지 행장님이랑 다른 높으신 분들 눈치 보러 온 게 아니다.
복장까지 은행원스럽게 단정하게 하고 왔으면 됐지, 플랫 씨에게 초대받아 문화생활 좀 오랜만에 해 보겠다는데 남의 시선까지 일일이 신경 쓸 시간은 없다.
“와. 누워서 영화 볼 수 있나 봐요.”
“오….”
통로를 지나 스크린 앞줄에서 좌석을 확인한 밀라와 나의 입에서 거진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냥 IMAX관인 줄 알았는데 계단식으로 배치된 좌석은 전부 침대처럼 누워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각 좌석에는 가벼운 웰컴 드링크까지 준비되어 있었고.
“여기 영화관에 이런 상영관 없던 거 같은데.”
“몇 달 전에 공사하던 게 이거 설치하느라 그랬나 봐요.”
“아하.”
나는 린딘에 잠깐 들를 때마다 동기들과 밥을 먹긴 했지만 극장에 같이 간 적은 없었다.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근무하던 시절 이따금 주말에 영화 보러 들렀던 곳인데, 안 본 사이에 여기도 많이 변한 모양이다.
하긴 아까 밖에서 대기할 때만 해도 예전엔 안 보이던 특이한 아이스크림 자판기나 얼어붙은 콜라 슬러시를 파는 자판기가 생겨서 왠지 모르게 설렜지.
차마 상사들 보는 앞이라 뽑아 먹진 못했는데 플랫 씨가 린딘 들른 김에 푹 쉬고 가라고 호텔도 2박 3일 잡아 줬으니까 뭐, 내일 다시 와서 영화나 한 편 더 보면서 저것도 한번 먹어 봐야겠다.
아이작 녀석이 약혼자를 데려온 게 아니었으면 동기들끼리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과타노차 녀석의 퇴사가 가까워진 이상 미리미리 다섯이서 기회 될 때마다 만나두지 않으면 나중엔 모이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디 보자, H-6번이랑 7번…. 찾았다!”
밀라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올라가 보니 딱 우리 자리가 상영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어째 가장 좋은 자리를 받아 버린 것 같아 머쓱해져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자리에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누울 수 있는 좌석이지만, 아무래도 영화가 상영되기 전까진 윗사람들이 보고 괜히 건방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이 들어서였다.
“오. 대리님. 안녕?”
내가 걱정했던 대로, 앞 좌석에 곧바로 ‘높으신 분’께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 플루토 씨.”
“대리님 여자친구야? 예쁘네.”
“…….”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나도 밀라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플루토 디스파테르의 파트너는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러니까, 차원신용금고를 이끄는 은행장인 오커스 디스파테르 말이다.
“오커스 행장님 안녕하십니까. 김지안 대리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부 밀라 레브리에 대리입니다.”
우리 바로 앞자리에 앉은 오커스 은행장은 이쪽을 보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얘긴 밀라와 엘라마에게서 자주 듣고 있네. 출장소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지. 그쪽 인사부 레브리에 대리도 1층에서 저번에 만났던가?”
“과찬이십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의도한 건 아니야. 단지 우리 종족에게 망각이란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둘은 상당한 선남선녀가 아닌가. 잘 어울리는군.”
나도 밀라도 걷잡을 수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무어라 부정하려 해도 상대는 은행장이자 신.
함부로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건방지게 말대꾸나 한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진짜로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난 여신님께서 무슨 선남선녀 같은 단어로 외모 얘길 하니까 그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밀라도 예쁘긴 한데 오커스 행장이나 그 여동생인 플루토는 의식 안 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진짜 우리 같은 일반 피조물하곤 차원이 다를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다.
너무 초월적이라서 저열한 욕망 따위 생겨나지도 않을 정도로.
그런 사람, 아니 신들이 이런 얘기를 꺼낸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나도 밀라도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시사회 데려올 파트너라는 게 설마 행장님일 줄이야.’
문득 공항 면세점에서 플루토가 던진 퀴즈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맞추라는 거야.
그야 엘라마가 가족을 데려와도 된다고 했지만 플루토가 친언니를 데려올 줄 내가 어찌 알란 말인가.
슬쩍 플루토를 쳐다보자 예상대로 나를 보고 실실 웃고 있었다.
하여튼 평소 분신 만들어서 업무 보느라 스트레스 많이 쌓이는 건 알겠는데, 동시에 분신으로 스트레스 해소 매번 제대로 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남 골탕 먹여서 재미 보는 일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어쨌든, 인사를 다음엔 마친 행장님도 플루토 씨도 앞을 쳐다보고 있어서 별 대화가 없었다.
