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0화
-달그락
잔 안의 얼음이 유리와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부의 여신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 전체를 차지한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새벽이 되었지만 불이 꺼지지 않는 린딘 시내.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작디작은 소동물이나 벌레처럼 보이는 높이에서, 여신은 머나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곳이 아직 린딘이 아닌 린디니움이라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
수천 년 전, 인간이 아닌 신이 세상을 다스리던 과거의 사건을.
“…….”
스스로 안구를 적출한 날 느낀 회한과 후회가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리석고 순진했지….”
신 역시 인격을 지닌 존재.
피조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된 정신과 영혼을 지니고 있다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신들조차 스스로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범할 때가 있었다.
오커스가 범한 실수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피조물을 돌보고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신의 존재의의이자 본분.
신의 도움으로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워진 피조물들은 찬양과 경배를 바치고, 이를 양분으로 신은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이어진 유구한 상호 의존 관계.
신은 위대하지만 인간 없이는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숭배는 초월자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
당시 인간의 근면함과 선악을 판단하는 자신의 눈을 과신하던 오커스는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물들였고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모든 신앙과 숭배는 부를 분배하는 오커스에게 집중되었고 결과 다른 신들은 하루가 다르게 힘이 고갈되어 갔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신과 피조물 양쪽에서 나오는 법.
무너진 균형은 끔찍한 사태를 초래했다.
“…왜 그랬을까.”
오커스의 목소리에는 지울 수 없는 후회와 회한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잘못은 신과 사람 양쪽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었기에.
당시 오커스는 새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이었다.
부유함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생겨나면서 생명을 얻은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자극적이고 신선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엔 음험한 계략과 사악한 영혼, 남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넘쳐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커스는 그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은 곳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녀는 세상을 사랑했고, 신왕 유피테르와 먼저 태어난 신들이 만들어 낸 피조물들이 더욱 행복하길 순수하게 바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원죄를 지니고 있는 이상, 종족을 불문하고 범차원 세계의 사람이란 내면에 어느 정도 악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커스의 잘못은 이러한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대신 강제로 교정하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권능의 남용.
오커스는 사람의 노력과 행운을 통해 거머쥘 수 있던 부를 스스로 직접 분배하기 시작했다.
근면하고 성실함을 갖추고 있는 데에다, 나누길 좋아하는 선한 이들을 필두로.
그런 마음을 지니지 않더라도 꾸준한 노력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내면의 악을 극복한 이들까지.
부의 여신은 은총을 내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판단 능력을 지닌 자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재물을 소유할 자격을 지닌 이들에게 상을.
남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자신의 창고에 감추어 둔 악인에게선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다.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군.’
‘새로 태어난 여신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시고 계셔.’
신의 권능에 의해 강제로 이행된 부의 재분배.
신들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누리게 된 피조물들은 물론 앞서 태어난 신들까지 오커스의 지혜를 찬양하고 그 현명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 시절의 오커스는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중이라는 걸.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동안 선행을 하면 반드시 보답이 따르는 이상적인 세계, 유토피아가 완성되었다고 믿으며 신들과 사람들은 평화를 만끽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난 다음, 신들은 서서히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술 발전과 문명사회의 진보가 더디어졌군.’
처음으로 문제를 발견한 건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였다.
‘200년 동안 새로운 제련 기술이 등장하지 않았어. 무언가 문제가 있군.’
그다음은 예술의 신 아폴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악기의 종류가 늘어나지 않아. 이래선 내 귀를 만족시키는 작품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그제야 신들은 사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잠시,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오커스는 자신의 잘못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야, 네가 성실하지 못하면 오커스 님의 은총을 입을 수 없단다.’
‘축복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선 네 안의 욕망을 다스리고 올바른 길을 걸어야만 한다.’
선한 사람들이 재물을 분배받는 유토피아가 도래한 이후로, 피조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고 이타적이고 성실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피조물들은 가진 것으로 남을 돕고 근면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과 사상의 진화가 더디어진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무엇 하나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태초의 차원에서 아웅다웅 다투면서도 권능을 개화시키고 자신들만의 완벽에 가까운 사회를 이륙한 신들과 달리 사람들은 이상적인 평화 속을 살아가면서 만족함을 알았고 분수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려 했다.
