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52화
밀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으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주로 내가 정말로 린딘의 본점에서 근무하게 되면 점심 시간이나 저녁, 그리고 주말에 뭘 먹고 마실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직 가보고 싶었는데 혼자라 못 가본 곳이 그리 많다고.
적당히 인사부 여자 선배 요정이랑 같이 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물었는데, 선배는 맨날 남친이랑만 놀러간다고 한다.
의외였다.
밀라 녀석 생긴 걸 감안하면 여기저기서 대쉬 들어올 법도 한데.
뭐, 근데 밀라가 인사부 소속인 걸 감안하면 혹시라도 관계가 나빠졌다가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아예 남자들이 말을 붙이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빠만 오면 그동안 못 가봤던 곳들 싹다 돌아다닐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아, 맞다. 저 워터 파크는 꼭 가보고 싶은데. 그, 거기 있잖아요. 교외에 있는 곳.’
어쩌다 워터 파크 얘기가 나와서 이미 가봤고 좋았다고 답하니 밀라의 목소리가 급 암울해졌다.
‘…누구랑요?’
‘있어. 어린 애.’
‘헐? 누가 소개해준 거예요?’
기분 탓인지 수화기 너머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있어, 그런 애가. 3살 짜리 남자앤데 그날 걔 데리고 워터 슬라이드 타고 밥도 먹고 그랬어.’
‘아, 뭐야. 난 또. 데이트 같은 건줄 알았잖아요.’
‘뭔 개소리야. 아는 분네 아이 잠시 봐준 건데.’
밀라는 멋쩍게 웃고는 다른 화제로 갈아탔다.
아이가 있으면 좋다는 둥, 자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둥.
예전부터 이것저것 나를 챙겨주길래 누구 보살피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가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정적인 일면이 강했던 모양이다.
“가족인가. 예전까지만 해도 별생각 없었는데.”
아이 얘길 듣고 나니까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
어째서인지 내 뇌는 멋대로 밀라를 닮은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 왜 이러지 진짜.”
주책이다.
그냥 멋대로 생각한 거지만, 밀라는 멀지 않은 미래에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 같은 이미지다.
좋은 사람 만나서 오손도손 즐겁게 살 것 같은 인상.
그에 반에, 나는 어떤가.
솔직히 말해서 20대 후반이 되도록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어서 가족을 가진다는 상상 자체 몇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맨날 광장에 나가 푼돈 받고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택배 상하차도 해보고 노가다고 뛰어봤다.
이틀을 라면 하나로 버티고 침수되는 반지하에서 아득바득 이 악물고 살며 몸이 망가져가는 걸 돈이 없어 방치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꽤나 높은 액수의 월급이 따박따박 통장에 꽂히고 있으며.
식사 역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양 밸런스가 훌륭하고 맛도 뛰어난 것을 섭취하고 있다.
매달 건강 검진을 받고 저녁에는 틈틈히 운동도 하는 중이다.
인상 역시 망가져가는 인생에 지쳐있던 시절 거울을 봤을 때 눈에 들어오던 어두운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다만, 한 명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가정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가 묻는다면.
아직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
새삼스럽지만 주위의 애 키운다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예를 들어 플랫 씨라든지, 델 몬테 지점장님이라든지.
엘라마 소장은… 잘 모르겠다.
나한테 구는 것처럼 집에서도 저런다면 아이가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게 틀림없다.
세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인성파탄 독재자라든지 그런 거 말이다.
“…남의 집안 걱정할 때는 아니군.”
벌써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스물여덟이었던 나이도 스물아홉으로 변했고, 내년엔 빼도박도 할 수 없는 서른.
일도 중요하지만, 고객이 고난에서 벗어나고 행복해지거나 꿈을 이루는 것처럼 나 자신의 행복과 미래도 중요하다.
애초에 내가 승진도 해보고 가정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봐야 더 이 방면에 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세상에 관해 배울 것이 많은 애송이고, 경험해야 하는 기쁨과 슬픔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다.
남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보내기 위해서라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디서?
“…문화의 차이가 크긴 해.”
아무리 적응을 마쳤다 해도 나는 범차원 세계에선 외노자 신분이다.
같은 인간 종족이 어디에도 보이긴 해도 나는 미개척 차원, 즉 범차원 세계의 일원으로 편입되지 않은 3-1차원 지구 출신.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신토불이 토종 대한민국 남아다.
부모님이 돌아가신지라 이세계 며느리를 데려와 소개해 뒷골 잡게 만들거나 그대로 쓰러지게 만들 우려는 없긴 하다만.
그래도 나는 결혼은커녕 연애 경험조차 없는 모태솔로.
과연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이쪽 세상의 이성과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따름이다.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같은 일터에서 동료로 일하는 정도야 문제없지만, 상대가 가족이 된다고 상상하는 순간 수많은 난관과 부닥치게 될 미래가 훤히 보였다.
