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1화

토요일 오전, 아비아노와 바리타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요약해서 밀라에게 들려주었다.

<와, 미친! 오빠 모르는 사이에 도청당하고 있어서 이 얘기 새어 나가거나 그러는 거 아니죠?!>

“조용히 해. 자취방이라며 옆집 사람 들으면 어쩌려고.”

<으아아앗!! 이런 재밌는 일에 저만 안 끼워 주는 게 어딨어요!!>

“인사부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우주 전쟁인데.”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난다앗!!!>

밀라 녀석의 리액션은 상당히 혜자스러운 축에 속했다.

다크 엘프들은 일반적으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걸 꺼려하는 문화에서 자란다고 하는데 밀라를 보면 그런 이야기는 근거가 없거나 밀라가 예외거나 그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도청은 걱정하지 마. 다 확인해 두었으니까.”

<아 진짜요? 집에 금속 탐지기라도 있나?>

“어… 비슷해.”

나는 천장 근처에서 부유한 채로 레이더를 가동시키고 있는 콜로서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번 전쟁에 관한 진실은 딱히 밀라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을 이유는 없어서 그나마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딱히 사망자가 발생한 것도 아니다 보니 크게 마음에 걸리는 일도 없었고.

강대한 국력을 지닌 두 국가의 충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만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늘어지고 늘어진 전쟁으로 인해 수백 조 굴덴에 달하는 예산을 모조리 당겨 쓴 제국의 남은 호주머니에서 최후의 20여 조 굴덴을 갈취해 그들의 여력을 고갈 낸 사실도.

“여러모로 운이 좋았던 거 같아. 멤버 구성 자체는 드림팀인데 그것만으로 해결이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던지라.”

<어째 다들 연락 안 된다 싶었죠. 이로울 씨도 키키와이 출장 간다 해 놓고 오빠랑 밥 먹은 인증샷 그런 거 하나도 동기 채팅방에 올리거나 그러지 않았잖아요. 난 또 감사부 내규 지켜야 해서 까다롭게 이것저것 제약이 걸려 있는 줄 알았지.>

“아, 밥은 먹으러 가긴 했어. 내가 낸 건 아니고 그냥 진짜 반반씩 내고. 일단 표면상으로는 감사 나온 거였으니까 각자 계산 안 하면 나중에 오해받기 쉽잖아. 사진 못 올린 건 정신 없어서 그랬을 거야.”

<어쨌든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요. 이로울 씨랑 여럿이 리베르토티에 잠입하다니. 이런 미친 일을 은행원이 하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한데….>

“그러게. 다차원 출장소가 좀 업무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어.”

밀라는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안건들을 처리하는지는 본점엔 알려져 있긴 한 모양이었다.

다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지는 이상하리만치 인사부든 어디든 정보가 빨리 도는 부서에게도 이야기가 돌지 않는다는 게 밀라의 증언이었다.

“다행이네. 아마 그런 얘기까지 돌아 버렸다간 엘라마 소장님이나 행장님이 곤란해지실 테니.”

<세상에, 이번 안건 말고도 다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거였어요?>

“어… 비슷해.”

<서부 포독스 시절에 다짜고짜 다른 은행에 연락해서 다른 차원에서 불륜 밝혀내고 협박했잖아요. 와, 이거 법적으로 문제 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하….”

<아니이. 오빠 생긴 거랑 다르게 엄청 험하게 일하는구나.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에휴 그냥 키키와이에서 꿀 빤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히 미안해지네요.>

“그럴 줄 알았다.”

밀라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녀석은 언제나 내 건강을 신경 써 왔고 안부를 물어보곤 했다.

아랫사람을 무지막지하게 굴리는 대신 잔업 수당이나 야근 수당, 휴무일과 주말에 출근할 때에도 챙겨 줘야 하는 건 다 챙겨 주는 엘라마가 근무 기록을 꼼꼼하게 남기도록 지시하고 있었기에 우리가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는 밀라도 잘 알고 있었다.

인사부 근무자인 이상 점포 행원들이 출퇴근하는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조회가 가능하니까.

<아무튼, 오빠 너무 무리하지 마요. 젊을 때 맨날 밤새고 그러면 정자 개수 줄어들고 그러잖아요.>

“내 정자를 왜 네가 신경 쓰고 지랄이야.”

<엥?! 오빠 기억 안 나요? 진짜 어이없네.>

뭐지. 나 혹시 술김에 헛소리라도 씨부린 건가.

“뭐… 뭐야. 내가 뭐라고 그랬길래.”

<오빠가 저번에 나 키키와이 갔을 때 같이 술 마시면서 그랬잖아요. 완전 취해가지고―>

“아니 그러니까 내가 뭐라 했는데.”

<예쁘고 참한 여자 만나서 건강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내가 그랬어?”

<응. 그랬어요.>

“…….”

세상에. 주책도 이만하면 흑역사다. 당장 침대에 누워 이불에 백열각을 먹이고 싶을 정도다.

잠깐 헛소리를 한 게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고민해 봤지만 지금 진지하게 그런 얘길 해 봤자 분위기만 이상해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나도 남자니까, 뭐. 가정 이루고 싶을 수도 있지. 솔직히 지금 스물아홉인데 내가 살던 세상이면 결혼 적령기가 코앞이라고. 서른 줄 좀 넘는 순간 주위에서 언제 결혼해서 애 낳냐고 지랄맞게 군다니까.”

