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61화
퇴근한 직후, 마키나에게 연락해 녀석의 집으로 찾아갔다.
손에는 가게에서 포장해 온, 아보카도가 든 키키와이식 해물 덮밥과 음료를 들고.
“키키와이에 와서 이걸 아직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니. 불쌍한 녀석.”
아직 초딩, 아니 유딩조차 되지 않은 입맛이라 아직 날것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 기회에 어른인 내가 생선의 멋짐을 알려 주어야겠다.
“딩동!”
“나 왔어.”
<일찍 오셨군요.>
인터폰을 누르자 마키나가 오피스텔 1층 정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조막만 한 키의 꼬마 아이가 문을 열자 은은한 디퓨저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자, 저녁.”
“뭘 이런 것까지 다….”
마키나는 꽤나 어른스러운 말을 하며 날 맞이했다.
“깔끔하네.”
마키나의 집은 저번에 녀석이 홀로그램으로 보여 준 것처럼 깔끔하고 효율적인 동선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저번에 보았을 때와 몇 군데 달라진 곳이 있었는데 발코니와 거실에 갖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꽃은 언제 저리 많아졌어?”
“아, 이것 말입니까. 필로아가 말하길 식물들이 있으면 집 분위기가 따뜻해진다고 하더군요.”
“오. 걔 취향이었구나. 너는 어때?”
“확실히 집에서 보는 색깔이 다양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는군요. 명상할 때에도 공기 중에 디퓨저 외에도 진짜 꽃향기가 섞여드니까 예전 대비 15% 정도 릴랙스 효율이 좋아졌습니다.”
“그런 것까지 숫자 써서 효율을 따지는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렇습니까?”
“아니, 그냥 안심했어. 내가 아는 마키나구나 싶어서.”
마키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내 싱크대로 걸어가 수저를 꺼내 식탁에 늘어놓았다.
“괜히 저 때문에 저녁까지 사 오시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너무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 어린아이면 아이답게 어른이 사 온 음식 먹고 건강하고 즐겁게만 자라 달라고.”
“또 아이 취급입니까. 이미 제 지성은 김지안 대리를 아득히 넘어섰는데.”
마키나는 툴툴대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저런 모습도 그냥 나이 차이 나는 동생 같아서 내 눈엔 귀여워 보일 따름이었다.
“똑똑하든 말든 그런 건 상관없어. 아이로서 누릴 건 누려야지. 누가 뭐래도 넌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어린이라니까. 육체 연령도 3세로 고정되어 있잖아.”
“육체 연령은 그냥 겉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성장한 육체로 교체할 겁니다. 아직은 필로아에게 제 정체를 밝히지 못해서 함부로 시도할 수 없긴 하지만….”
마키나가 슬슬 본격적으로 짜증을 낼 것 같아서 그만 놀리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어때? 오늘도 필로아 만나고 왔어?”
해물 덮밥을 봉투에서 꺼내 뚜껑을 열었다.
농후한 바다향이 달달한 간장 소스의 향기와 함께 퍼져 나갔다.
“아니요. 오늘은 필로아의 업무가 바빴던지라.”
“외주?”
“네. 후리텐 국립 지질학 연구소에서 의뢰를 받아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필로아는 그쪽 분야도 잘 아는 거야?”
“필로아가 똑똑하긴 하지만 프로그래밍과 동시에 지질학까지 마스터할 정도로 시간이 여유롭진 않습니다. 지질 연구소가 의뢰한 건 어디까지나 전산 관리 프로그램일 뿐이죠.”
“어느 쪽이든 대단하네.”
“이제야 필로아의 대단함을 아시겠습니까.”
마키나는 주절주절 필로아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국립 지질학 연구소에는 컴퓨터를 다루는 데에 능숙하지 못한 나이 든 연구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연구 자료를 분류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학술용 연구 보조 프로그램이 있다면 여러 복잡한 작업을 효율적으로 전산으로 처리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나 뭐라나.
거기서 필요한 게 바로 필로아가 만든 언어로 짠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호환성이 뛰어나 다른 개발 환경에서 다른 언어로 개발된 프로그램과도 문제없이 병용이 가능하고 늙은 학자들이 음성으로 명령을 개떡같이 명령을 내려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충실하고 똑똑한 하인과도 같은 존재.
필로아에겐 자신이 설계한 언어를 필요로 해 주는 첫 클라이언트인 지질학 연구소에게 자신이 지닌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이 프로그램이 뛰어난 효용성을 발휘한다면 학계부터 시작해 이러한 실험적인 언어를 사용한 프로그램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할 테니까.
학자들이 애용하게 되면 실무자들도 코드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온라인상에 오픈 라이선스로 공개해 둔 코드는 수많은 천재들의 손에 의해 개량되고 진화하게 될 것이다.
“실은, 이미 신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프로그래머들이 달려들어 활발하게 온라인에서 개발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네임드’들도 많이 끼어 있고요.”
“뭔가 네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까 굉장히 신선한데.”
“저는 서른 먹은 김지안 대리와 달리 나우하고 영한 세대인지라.”
“어우 틀내.”
“3세 유아에게 못 하는 말씀이 없으시군요.”
