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6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2화

“무모하군요. 그리고, 부도덕하기까지. 이 정도로 더러운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 않아?”

“…그러네요.”

내 설명을 들은 마키나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저번엔 전쟁을 막는다는 대의가 있어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여간 뒷공작에 능하신 게 아니더라고요. 본점 간부들도 보면 혀를 내두를 겁니다.”

“내가 그 정도야?”

“네. 물론 디테일을 다른 분들이 다듬었긴 했다지만, 바리타스 제국 입장에서 김지안 대리를 보면 악마가 따로 없지 않을까요.”

“어….”

내가 큰 그림을 좀 그리긴 한다.

아무래도 전공이 미술 쪽이라서 그런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은행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연적으로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한다고.”

“그야 파벌이 셋이니 어지러운 것도 이해합니다만….”

마키나에겐 자세히 말한 적 없지만 여태껏 나는 인사부의 밀라나 과타노차에게 다양한 정보를 공급받으며 나름 처신에 힘쓰고 있었다.

물론 그게 전부 주동적인 행동인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수동적인 방어에 가까웠지.

몇 가지 안건을 처리한 다음 구C나 구E에서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괜히 행장이 키키와이 출장소에 심은 낙하산이라는 악평이 정정되지 않도록 행동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직장인들이 모이는 익명 게시판에서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는 금융업 관계자 게시판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되었고, 그 이야기가 나올 땐 언제나 낙하산인 내 이야기가 끼어 있었다.

나는 그런 게시글을 볼 때마다 굳이 차원신용금고 근무자로 인증된 익명 계정으로 나 자신의 명예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승해서 ‘아, 그 어리버리 낙하산? ㅋㅋㅋㅋ’ 같은 식으로 동조하는 댓글을 작성했지.

밀라를 비롯한 동기들이 조심스럽게 내게 모 직장인 익명 게시판의 화제를 꺼내도 나는 그들에게 날 변호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해 두었다.

어차피 키키와이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파벌 싸움의 최전선인 출장소에서 구C와 구E의 에이스인 라즈마 과장과 비슈티 과장이 노골적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엘라마를 보조해 둘을 감시하고 모두가 협조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내 포지션을 뛰어난 은행원보다는 아직 어리숙해서 돌봐야 하는 신입 정도로 두는 것이 유리하다.

바로 그랬기에, 둘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도록 일부러 실수를 해서 업무에 지장이 생기게 만든 적은 없지만 여태껏 적극적으로 두 과장의 업무에 관해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틈틈이 질문 공세를 펼쳤다.

물론, 그런 위장도 이번 아비아노와 바리타스의 전쟁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부 들통이 나서 마키나의 말마따나 ‘그림쟁이’의 이미지가 둘의 머리에 각인된 모양이지만.

“어쨌든, 말씀하신 계획을 듣고 느꼈습니다. 김지안 대리가 아이에게도 가차 없이 구는 사람이라는 걸요.”

어지간히 내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 이해는 간다.

린딘까지 필로아와 함께 간 다음 그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렇고 그런 연기를 해야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키나 입장에선 리스크가 과도하게 큰 계획이긴 하다.

“아예 필로아가 제게 뭐라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버리는 거군요. 의도는 납득이 갑니다만….”

마키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벌컥벌컥 커피를 들이켜는 게 퍽이나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녀석의 탁월한 컴퓨팅 파워로도 이 계획을 진행했을 때 필로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쉽게 예상이 불가능한 걸까.

“…하아. 진짜.”

마키나는 드립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켠 다음 테이블에 컵을 세게 내려놓았다.

“그 이상으로 필로아가 쉽게 제가 인공 지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분하군요.”

“…뭐?”

세상에.

이건 조금 뜻밖이다.

사실 이번 계획을 마키나에게 들려주면서 리액션이 영 좋지 않아서 당연히 반대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좋으니까, 내 계획을 듣고 더욱 디테일이든 방향성이든 수정한 방안을 마키나가 뛰어난 머리로 구상해 주진 않을까 기대했는데.

설마 이대로 받아들일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필로아에게 제가 정체를 밝히고 그녀가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사랑이 전쟁이라면 모든 수단이 용납될 터.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잠시 거짓의 힘을 빌리는 정도라면 저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습니다.”

마키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표정이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겼으니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오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미 알고 말씀하시는 거겠지만 필로아의 가족은 과거 자동 운전 시스템이 탑재된 전기 자동차를 타고 있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기적같이 살아남은 건 오직 그녀 하나뿐. 가족을 잃은 슬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과 트라우마는 분명 제가 그녀에게 정체를 고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필로아의 머리를 지배하게 될 겁니다.”

