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6화
이른 아침, 필로아는 혼자 집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키나의 삼촌인가 하는 사람과 만난 지 2주가 조금 넘었다.
그 이후로 마키나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긴 했다.
그래서, 필로아는 마키나의 돌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길 꺼내는 거지.”
필로아는 베개에 얼굴을 폭 하고 묻었다.
‘같이, 여행을 가지 않으시렵니까.’
어제 마키나가 갑자기 이상한 얘길 꺼냈다.
‘여행…?’
‘네. 단둘이서요. 린딘에 오랜만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어… 린딘은 왜?’
‘사실 어디든 괜찮긴 합니다. 필로아와 함께 갈 수 있다면.’
‘…….’
어젯밤, 그 이야기를 듣고 필로아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걱정 마십시오. 여행 경비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숙소도 각방으로 예약할 거고요. 수요일부터 주말까지 다녀올 생각 중인데, 일정은 비어 있으신가요? ’
‘수요일부터면 아무 예정 없긴 해.’
일단은 그렇게만 대답해 두었다.
수요일이면 벌써 내일이다.
당일 비행기 예약하려 하면 좌석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예약에 성공한다고 해도 값이 평소보다 비쌀 거다.
여행 경비야 자신도 돈을 못 버는 게 아니라 같이 내도 상관없긴 한데, 마키나와 단둘이 다른 도시로 놀러 가다니.
“아, 어떡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천재라고 칭송을 받는 5세 여아 필로아였지만 현실에서 마주친 지극히 단순한 유형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엔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교제 중인 상대와 여행을 가다니. 숙소야 각자 다른 방을 사용한다 해도 이건 그야말로 오래전부터 드라마 등에서 보아온 연인들의 생활이 아닌가.
심지어 린딘이라면 그레이트 후리텐의 수도이자 후리텐이 바다를 지배하던 대제국이었던 시절부터 금융의 중심으로 불리던 대도시가 아닌가.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살다 키키와이로 옮겨온 필로아에게 있어 린딘은 한 번쯤 들러 보고 싶은 곳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계속 언제 갈지 기회를 찾아 벼르고 있었는데, 설마 첫 방문을 마키나와 함께하게 될 줄이야.
“언제 연락하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 따윈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나.
만일 평범한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다면 부모가 동행하겠다고 나서거나 아이들이 단둘이서 여행 가는 건 위험하다면서 극구 만류했겠지만 필로아는 부모님이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필로아가 마키나를 따라 린딘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마키나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제 새로운 부모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필로아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마키나는 난민의 신원 보증을 맡아 준 두 분을 양부모처럼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다. 이건 필로아가 그렇게도 꿈꾸던―
“…상견례구나. 와아.”
필로아의 조막만 한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상기되었다.
생각도 못 했다. 이렇게나 일찍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줄 줄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좋은 사람이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결혼까진 고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필로아는 특별한 아이였다.
필로아는 이미 남들보다 최소 10여 년은 먼저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보아왔다.
아이가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은 이미 20대 대학생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
대학 생활 중 마주친 학생이나 교수는 물론 대기업과 계약해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비즈니스 미팅 등에서 마주친 갖가지 인간군상은 사람들의 저열한 악의와 호의를 구분하는 방법을 필로아에게 알려 주었고, 필로아는 자신의 경험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적절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기준에 비추었을 때, 마키나는 너무나도 올바르고 훌륭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고 필로아와 이야기가 통했으며 취향 역시 비슷했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마키나는 이따금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구석을 보여 의지하고 기댈 언덕이 되어 주었다.
마키나의 투명하고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물처럼 고요하고 맑은 그 영혼의 편린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키나는 진솔했고 필로아를 사랑했다.
만에 하나 마키나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그건 분명 자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의 결과일 거라고, 필로아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미 필로아는 마키나를 끝까지 믿기로 정했다.
만난 시간이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둘은 그동안 어지간한 어른들의 연애보다 훨씬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고 서로를 향한 헌신과 책임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의 관계는 요즘 들어 세상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인스턴트식의 가벼운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가면 분명….”
마키나가 예전부터 자주 언급하던 양부모와도 같은 두 사람에게 자신을 어떤 식으로 소개해 줄지 벌써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라고 말해 줄까, 아니면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라고 말해 주려나.
필로아는 베개에 얼굴을 더욱 깊숙하게 파묻고 다리를 바동대기 시작했다.
“아아악!!”
얼굴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내지른 비명은 다행히 옆집에 들릴 정도로 크진 않았다.
마키나에게 대답은 미룬 건 어디까지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필로아의 속마음은 진즉에 고개를 연신 열두 번은 끄덕이고도 남았다.
“아아, 어떡하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필로아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두근대는 데에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하루 전에 일정을 확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타다다다닥
필로아의 손가락이 액정 위에서 민첩하게 춤을 추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했다.
