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8화

내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전화한 건 델 몬테 지점장님이었다.

“네. 지점장님. 잘 지내시죠?”

<예. 저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김지안 대리는 키키와이 생활이 좀 어떠십니까?>

“저도 말씀드렸다시피 변한 건 없습니다. 다루는 안건의 종류가 예전과는 달라지긴 했지만요.”

<이것저것 소문으로 듣고는 있습니다. 출장소 생활, 쉽진 않아 보이더군요.>

“아하하…. 가끔 서부 포독스 지점 있었을 때가 그리워집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내가 능청을 떨자 지점장님이 작게 웃었다.

본점과 다른 점포에서 대체 무슨 이야기가 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하건대 엘라마 소장이 이끄는 출장소 행원들이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 다니거나 말도 안 되는 규모의 안건의 처리에 동원된다는 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쩐지, 밀라가 저번에 본점에서 출장소 근무 행원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다들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행원들 사이에선 우리가 엄청나게 고생하고 다닌다는 이미지가 박혀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게 아무래도 질투도 덜 사고 좋겠지.

예전까지만 해도 출장소 근무는 출세 코스니 꿀빠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런 말이 돌 때마다 니들이 대신 여기서 일해 봐, 라는 소리가 입천장까지 차올랐는데 그때마다 꾹 참아 냈다.

하여튼, 정말로 장하다 김지안.

처음에는 특채라 낙하산이라고 무시당하고, 그다음에는 출장소에서 꿀빠는 꿀벌 새끼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젠 그래도 다들 기피하는 고난이도 안건만 다루는 정예 집단인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구나.

<확실한 출세 코스지만 주말에도 일해야 하며 워라밸을 챙기지 못해서 출장소 행원들 얼굴이 누렇다 못해 검을 지경이다, 라더군요.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까.>

“어… 그건 말이죠….”

들으신 이야기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네.

<저번에 마키나를 돌볼 때엔 그냥 한 달 통째로 린딘 근교에서 살면서 편하게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김지안 대리가 출장소에서 일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김지안 대리에겐 짧은 휴가에 지나지 않았던 거로군요.>

“그때 진짜 푹 쉬긴 했습니다. 입행 후 처음으로 원 없이 쉬어봤네요. 출장 핑계가 아니었다면 엘라마 소장한테 죽도록 갈굼당했을 겁니다.”

사실은 돌아오자마자 출장 가서 일한 게 노는 거지 업무냐고 다음달 내내 번거로운 업무는 전부 내가 맡아야만 했다.

차마 싫다고 말할 수도 없던 게, 내가 돌아온 걸 보고 아이작이 그날 기쁨의 눈물을 흘렸거든.

그 모습만 보고도 내가 없던 사이 제일 짬이 쌓이지 않은 막내라는 이유로 온갖 고생은 다 아이작이 했을 거란 사실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플루토가 도와주진 않았으려나 싶었는데 정식 행원만 건드릴 수 있는 일이라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뭐, 내가 평소 얼마나 험하게 구르는지를 굳이 델 몬테 지점장님께 말해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겠지.

“아직 저는 독신이잖습니까. 주말에 일해도 걱정할 사람도 없어서 괜찮습니다. 엘라마 소장이 수당도 다 챙겨 주고 그래서 주머니는 오히려 많이 두둑해졌고요. 영양제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가벼운 운동도 매일 하고 있어서 건강에도 문제는 없습니다.”

<김지안 대리도 슬슬 혼기가 되어 가니 좋은 짝을 만나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이런 건 다 인연이니까 때가 되면 연이 닿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김지안 대리라면 서로 존경할 수 있는 연인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델 몬테 지점장님의 말투가 묘하게 감상적인 것 같다.

원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내 연락을 받고 연관된 화제를 연상한 게 아닐까 싶었다.

딱히 불편한 이야기가 아니었고 나도 최근 고민하고 있던 문제인지라 일단은 평범하게 대꾸했다.

<잘 지내고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재밌는 이야기를 가져왔군요.>

“예. 상상하신 이상으로 마키나는 키키와이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델 몬테 지점장은 내가 요약한 이야기에 강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키나는 그들에게 있어 친자식과도 같은 존재.

이미 마키나는 독립해 두 사람이 사는 곳과 한참 멀리 떨어진 이곳 키키와이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부모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몸이 멀어진다 해도 사라질 리는 만무했다.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벌써부터 이성에게 관심을 갖게 될 줄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생명체와 인공 지능의 정신적 성장 속도를 비교할 수는 없다 보니….”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질투가 납니다.>

“예? 누구한테요?”

설마 아들 같은 마키나의 여자친구(?)에게 질투가 난다는 건 아니겠지.

<어째서 마키나는 이런 이야기를 김지안 대리에게 하고 저와 아내에겐 하지 않은 걸까요. 흑흑….>

“아, 그건….”

진짜로 섭섭했다는 듯 델 몬테 지점장의 목소리에는 조금이지만 울음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든 달래 줘야 할 것 같은데.