“너야말로 어른한테 건방지다고.”
우린 그렇게 한동안 헛소리를 떠들며 덮밥을 탐했다.
마키나는 생전 처음 접하는 날것의 해물을 보고 처음엔 고양이처럼 경계하고 있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첫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은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와아.”
녀석은 고추냉이의 자극과 달착지근한 소이 소스의 풍미가 마음에 드는 듯 우아하게 생선회와 흰쌀밥을 음미하고 있었다.
“키키와이 향토음식이 이렇게 훌륭할 줄은 몰랐습니다.”
“뭐야. 음식점 리뷰 그런 거 꼼꼼하게 살펴볼 줄 알았는데.”
“요즘 필로아에게 한 가지 배운 게 있습니다.”
“뭘 배웠길래.”
“뭐든지 먼저 조사해 알아 버리는 인생은 재미가 없다는 걸요.”
“오….”
마키나 주제에 묘하게 철학적인 이야기를 한다.
단순히 음식 리뷰를 찾아보고 나서 가게를 방문하거나 배달 주문을 시키는 걸 그만두었다는 것 이상의 뜻을 내포한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기분 탓일까. 마키나의 얼굴이 평소보다 신묘해 보이는 것 같은데.
“…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
“아니 그냥, 많이 컸구나 싶어서.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부모님도 아닌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셔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키나는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마저 먹죠.”
결국, 식사를 하면서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꺼냈다면 마키나는 모르겠고 최소 내가 체했을 건 분명했으니까.
* * *
식사를 마치자 마키나는 손수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주었다.
이 역시 여태껏 알고 있던 마키나의 사고방식을 고려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드립 커피도 만들 줄 알아?”
“배웠습니다. 그녀가 좋아하거든요.”
“대단하네….”
대단하다는 건 마키나의 핸드 드립 커피의 맛에 관한 찬사였지만 동시에 또 다른 변화에 대한 감상이기도 했다.
“남의 집에서 이런 걸 다 먹어 보고, 처음이야. 고마워, 마키나.”
누군가를 좋아함으로써 자신이 믿어오던 가치 외의 다른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에서 마키나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일으키게 하다니.
아직 나는 사랑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셔도 됩니다. 이런 모습 적응 안 된다거나, 저답지 않다거나, 그런 생각 하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에이,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 새삼스럽긴 하지만.”
“이해합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효율을 더 따졌을 테니까요. 캡슐을 사용해 커피를 한 잔 내리는 것과 핸드 드립으로 내리는 걸 맛과 드는 시간, 필요한 예산 등 모든 분야에서 비교 분석한 다음 효율적인 쪽을 선택했겠죠.”
“잘 알고 있구나.”
“완벽한 결과물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적당한 시간을 들여 만드는 70의 결과물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요. 두세 배의 시간을 들여 70이 아닌 90의 결과물을 얻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할 게 틀림없죠.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시간과 공을 들여 90의 결과물을 만들어도 그걸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마키나의 말에 나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지금 녀석이 비효율을 감수하고 내게 핸드 드립 커피를 내려 준 게 무슨 뜻인지 얼추 이해한 까닭이었다.
“제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에게 기존에 생각하던 ‘과투자’를 진행했을 때, 제 사고회로는 그것을 낭비로 인지하거나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건네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제게는 충분한 보상이었습니다.”
배시시 미소를 짓는 마키나를 보고 있자니 절로 내 입꼬리도 올라가고 있었다.
“예전보다 느낄 수 있는 가치가 많아졌습니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던 개념이 필로아를 만남으로써 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옳으려나요.”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마키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어른 다 됐네.”
왜 델 몬테 지점장님이 그렇게 아이 타령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간접적이긴 해도, 나는 지점장님과 사모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나중에 너 같은 아들 하나 생겼으면 좋겠다.”
“진지하게 하는 소립니까, 그거.”
“어… 과하게 어른스러운 구석만 좀 빼고. 애는 애다워도 되니까.”
“흠.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결국 농담처럼 지나갔지만 마키나가 말하고 싶은 바는 잘 이해했다.
그렇다. 중요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 자체가 우리에겐 큰 보상이다.
우린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영원하길 바란다. 행복하니까.
하지만 수많은 이유로 세상은 사람에게서 그런 달콤한 시간을 앗아가려 한다.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부모. 예상치 못한 병과 사고로 인해 곁을 떠나는 연인과 친구.
그리고, 사소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폭발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일과 뜻밖의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 상대의 거짓을 견딜 수 없게 되는 케이스까지.
“…….”
내 표정이 가라앉은 걸 보고 마키나가 무언가 눈치챈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얘길 하러 오신 모양이군요.”
“맞아.”
“무언가, 부탁하실 거라도?”
“응. 그런데 이건 너와 필로아에 관한 일이야.”
“호오.”
마키나가 흥미롭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김지안 대리가 저희 관계에 관해 할 말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아직 필로아에겐 말하지 않은 거지? 네 몸에 관한 이야기랑, 네가 인공 지능이라는 사실.”
“…….”
마키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내게 해결책이 있어.”
아이의 지혜라면 충분히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턴, 어른의 지혜를 보여 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