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3화

청소년기의 방황과 성인이 되고 앓은 알코올 중독을 거쳐 기나긴 공백기를 이겨내고 스타덤에 돌아온 전직 천재 배우, 현직 가정적인 꽃중년 아버지 배우 플랫 샤펜도라.

그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과 영화감독으로 화려한 경력을 뽐내는 아내와 함께 오손도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현재 행복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되찾은 부유함으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유지되고 있음은 물론 딸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아름답게 성장해 갔다.

팔불출인 그로선 딸아이의 미모를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었지만 과거 자신이 아역으로 활약하던 당시 겪었던 일을 아이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SNS에 얼굴을 가린 사진을 올리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에겐 연기에 재능이 없었고 그쪽 분야에 대한 열정도 없었다.

그의 딸, 메릴리 샤펜도라는 음악과 무용에 타고난 소질을 지니고 있었기에 부부는 아이를 응원하기 위해 훌륭한 선생을 모시고 아이의 ‘취미 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아내의 활약 역시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플랫과 함께 단편 영화를 촬영하던 시절 단련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진짜 이름을 감추고 있었다 해도 플랫 샤펜도라는 희대의 명배우였고 그와 함께 계속해서 영화를 촬영해 온 감독은 실력은 다른 주연 배우와 합을 맞출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플랫의 아내라는 후광이 존재하기 전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제 등에서 실력을 입증해 왔으며 플랫의 암흑기를 지탱한 조강지처로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 섬세한 미장센을 단편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보여 주었던 그녀가 발표한 신작 로맨스 영화는 기어코 상업적 흥행에 성공하며 남편의 신작이 공개되기 전부터 엄청난 박스오피스 수익을 벌어들였다.

플랫 자신 역시 배우로서 쌓아 온 커리어가 다음 영역으로 진화하려는 중이었다.

이번 신작에서 그는 결혼 후 지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살이 찐 시절 예술 영화에서 주로 맡아온 인상이 포근한 중년 남성의 역할과 정반대의 노선을 가는 캐릭터를 연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마치고 몸을 만든 플랫은 스턴트 없이 어지간한 액션 씬을 소화하는 등 촬영장에서 나이가 무색해지는 활약을 펼쳤다.

운 역시 따랐는지 그 과정에서 흔한 사고 하나 일어나는 일이 없어 여타 작품의 촬영처럼 골절이나 부상으로 인한 촬영 스케줄의 지연 등의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처럼 복귀한 플랫의 연기력에 관한 논란은 그가 정체를 감추고 아내와 함께 찍은 예술 영화가 여러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자취를 감췄고 오히려 과거 찍은 작품과 함께 플랫의 실력이 나이와 함께 더욱 진보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시장은 플랫의 새로운 작품을 갈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아역은 이미 어엿한 미중년 아버지가 되어 있었고 소년 시절과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는 훌륭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다.

흔히들 서른이 넘으면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이 얼굴에 반영된다고 하는데 플랫의 경우 절망과 허무에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사나이의 지혜와 용기가 아우라처럼 특징적인 외모를 뒷받침해 주고 있었고, 이는 과거 그를 추종하던 팬에 더해 새로운 팬층의 유입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가 로렐트리의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과 합을 맞추며 찍은 영화는 2주 후 범차원 공개될 예정이었고 요 몇 달 동안 엄청난 예산을 들인 마케팅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었다.

단독 시사회와 무대 인사 등의 스케줄로 인해 바빴지만 플랫은 지금 이 시기를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가족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의 경제적 고민을 덜어 주고 딸아이에게 더욱 좋은 기회를 줄 수 있는 아버지.

자신의 꿈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느끼며 플랫은 계속해서 배우 업에 열정을 쏟았다.

오늘도 조금 전까지 매니저가 가져온 다른 신작 영화의 각본을 훑어본 참이었다.

이렇게 촬영과 오락 프로그램 출연을 비롯한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에도 플랫은 새로운 작품을 찾아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 신작의 흥행을 마음 깊은 곳에서 바라고 있었고, 또한 흥행이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가 상업 영화에 복귀한 다음 처음 촬영한 작품.

이번 작품으로 쌓은 새로운 커리어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경주마처럼 달릴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등에 탄 가족들에게 더욱 나은 미래를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겐 최대의 보람.

그다음이 지닌 재능을 맘껏 펼쳐 자신에게만 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늘상 이러한 사실을 머리와 마음에 새기며 자신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채찍질하고 있었기에, 플랫은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새로운 커리어의 출발점이 되어 준, 한 명의 은행원을.

“김지안 씨. 당신에겐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 저택의 홈 짐에 설치된 러닝머신 위에서 유산소 운동에 몰두하던 플랫이 벽에 걸린 신문 스크랩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마주친 한 명의 젊은 인간 은행원.

추레한 복장으로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살찌고 늙은 몸을 감춘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 준 그 사람.