<아하. 오빠 살던 3-1차원도 대충 비슷한가 보네요. 다크 엘프들도 그쯤 되면 뭐라 해야 하나, 종족 번식 욕구가 차오른다고 해야 하나. 문화보단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 같은 건데 서른 즈음 가까워지면 다들 결혼하려고 몸 비틀고 난리 치는 거 있죠. 여기저기서 이성 좀 소개시켜 달라고, 소개팅 부탁하고 막.>

“으음…. 신기하네.”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는데 다행히도 밀라 역시 신경 쓰는 티 내는 일 없이 평범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잠깐, 이거 스물아홉 먹은 남자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이성에게 하긴 좀 불편한 이야기 아닌가.

그냥 친한 은행 특채 동기 A랑 B인데, 내가 너무 예민한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도 밀라도 각자 자신이 자란 문화권의 풍습이나 그런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괜찮은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밀라한테 흑심 품은 것도 아니고 저쪽도 그냥 나 같은 놈은 친한 오빠 1일 테니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야겠다.

“잘 상상이 안 가. 엘프 하면 우리 쪽에선 뭔가 결혼도 수백 살 때 하고 애도 늦게늦게 한둘만 낳고 생물적인 욕망도 별로 없는 종족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거든. 오래 사니까 어지간한 자극에 무뎌지는 게 아닐까, 그런 얘기도 있고.”

<고대 엘프들이라면 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오빠가 저번에 33차원에서 세계수 담보 대출 진행할 때 본 사람들 있잖아요.>

“아. 거긴 맞아, 좀 그런 느낌이었어. 그럼 다크 엘프는 많이 달라?”

<어… 아무래도? 다크 엘프는 고대 엘프보다 수명이 훨씬 짧잖아요. 저희 할머니 같은 사람 아니면 인간보다 많아 봤자 50세 정도 오래 사는 게 고작이고 마흔 정도까진 인간이랑 비슷한 속도로 나이 먹으니까요.>

“처음 알았어.”

나는 그동안 업무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범차원 세계의 다양한 종족의 문화와 풍습에 관해 알아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여태껏 밀라의 종족인 다크 엘프에 관해선 의도적으로 정보를 접하는 걸 피하고 있었다.

어쩌면 괜히 다크 엘프의 수명이 500세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가 밀라의 나이가 100여 살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잠깐, 마흔 정도까진 인간과 비슷하게 늙는다면 너는 지금 몇 살인 거야?”

<저요? 스물여섯이죠. 당연히. 그게 아니었으면 왜 지안 오빠 보고 오빠라고 불렀겠어요.>

“아. 스물여섯이었구나.”

왠지 모르게 안도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째서?

<뭐예요. 그럼 지금까지 내가 환갑 넘었다거나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수상한데에.>

“그, 있잖아, 고양이는 16살 정도까지 살아 있다 보니… 아무래도 고양이의 1년은 인간으로 치면 6년이랑 비슷하지 않겠어? 그런 식으로 다크 엘프도 인간 기준으로 나이 환산해서 나보고 오빠라 하는 게 아닐까 싶었거든.”

<아. 됐어요. 끊어요. 나 삐짐.>

밀라는 잔뜩 가시가 돋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상 통화가 아닌데도 수화기 너머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쉽게 상상이 갔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입술을 오리처럼 비죽 내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무식해서 그래. 미안.”

<흥. 봐주는 거 이번만이에요?>

“그래그래, 고맙다.”

<하여튼 시집도 안 간 처녀를 할머니로 만들고 앉아 있어. 진짜 실망할 뻔했다고요.>

새삼스럽지만 내가 이쪽 세상에 관해 여전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나 사 줘야지.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물어봐야 했는데, 다른 얘길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참, 밀라. 혹시 다음 인사이동 발표 아직이야?”

<엥.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건 왜요?>

“어… 그게 있잖아….”

괜히 감추기도 뭐해서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알려진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근무하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고 있는 이상 가능한 한 빠르게 본점으로 가서 일하고 싶다고.

<헐? 진짜요? 오빠 본점 오는 거예요?>

“내가 갈 수 있다고 가는 건 아니잖아…. 불러 줘야 가든 말든 하지.”

<으…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오빠 오면 자주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하고 그럴 거 아니에요. 동기끼리 자주 보면 좋아서 그랬지, 나는.>

“그래. 뭐, 같은 건물에서 일하면 재밌긴 하겠네.”

아이작도 같이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만일 나와 아이작이 본점에서 일하게 되면 밀라 외에도 이로울과 과타노차와도 금요일마다 한 잔씩 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지금은 아이작이 있고 집에 돌아오면 정령들이 반겨 주긴 하지만, 일터에서 고객님들을 접하고 과장과 소장에게 굴려지다 보면 동기들과 만나 스트레스 풀고 이런저런 화제로 수다를 떠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게다가 키키와이는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지.

아무리 차원 관문으로 범차원 세계 곳곳을 다닐 수 있다 해도 범차원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린딘에서 차원신용금고의 금력과 권력이 모인 본점에서 일하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 아직은 무리일지도 몰라도 내년이면 슬슬 근무 희망지 신청 가능할지도 모르겠거든요. TO 빌지는 별개인데. 오빠만 괜찮으면 한번 서류 내 보실래요? 아, 근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주제넘은 짓일지도 모르겠는데. 오빠 승진길 막는 것 같아서.>

“그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내가 정할 문제인데, 뭐.”

본점에서 일하는 것도 키키와이 출장소 못지않은 승진 코스인데 뭐가 걱정인가.

“그거 포함해서 좀 다음에 소장님이랑 상담해 봐야겠어.”

아직 시간은 많다. 천천히 결정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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