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4화 (16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4화

2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물론 그동안 내가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다.

계획의 전모를 알고 있는 나와 마키나는 2주일 동안 치밀한 노력을 다했다.

나는 매스터한트 감독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린딘에서 벌일 계획의 디테일을 다듬으며 세부적인 사항을 조정했고, 마키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필로아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틈틈이 신작 영화 홍보를 위해 범차원 세계를 돌아다니는 플랫 씨에게 원격으로 연기 강의를 받았다.

고가의 홀로그램 장비를 사용해 교신하고 있는지라 마키나는 정말로 대배우 플랫 샤펜도라가 곁에서 지도해 주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고 덕분에 그 형편없는 거짓말과 연기 실력은 플랫 씨의 디테일을 흡수해 빠르게 나아지고 있었다.

‘사람이든 인공 지능이든 상관없습니다. 바로 아역 배우로 데뷔시킵시다.’

개인 레슨을 시작한 지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 플랫 씨가 대뜸 점심시간에 전화해서는 내게 이런 소리를 하길래 농담인가 싶었는데 굳이 영상통화를 걸어 진짜 맑은 눈으로 말하길래 광기가 느껴져 통화를 끊을 뻔했다.

“마키나가 대단하긴 하구나.”

하긴, 배우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나 기타 노하우를 빠르게 흡수해 따라 하는 게 가능하니까 초고성능 인공 지능이라는 거겠지.

이젠 마키나가 내게 거짓말을 해도 알아차릴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그래, 살아 있는 한 거짓말도 할 수 있지.

연기를 배운다고 해서 마키나의 선한 천성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남은 건, 마키나가 필로아에게 린딘 여행에 관해 말하는 건데….”

마키나는 필로아의 스케줄을 이미 전부 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용무가 생길 일도 없고, 필로아 또한 업무 때문에 계속 집에 갇혀 있어 심심하다고 말했다고 하니 마키나가 돌발적으로 나들이나 가자고 해도 긍정적일 반응을 보일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든 여행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이미 숙소도 따로 잡아두었다는 걸 알려 주면 마지못해 좋다고 대답하겠죠.’

분명 사흘 전에 그렇게 말했는데, 어찌 된 게 아직까지도 답장이 없다.

양부모님을 소개해 드리겠다고 마키나가 말할 생각이라는데, 만일 필로아가 마키나와의 관계를 정말로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승낙하겠지.

아니, 어쩌면 역으로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으음….”

사실 어느 쪽이든 예상이 안 되긴 한다.

상대는 성인이 아닌 네다섯 살 먹은 꼬마 아이. 마키나도 육체 연령은 3세 아동이다.

단지 둘 다 또래보다 훠어어얼씬 조숙할 뿐.

“이렇게 된 이상 잘되길 기도하고 있을 수밖에 없으려나.”

뭐, 다 좋은데 기도를 할 때에도 어느 신에게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내 속내였다.

-부우웅

그때였다.

책상에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해냈습니다.>

발신인은 마키나. 짧은 한 줄의 문자가 녀석의 기쁨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월차 취소 안 해도 되겠네.”

나는 곧바로 가방을 꺼내 여행 짐을 싸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택시를 타고 키키와이 차원 공항으로 향했다.

후리텐과 키키와이를 잇는 직통 항공편은 하루에 네 번 운행하는데 마키나와 필로아는 점심 비행기를 타고 출발할 예정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같은 항공편에 동승했다가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면 필로아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일찍 출발하자는 게 내 결론이었다.

마키나에게 먼저 가 있겠다고 연락을 마친 다음 체크인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

후리텐은 같은 4-2차원에 있어서 굳이 차원 장벽을 넘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차원 항공기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갈 때 맛보게 되는 그 기묘한 감각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건투를 빕니다.>

스마트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기 전에 확인한 메시지 어플에는 플랫 씨의 응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 외에도 언제 마키나와 필로아가 도착하냐고 닦달하는 과타노차의 메시지와 스케줄에 관해 논의하는 매스터한트 감독의 메시지, 그리고 마키나와 녀석의 걸 프렌드를 볼 수 있어서 기뻐하는 델 몬테 지점장님의 메시지까지.

“괜히 질투 나네.”

어? 내가 말이지 어? 저 나이에 주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도와줬다면 어? 분명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거다.

“복 받은 녀석 같으니라고.”

뭐, 이것도 다 개개인의 행운이다.

지금은 그냥 아비아노 대 바리타스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공작과 차원신용금고의 전산망 관리 업무로 인해 잠시나마 황폐해졌던 마키나의 심장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밝히고 받아들여짐으로써 치유되고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되길 바라기만 하면 된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어째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묻는다면, 그야 할 말이 없긴 한데.

“…….”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 되진 않지만 마키나는 내게 있어 친동생 같은 녀석이다.

마키나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부모 없이 자라야만 했던 점은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고 녀석이 이른 시기부터 행복해지길 원하고 있었다.

마키나 녀석이 행복해지는 걸 보게 되면.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내가, 여전히 이따금 내 안에서 울고 있는 그 녀석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동기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만일 그렇다 해도 내겐 면죄부가 있다.

당장 필로아와 일찍부터 백년해로하는 것을 마키나가 원하고 있지 않은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같은 동네 사는 친한 형으로서, 델 몬테 지점장님에게 마키나를 부탁받은 사람으로서, 어?