하이에나처럼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은행장에게 말을 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부 행원들과 임원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히는데 따가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
플랫 씨와 매스터한트 감독이야 나한테 좋은 자리를 주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배치해 준 거겠지만 입행 2년 차 일개 대리 나부랭이에겐 행장님 뒷자리는 너무나도 과분했다.
밀라 역시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크린 앞에 스태프가 의자를 두고 그 옆에 미네랄워터를 한 병씩 두자 이윽고 사람들은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팟!
객석의 불이 꺼지고 밝은 조명이 스크린과 그 앞의 비좁은 공간을 비추었다.
상영관 측면의 문을 열고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
그리고 그의 신작 액션 영화 테이크 어웨이의 주연 배우, 플랫 샤펜도라였다.
두 사람은 스태프에게 마이크를 건네받고 정중히 관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마쳤다.
시사회를 시작하기 앞서 사회자와 두 사람이 간단히 영화를 소개하는 겸 5분가량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예정된 프로그램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너무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한지라 두 사람은 간단히 자기소개와 작품의 컨셉만을 이야기한 다음 인사를 마쳤다.
테이크 어웨이는 소중한 것을 빼앗긴 아버지가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한 번 버렸던 과거의 모습을 되찾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지상에 강림한 남신이라고 말해도 믿어질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갖춘 플랫이 좌중을 둘러볼 때마다 여기저기서 여성들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 왔다.
평소 사진와 영상으로만 플랫 샤펜도라를 접해 왔던 이들 중 상당수가 실물을 영접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플랫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스터한트 감독을 향한 시선 역시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는 영화의 악마라고 불리며 금세기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 일컬어지는 감독이자 12차원 올림포스에 위치한 예술의 도시 로렐트리의 주인인 아폴론이 총애하는 예술가.
당연히, 이 자리에 모인 인원들 중에도 감독의 작품을 사랑하고 그를 경애하는 팬들이 차고 넘쳤다.
-찰칵!!!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
평소 그를 볼 수 있는 곳은 시상식이나 단골 음식점, 혹은 시사회뿐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기회는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 터.
그렇게 판단한 참석자들은 쉬지 않고 카메라 촬영을 이어 갔다.
영화 매니아가 아니더라도 군침이 도는 한 컷.
천재 감독과, 과거 천재 아역으로 이름을 알리다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려 하는 중고 신인.
세컨드 핸드가 아닌 빈티지.
잘 숙성된 위스키와 같은 미중년의 향기를 두르고 무대 위로 복귀한 플랫은 뭇 여심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 온화하고도 강인한 아버지의 모습을 남자들에게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그가 지닌 건 이미지만이 아니다.
복귀 소식이 알려진 직후 몇몇 연예 매체는 공백기가 길었다는 이유로 플랫의 실력에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그런 이야기는 사라졌다.
플랫이 아역을 그만둔 이후 다른 이름을 사용해 예술 영화 감독인 아내와 촬영해 몇 번이나 시상식에 이름을 올린 작품들이 차례차례 발굴되며 그 연기력이 빛이 바래긴커녕 더욱 완벽해졌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까닭이었다.
플랫 샤펜도라라는 배우가 복귀 후 첫 작품이 아직 극장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특정 성별이나 연령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으며 여러 예능 프로그램 등에 불려 나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타고난 외모 외에도 플랫의 실력과 인격, 그리고 가정적인 면모까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매력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이들의 눈에는 아버지, 학생들에게는 삼촌, 사회 초년생에겐 롤 모델, 동년배들에게는 모범적인 친구, 장년에게는 최고의 사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행복을 찾아 떠났지만 가정을 위해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돌아온 그의 서사는 기적과도 같았고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그 행보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 사진은 시사회가 끝난 다음에도 찍을 수 있으니 일단은 다음 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촬영이 이어진 탓에 사회자가 나서서 열렬한 현장의 반응을 가라앉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기다리고 계시던 ‘테이크 어웨이’의 상영이 있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플랫과 매스터한트 감독은 미소 띤 얼굴로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리로 이동하기 전, 둘의 시선은 동시에 어두워진 객석 정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김지안의 자리.
플랫은 작게 윙크를 했다.
김지안이 그것을 보았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도 플랫의 마음속은 김지안을 향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르게네프 감독과 플랫은 맨 앞줄에 준비되어 있던 그들의 자리에 앉아 편안한 얼굴로 다리를 꼬았다.
“아역 그만두었던 시절엔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플랫 씨랑 명작 찍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신세 진 분들에겐 가능한 만큼 보답하며 살아갈 생각입니다.”
“동감이야. 쉿. 시작한다.”
모든 조명이 꺼지고 영사기가 스크린에 빛을 쏘아냈다.
그렇게 시사회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