이기주의가 흐려지고 전쟁이 사라졌다. 신의 손에 의해 직접 행하여지는 부의 재분배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농경과 채집, 수렵 활동에 전념했고 200년 동안 이러한 사회적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원죄와 악은 어느덧 희석되었고 생존을 위해 선과 위선을 택하고 자신을 길들이는 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악인들은 자리를 잃었고 강제적인 부의 재분배로 인해 구매력이 사라진 결과 사회에서 도태되었다.
이기적 유전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온순한 이들만이 신들이 창조한 세상에 남게 되었다.
그들은 양 떼 무리처럼 순해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작은 행복에도 만족할 줄 알았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들어왔고, 만일 이를 손에 넣을 수 없다 해도 결코 악에 물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이타적인 마음을 지닌 자들만 남은 세상은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피조물들은 완벽한 환경에 의해 길들었다.
그들은 더는 남들보다 많이 소유하기 위해 농기구를 개량하지 않았고.
이웃에게서 빼앗기 위해 더욱 날카로운 날붙이를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배우자와 자식 곁에서 행복을 누리다 죽었다.
그들은 병과 자연재해에도 맞서지 않았다.
환경에 순응하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순진한 무리는 자신들의 부유함과 같이 그러한 고통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체념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려는 간악한 시도는 없었고.
병든 자들을 도우려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효율적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육체의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자신마저 장수를 원하는 일 없이 자신의 피붙이와 친구에게 가진 것을 나눠 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저승으로 향했다.
의술이 발전을 멈춘 세상에서 평균 수명의 기댓값은 더는 상승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른에서 마흔 살까지 살다 만족하며 눈을 감았고 그들의 식생활과 문화는 200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은 이렇지 않았어.’
‘무언가 대책이 필요해.’
신들은 오커스의 지혜를 찬양했던 만큼 그녀에게 책임을 묻지 못했다.
과거 호의를 품었던 동료를 비판하는 것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기에.
심지어 그들에겐 사람의 삶을 바꿀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200년 동안 오커스가 사람의 신앙과 숭배를 독차지한 탓에, 다른 신들이 인간에게 영감을 공급하고 축복을 내리는 일이 적어졌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오커스를 제외한 다른 신들의 존재를 잊게 되었고 이는 지독한 악순환이 되어 돌아왔다.
오커스를 제외한 신들의 권능은 옅어져서 피조물들의 세상에 더는 영향을 줄 수 없게 되었다.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힘이 남아 있는 건 오커스 디스파테르 단 한 명뿐.
‘모두, 제 잘못입니다.’
결국, 오커스는 스스로 동료들의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
오커스는 알게 되었다.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이, 거대한 탐욕이, 타인보다 자신을 우선하는 이기주의가.
그동안 피조물들의 삶을 발전시키고 윤택하게 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전쟁을 위해 발명된 기술이 농경에 적용되어 땅을 비옥하게 했고.
물을 길어 나르는 걸 거부하는 나태함이 수로를 만들게 했다.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가 왕이 되어 노예를 부렸고, 그들을 착취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거대한 방벽을 쌓았다.
만족하지 못하는 욕구가 미식의 발전을 불러일으켰으며.
지닌 걸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탐욕이 장생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게 만들었다.
사회와 기술, 그리고 예술과 문화가 발전한 계기 중 상당수는 이타적인 마음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챙기려는 이기심에서 태어났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진실이 틀림없었다.
‘늦었지만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겠습니다.’
신과 피조물 앞에서 오커스는 무릎을 꿇고 참회했다.
자신의 그릇된 이상이 세상을 고인 웅덩이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선한 이들에게만 부를 분배하는 세상의 시스템을 갈아엎기로 했다.
‘이 눈을 감추어 주십시오. 때가 되어 그것이 필요해지지 않는 이상은 찾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안구를 뜯어낸 오커스는 신왕 유피테르에게 오른쪽 눈을 감추어 줄 것을 부탁했다.
‘질서를 무로 되돌리고, 다시 한번 세상에 혼돈을 불러들이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녀가 전신전령을 다해 뱉어낸 신언神言이 세상을 다시금 뒤바꿨다.
선함과 정직함이 부를 분배받는 조건이 되지 않으며, 탐욕과 확률이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법칙에 세계가 물들었다.
범차원 세계는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더러운 탐욕과 이기주의가 선량한 사람들을 도태시키고 깔고 뭉갰다.
하지만 세상은 더는 고여 있는 웅덩이가 아니었다.
지독한 탁류이긴 해도 그 물줄기는 다시금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오커스는 자신의 결심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수를 바로잡았고 교훈은 텅 빈 안와에 새겨졌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 줄 누군가를 찾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