마키나는 이미 평범하게 자기 정체를 말했을 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

녀석은 지난 몇 달 동안 필로아와 함께 지내왔고 그 탁월한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을 들여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제시한 편법은 마키나가 보기에도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로아는 일반적인 다섯 살 여아가 도달할 수 없는 정신적인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숙한 마음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부모를 잃은 슬픔과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절망에 기인하고 있다.

필로아는 자신이 원해서 일찍 어른스럽게 변한 게 아니다.

세상에 의해 그것을 강요당했을 뿐.

아직 부모의 품에서 자라나야만 하는 아이가 크나큰 슬픔으로 인해 성장을 맞이하고 만 건 누가 뭐라 해도 비극적인 일이다.

마키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여태껏 자신이 어떻게 탄생한 존재인지 말하지 못한 것이겠지.

만에 하나 마키나가 솔직하게 모든 걸 고한다면, 필로아는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격한 감정에 휩쓸려 마키나가 그동안 보인 모든 애정 표현을 기만이라고 생각하고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있잖아, 마키나. 사실 나는 처음엔 필로아에 관한 기사를 보고 그래도 네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그 아이가 전부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인 거 같더라고.”

내가 말하자 마키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아이는 강하고 총명해 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마키나도, 딱 한 번 필로아와 만나 본 나도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총기와 재능, 그리고 강한 마음은 원하지 않는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성장은 언제나 시한폭탄을 그 안에 품고 있는 법.

천재 프로그래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여전히 세상을 얼마 살아 보지 않은 어린아이다.

“네 입장에선 억울할 거라고 생각해. 너도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 이렇게 자아를 갖고, 영혼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지언정, 너는 네가 인공 지능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난 건 아니니까.”

마키나를 만든 건 과타노차, 나의 특채 동기다.

녀석이 마키나를 창조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 중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지독하게 이기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인공 지능은 창조된 목적을 따라 은행의 전산망을 관리하며 자신의 창조자인 과타노차에게 막대한 수입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영혼을 지닌 이상 이 녀석은 행복해져야만 한다.

창조자인 과타노차가 이제 관심을 쏟지 않고 새로운 장난감을 만드는 데에 몰두하고 있지만, 적어도 마키나가 이 세상에 적응할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같이 있었던 델 몬테 지점장 부부나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내가 마키나가 싫어할 걸 뻔히 알고도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는 내 머리 갖고는 더욱 나은 무언가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마키나는 받아들인 모양이지만.

“그녀는 기계를 증오하고 있지만, 그 감정을 무언가를 파괴하는 데에 사용하는 일 없이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승화시켰습니다. 저는 그런 필로아를 존중합니다. 다시는 저런 사람을 살면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근거는 없고 저는 운명 따위 정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니, 분명 이건 비합리적인 생각이겠지만요.”

“좋아한다는 마음과 합리성은 공존할 수 없어. 너도 경험해 봤으니 잘 알고 있잖아.”

네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라.

필요하다면 너도 이기적으로 굴어도 된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해서 참았다.

약아 빠지고 자기 머리와 힘을 이용해 남들에게서 원하는 걸 갈취하는 놈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마키나를 풀어놓아야 하는 지금, 도덕적 기준이 덜 잡힌 지금, 마키나의 고삐를 과할 정도로 풀어 주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키나에게 하지 않은 말을 마음속에서 잘 갈무리해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도의적 관점에서 거리낄 만한 일은 없어.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어 내는 건 어디까지나 연출. 세상은 어차피 연극이고 모두가 무언가를 연기하며 살아간다고. 하물며 이번 계획은 네 진면목을, 진심을 전할 유일한 기회라고.”

마키나가 각오를 마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필로아를 속여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까짓거 한번 해 봅시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어디까지나 어린 연인들을 위한 이벤트.

모든 리스크를 제하고,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 * *

예술의 신 아폴론의 총애를 받는 천재 드워프 감독 겸 제작자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12차원 올림포스의 도시 중에서도 영화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로렐트리의 스튜디오에서 한가하게 차기작을 구상하던 그의 스마트폰에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발신인은―

“음?”

차원신용금고의 김지안 대리.

“아, 저번에 그….”

하도 많은 사람들을 보았지만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본 그 젊은 은행원의 얼굴은 그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다.

플랫의 재기를 도운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신작은 마음에 드는 주연 배우를 고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직접 은행을 찾아가 명함을 주었던가.

혹시 당시 단편 영화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배우 커리어를 쌓아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이제라도 답한 걸까.

“얼굴이 일단 참 괜찮은 친구였단 말이지….”

감독은 문자의 내용을 기대하며 스마트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허.”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는 부탁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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