만일 김지안이 다른 은행에서 마주친 행원들처럼 자신을 무시하고 대출 신청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자신이 누리는 생활은 영영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하더라도, 예술 영화만 찍으면서 아내와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플랫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플랫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은 사람들의 도움 위에 성립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김지안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일단은 자신을 도운 일로 엄청난 홍보 효과가 생겨나고 김지안도 출세 코스인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은행이 김지안의 실적을 평가한 결과다.

자신의 친우이자 오래된 배우 가문 출신인 슬리크 엘라마가 김지안을 직접 챙기고 있다지만 아직 자신이 직접 김지안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 적은 없다는 생각에 플랫은 마음이 괴로웠다.

“슬슬 스케줄도 비기 시작했는데, 이쪽이 먼저 연락을 취해 보는 게 낫겠지.”

남에게 진 신세를 갚지 않고는 못 사는 성격인 플랫은 스마트폰을 꺼내 김지안의 연락처를 검색했다.

지금이라면 멋진 스포츠카 한 대 정도는 우정과 호의의 징표로 선물할 수 있다.

이젠 사회 초년생이 아닌 어엿한 대리로서 은행에서도 실력을 평가받고 있다는데, 그렇다면 시계든 자가용이든 에이스의 위엄을 외적으로도 드러낼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어도 주위 사람들이 고깝게 보는 일은 없으리라.

“나중에 청탁이니 뭐니 곤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방법을 생각해야겠어.”

다만, 만에 하나 김지안이 자신에게 값이 나가는 선물을 받았다는 게 소문이 난다면 사람들은 결코 그 사실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선물은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김지안 대리와 자신만이 알아야만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플랫이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우우웅!

스마트폰이 진동을 토했다.

“음?”

채팅 어플을 통해 온 한 통의 메시지.

발신인은 김지안 대리였다.

* * *

“어우,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네.”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과 유명 배우이자 내가 담당한 첫 대출 안건의 주인공인 플랫 샤펜도라 씨.

두 사람과 연달아 통화를 마친 나는 기진맥진해진 몸을 침대에 누이고 복기를 시작했다.

“영화를 촬영한다는 이유로 거리 하나를 통째로 빌릴 수 있는 건 역시 이 사람 정도지….”

어려운 요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님께선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영화 촬영을 핑계로 후리텐의 수도 린딘의 으슥한 골목길 하나를 통째로 빌리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것은 내가 마키나와 필로아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연한 얘기지만 그 골목은 아이 둘과 이번 계획과 연관된 사람 외엔 누구도 출입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영화 촬영의 핑계로 길목 하나를 통째로 빌렸지만 그 길목이 정말로 영화에 등장할 일은 없다.

그냥 이건 감독님이 강짜를 놓아 어떻게든 내게 특혜를 주겠다는 거니까.

‘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뭐든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긴 했는데 남을 위해 그 기회를 허비하다니.’

매스터한트 감독은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로렐트리를 대표하는 감독이고 날 평범한 은행원에서 배우로 키워 줄 수 있는 사람인데, 정말 그 인맥을 인간이 아닌 인공 지능 꼬마의 사랑을 응원하는 데에 사용해도 문제가 없냐고 아예 대놓고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아무 문제 없다고 답했다.

마키나의 허락을 받았긴 했지만 남의 치명적인 비밀을 감독에게 밝혔으니 이번 연락을 통해 감독의 조력을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정말로 마키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수 효과를 위한 장치를 제외하면 조명이나 촬영 장비 같은 건 치워 둘 거고 필로아는 당일 린딘에 도착하니까 통행 금지에 관한 사실을 모를 테지.”

남은 건 마키나가 제대로 시나리오대로 민첩하게 움직이고 필요한 대사를 필로아에게 말하는 것뿐이다.

당연하지만 거짓말조차 할 줄 모르는 아기 인공 지능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알고 지내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마키나를 잘 도와줄 수 있는 자에게 연락했다.

그렇다, 천재 아역 배우 출신 로렐트리 스타인 플랫 샤펜도라 씨에게.

‘그런 일이라면 흔쾌히 돕겠습니다.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미 충분히 알아야 할 건 아는 아이들이고, 연기를 통해 진심을 전한다는 계획 자체가 아이러니해서 마음에 드는군요. 무엇보다, 남의 로맨스를 응원하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죠.’

그는 마키나의 상황에 관해 듣고선 두말없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설마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이런 부탁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엔 김지안 대리의 연애를 돕고 싶군요.’

뭐, 이런 얘기도 덧붙이긴 했지만.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까진 꼬꼬마들 사랑놀음 지켜보는 쪽이 내가 직접 연애하는 것보단 훨씬 즐거웠으니까.

“마키나라면 분명 잘 해내겠지.”

마키나는 이제부터 2주 동안 플랫 씨에게 연기 수업을 받은 다음 필로아를 린딘으로 불러들일 예정이다.

“의외로 나 이쪽 적성에 맞는 거려나.”

큰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마키나의 칭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뜻밖에도 드라마 프로듀서나 그쪽에 재능 있는 게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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