나설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와중 비행기가 이륙했다.

기내식 한 접시를 처리한 나는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 안대를 쓰고 의자를 눕혔다.

이코노미가 아니라 비즈니스석 예약해 두길 정말 잘했다.

다리가 저리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일 줄이야.

* * *

린딘에 도착했을 땐 시계가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은 기내식을 먹은 거론 조금 모자란 것 같아 공항에서 적당히 면 요리를 주문해 5분 내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도착해서 짐을 챙겼다고 연락하자 진즉에 공항에 도착해 있던 매스터한트 감독의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다.

어쩌면 이들에겐 이번 촬영이 사적인 일을 위해 감독이 권한을 남용한 거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단한 인사를 제외하곤 차에 타고 있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는데 뜻밖에도 저쪽이 먼저 유쾌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걸어왔다.

“감독님이 처음에 이번 일에 관해 말해 주셨을 땐 드디어 미쳐 버린 게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하하하.”

“아… 다 알고 계셨군요.”

“그럼요. 사적으론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인데요, 뭘.”

“그러셨구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대 밖에 이야기 흘러가지 않을 거고 저희도 촬영 스태프라든지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작업하는 일 없이 푹 쉴 거라서 말이죠. 감독님께서 특별 수당은 물론 입막음 비용이라고 용돈까지 다 챙겨 주셨거든요.”

“와….”

괜히 매스터한트 감독에게 미안해짐과 동시에 그의 씀씀이가 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가 감독님께 빚을 지게 되었군요.”

“에이, 아닙니다. 감독님은 플랫 샤펜도라가 자기 최신작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도록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김지안 대리님한테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 양반은 누굴 위해 손해 보는 타입 아닙니다. 아마도 이번 일도 어떻게든 직접 촬영하든 촬영한 장면을 바탕으로 배우에게 연기를 시키든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써먹으려 하실 거예요.”

“네? 그게 대체 무슨….”

“영혼을 가진 인공 지능과 인간 소녀의 로맨스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실화를 배경으로 한 창작 스토리에 딱인 걸요. 마키나 군과 필로아 양이라고 했습니까? 그 아이들. 감독님께서 나중에 둘을 찾아가 판권을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마키나 군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받은 다음에야 가능하겠지만요.”

“아아… 그런 뜻이었군요.”

어쩐지, 너무 요구를 쉽게 받아들인다 싶었다.

저런 속셈이 있었구나.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사내다.

“대리님도 방심하지 마세요. 형님, 아니 감독님이 상당히 탐내고 계시거든요. 나중에 단역으로라도 출연 부탁드릴지도 모릅니다.”

“어… 그건 좀 곤란할지도 모르겠군요. 홍보 부서랑 윗분들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지라. 아무래도 은행이 좀 보수적인 곳이잖아요?”

“흐음. 보수적이었군요. 플랫 씨를 도와주는 걸 보고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행장님인가 그분도 대단하시던걸요? 예술인 전용 대출, 플랫론인가 이름 지으셨던 거 같은데.”

나와 마주 보고 있던 사내가 말하자 운전 중이던 직원이 나와 동시에 실소를 터뜨렸다.

노렸구만. 농에 도가 튼 사람이다.

긴장 풀어 주려고 일부러 저렇게 살갑게 농담도 건네는 모양인데, 나로선 정말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마 감독이 나를 배우로 기용하고 싶다는 건 그냥 대충 지금 지어낸 헛소리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부채 의식을 지니지 말라고 일부러 저런 얘기를 해 주는 거겠지.

아무리 영혼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인공 지능인 마키나가 법정에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게 그렇게 쉬울 리 없다.

만일 거기까지 내다보고, 될 거란 가능성에 도박을 걸고 선행투자 삼아 두 아이의 관계를 응원한 거라면.

그건 정말로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라는 남자가 대담하고 그릇이 크다는 뜻이겠지.

“…음?”

생각해 보니 감독은 예술의 신 아폴론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지 않나.

어쩌면 그만한 그릇이 되니까 신도 그를 선택한 게 아닌가 싶기도….

뭐, 이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머진 마키나와 필로아의 관계가 잘 풀리고 나서 감독이 그 두 아이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니까.

“도착했습니다.”

나는 두 시간 내내 차를 타고 달려 도착한 호텔에 짐을 풀고 감독이 기다리고 있는 라운지로 향했다.

그곳에선 깨알 같은 글씨와 콘티로 보이는 그림이 가득한 스케치북을 펼친 매스터한트 감독과 스태프들의 모습이 있었다.

“프로듀서 선생님이 오셨군요.”

드워프 전용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받침대 위에 서서 내게 농을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깔끔하게 제모된, 작고 강인한 손.

악수한 두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감독님. 언젠가 제가 꼭 보답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걱정 마시죠. 그 기회는 아마 금방 찾아올 테니.”

나를 보고 매스터한트 감독이 작게 웃었다.

“아이들이 곧 린딘에 도착하겠군요. 결행일은 내일. 오늘은 최종적인 디테일을 점검한 다음 내일 완벽하게 ‘세트장’을 꾸며 봅시다.”

테이블에 앉은 나와 감독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문 분야의 스태프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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