<갈게. 린딘. 마키나랑 가고 싶었어.>
-꾹
필로아는 기어코 메시지를 전송했다.
돌이킬 수 없는 여정에 대한 불안감 따윈 없었다.
필로아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건 그저, 마키나가 대답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을까 봐 미안해하는 마음뿐이었다.
* * *
다음 날, 두 아이는 항공기 퍼스트 클래스를 타고 린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필로아가 자신이 경비를 대겠다고 굳이 말했지만 마키나는 듣지 않았다.
필로아는 마키나 역시 우수한 프로그래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벌이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솔직히 나이가 두 살 많고 다양한 곳에서 경력을 인정받은 자신이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무엇보다, 마키나는 난민이 아닌가.
아무리 우수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도 사회는 난민에게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필로아는 만일 장래 마키나가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먹여 살릴 각오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마키나가 여행 경비를 자신이 내겠다고 했을 때 말리고 송금을 시도했건만.
공항에서 마주친 마키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통장 잔고를 공개했고 그곳엔 필로아가 처음 보는 액수의 금액이 찍혀 있었다.
‘0이 몇 개지….’
‘돈 걱정은 마시죠. 요즘 괜찮은 일거리를 맡고 있는지라.’
마키나의 성격상 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만 괜스레 돈의 출처가 걱정되고 불안해진 필로아였다.
지금까지 마키나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까도 까도 모르는 비밀이 나오고 있어 필로아는 적잖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처음 타보는 퍼스트 클래스는 대단히 인상 깊었다.
“와아. 의자 진짜 폭신해….”
“항공기를 타는 건 두 번째지만 필로아하고 타는 건 처음이잖아요. 가능한 한 좋은 좌석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필로아는 감동해 말을 잇지 못했다.
마키나가 자신을 위해 사용한 돈의 액수에 감동한 게 아니었다.
이미 마키나와 여행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항공기 옆좌석에 그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워 무어라 기분을 형용할 수 없었다.
‘나들이라면 몇 번인가 갔지만 여행은 이게 처음이니까….’
반드시 마키나와 좋은 추억을 만들고 키키와이로 돌아가겠다고, 필로아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마키나는 그런 필로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약간은 어색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미소를.
“미안해요, 필로아.”
“음? 갑자기?”
들뜬 나머지 필로아는 마키나가 왜 자신에게 사과를 건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마키나가 무슨 계획을 세워 두었는지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도착했습니다.>
린딘의 특급 호텔에서 매스터한트 감독과 함께 계획의 세부를 마지막까지 조정하고 있던 내게 도착을 알리는 마키나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시작이군요.”
“슬슬 출발하죠.”
나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신호로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장비를 갖추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린딘의 거리를 촬영용 차량을 타고 질주한 우리의 목적지는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으슥한 골목.
중심가를 걷다가 5분 정도만 헤매면 도달하게 되는 이곳에선 통행 중인 차량도 행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이곳을 영화 촬영에 사용한다는 공문이 내려왔고 사복의 관계자들이 통행을 제한하고 있는 데에다, 구경하려 하는 시민들은 이미 더 큰 장면을 촬영한다고 알려진 다른 구역으로 몰려간 덕이었다.
이 구역에선 예고된 촬영 시간이 짧은 데에다 근처에 다른 볼거리가 많으니 우연이라고 해도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우린 폭약과 원격 운전 시스템을 탑재한 자동차 등을 사전에 준비해 두었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남은 건 마키나와 필로아의 도착을 기다리는 것뿐.
<도착 5분 전.>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 도래했다.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오케이, 전원 스탠바이.”
“소도구와 대도구 전부 준비 마쳤습니다.”
“야간 조명 준비 오케이.”
“분장 팀 대기 완료.”
“대여한 구급차는?”
“1분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필로아를 설득하기 위해서 준비된 무대.
“이젠 주연만 잘해 주면 되겠군.”
이젠 정말로 마키나의 연기력에 모든 것이 달렸다.
* * *
필로아는 마키나의 손을 잡고 번화가를 걸었다.
밤거리를 환히 비추는 일루미네이션과 거리를 오가는 낯선 사람들. 린딘의 중심가는 자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밤을 지새울 땐 상상도 못 하던 대도시의 풍경.
기분 좋은 색깔로 반짝이는 불빛의 샤워에 들뜬 나머지 필로아와 마키나는 길을 잃고 으슥한 골목에 도달하게 되었다.
두 아이는 돌아갈 길을 찾아 헤맸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에는 표지판이 없었기에.
어떻게 큰길로 돌아갈 순 없을까.
필로아가 고민하던 그때.
저 멀리서, 느닷없이 라이트도 켜지 않은 자동차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