“아마 그나마 나이가 가까운 제가 형 같아서 그랬을 겁니다. 근처에 살고 있기도 하고요. 같은 동네 사는 친한 형 같은 거죠, 뭐.”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흠흠!>

어째, 마키나랑 지낸 탓인지 델 몬테 지점장도 덩달아 감정 표현이 예전보다 풍부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마키나가 연애를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물심양면을 가리지 않고 꼭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직접 필로아라는 아이를 만나 보고 싶군요. 김지안 대리가 말한 대로 마키나 못지않게 성실하고 재능 또한 출중한 듯한데, 가능하다면 저희가 두 아이에게 비를 피할 지붕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음, 거기까지 생각하시는 건 조금 페이스가 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아직 뭐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며느릿감 고르는 시아버지처럼 구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점장님.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돌려 말했다.

<아무래도 현실적으론 힘들겠죠? 마키나도 기껏 독립했다가 집에 돌아오려 하진 않을 테고. 그래도, 정말 안타까운 일을 겪은 아이인데 모쪼록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키나는 성품이 착하고 무엇 하나 모자란 곳 없는 아이니까 반드시 필로아 양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알려 주세요. 아내와 주말마다 키키와이를 찾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근데 바쁘신 분 주말마다 키키와이에 부르긴 좀 어려우니까 한 번 제가 대리인으로서 힘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에도 잠시 이야기하다 통화를 마쳤다.

“…이것도 방안 중 하나로 생각해 두어야 하려나.”

어쩌면 필로아의 대부, 같은 식으로 몇 년 동안 지점장님 부부가 신변을 보호하고 돌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이 마키나의 양부모긴 하지만 그렇다고 필로아를 맡지 못할 이유는 없고 지점장님도 그걸 원하고 계신 모양이니까.

만일 두 아이의 서로를 향한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일찍 약혼 관계를 맺게 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일지도 모른다.

뭐, 누군가는 살면서 다양한 사람과 연애를 해 보고 그다음에야 자신의 반려를 골라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부부도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인지라.

아이들의 감정이 순수한 만큼 언제든 변하기 쉽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생연분이더라도 사람인 이상 언제든 마음을 바꾸고 갈라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하만, 당장 어린 시절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아이에게 마키나와 지점장님 부부가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준다면.

그 관계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유지된다면 어떨까.

충분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굳이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데 더 넓은 세상을 봐야 한다는 같잖은 이유로 한눈을 팔게 만들 이유는 없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긴데.

게다가 마키나가 밖에 내놓았을 때 어디 꿀리는 녀석인가.

뭐, 어른이 되어 둘이서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어려운 부분이 생길 수는 있지만….

“문제는 마키나가 인공 지능이고 육체 역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거란 사실을 알고도 필로아가 계속 같은 마음을 품을지, 인데.”

이 부분에 관해선 마키나 본인의 의견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일단 지금 녀석이 보유하고 있는 신분은 난민이고, 난민을 받아 준 델 몬테 지점장님 부부와 차원신용금고가 신분을 보장한다는 식으로 겨우 심사를 통과해 신원보증인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회 적응 기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키나의 육체 연령은 아직 3세. 녀석이 학교에 다니는 일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건 아직 미취학 아동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누가 봐도 이는 굉장히 특수한 경우고, 난민의 신분은 구C 행원들의 힘으로 만들어 낸 가짜다.

마키나가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이 거짓이 전제가 된다.

그런데, 이걸 필로아에게 단지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만으로 밝히라고 한다면 그건 다분히 여파를 의식하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지식한 마키나가 언제까지나 필로아를 속이려 들진 않을 터.

이러한 부분을 고려했을 때 내가 마키나를 도와야 하는 부분은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마키나가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밝힐 수 있도록 돕는 것.

나머지 하나가 마키나의 고백을 듣고도 필로아가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는 것.

“이게 맞나….”

기계를 싫어하는 여자아이가 자신이 여태껏 대화하고 친근감을 느끼고 애정까지 품은 상대가 기계 육체에 든 인공 지능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솔직히 말해서 나라면 거부감과 배신감부터 느낄 것 같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억지로 상대를 설득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여태껏 마키나가 보인 모든 반응이, 그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이 가짜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아이가 과연 나와 마키나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이런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는데.”

마키나와 필로아에겐 정말로 미안하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더러운 어른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우우웅!

때마침 울리는 휴대 전화.

예상대로, ‘그 녀석’이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내가 연락한 건 델 몬테 지점장만이 아니었다.

나는 녀석에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제안을 마쳤고, 구미가 돋은 녀석은 참지 못하고 연락을 한 것이다.

“안녕, 과타노차. 그동안 심심했지?”

<왜 더 일찍 연락하지 않은 거지, 탄소 생명체.>

“다 모니터링하고 있는 줄 알았지.”

<설마 내가 모니터링을 그만둔 사이에 저런 재밌는 물건이 세상에 나타났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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