정말 내가 이세계 출신과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올 따름이었다.
최근 지구의 소식을 그리 많이 접하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휴가 내고 다녀왔을 때 잠시 들여다본 통계와 뉴스, 그리고 인터넷 여론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남녀대립부터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질 않나.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거나, 코로나가 끝나고 금리가 폭등해 세계 경제가 혼란에 빠지는 등.
그런 풍파 속에서 한국 역시 물가 상승과 집값 하락을 겪고 자산 시장의 축소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신혼부부들은 몇 년째 여행도 가지 못하고 끔찍한 신혼생활을 보내는 중이며 이혼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일단 한국으로 이쪽 사람을 데려가서 사는 건 무리고, 한국에서 상대를 찾아 결혼하는 것도 좀 고민해봐야겠네.”
집값이 비싼 거야 뭐, 서울이나 린딘이나 그게 그거다.
은행원의 연봉이 높은 편에 속한다지만, 린딘의 살인적인 집값을 감당하기엔 어림도 없다.
이러니까 본점이든 지점이든 마키나가 여럿, 횡령을 저지른 행원을 찾아낸 거겠지.
평생 일해도 막대한 대출 없이는 자기 집을 지닐 수 없으니 편법에 손을 대게 되는 거다.
그리고 나라고 어떤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앞으로 정말 본점에서 큰돈을 다룰 기회가 주어졌을 때엔 나 자신도 언제든 타락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지녀야 하겠지.
“제일 좋은 건, 서로 이것저것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과 진지하게 몇 년 교제하다 결혼하는 건데….”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 좋을 거다.
서로 업무도 사생활도 꿰고 있는 데에다, 자란 문화적 배경에도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상대.
근데, 그런 상대를 자연스럽게 만나 연애 결혼 하는 게 쉬웠더라면 내가 여태껏 모태솔로가 아니었겠지.
좀 더 밝고 사교적이고 이성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이쪽에서도 어떻게든 괜찮은 사람 만나서 주말마다 만나고 있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깨달았다.
“뭐지, 나 외롭나?”
가정이니 뭐니, 핑계가 많았다.
아마도 나는 범차원 세계의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외로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아….”
한창 일해야 하는 시기에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게 전부 최근에 일어난 전쟁에 업무상 엮여버려서 그렇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엔 출산률이 떡상한다나 뭐라나.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이들의 내면에서 후손을 남기려는 본성이 강하게 싹을 틔워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감정 역시 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이번엔 차원신용금고가 개입한 이후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아비아노를 상대로 바리타스가 일으킨 전쟁에서 이미 상당한 숫자의 군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업무 스트레스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어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번 안건을 해결하는 동안 사람의 목숨이 언제든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거대한 무언가에게 짓밟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직전에 겪은, 두 초콜릿 명문가의 자제를 지키다 최강의 암살자와 마주하게 된 경험 역시 영향을 주었겠지만.
“…괜히 적적해지네.”
죽음이 무서웠던 걸까, 죽은 후에 내가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결과에 대해 느낄 허무함이 두려웠던 걸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근데, 이딴 생각이 든다고 해도 갑자기 아무나 데려와서 뙇! 하고 자식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나는 연애의 ‘연’ 자도 냄새조차 맡지 못한 초보다.
서로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좋아해서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건 저 멀리 보이는 아득한 산봉우리 같은 목표.
한데, 지금은 산봉우리는커녕 산자락도 오르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너무 멀리를 볼 필요는 없다.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소화해가며 더 나은 인간이 될 준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뭐, 그래도 연애가 무엇이고 가정이 어떤 건지 시간 날 때마다 잠깐씩은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잠깐. 연애라고 하니까 무언가 잊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안건 처리하기 전에 엄청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다 말았다는 사실을.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주소록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세요. 마키나? 잠깐 시간 돼? 점심 같이 먹자.”
* * *
“3주 만에 뵙는군요. 사후 처리가 많이 바쁘셨나봅니다?”
오랜만에 만난 인공지능 소년은 몇 주 안 본 사이 더욱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변화해 있었다.
“어어. 아무래도 바리타스의 귀에 우리가 도운 이야기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 증거인멸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할 게 많았지. 도와준 게 고마워서라도 꼭 한 번 밥 사고 싶었는데 늦어서 미안.”
“괜찮습니다. 이미 차원신용금고가 저와 창조자님께 충분한 보수를 지불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건 보수랑 별개의 문제지.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건 예의라고.”
“흥미롭군요.”
세 살 꼬마아이의 얼굴을 한 마키나는 예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지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고작 몇 마디 언어로 다시 한번 상대의 노고를 치하하는 비효율적인 행동이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해 작업 효율을 높인다는 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비슷한 사례를 연구 중인데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순 없군요.”
“뭐, 그건 차차 배우면 되고… 오늘은 그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게 좀 있어서 말이지.”
마키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언가 기대하고 계시는 표정이군요.”
“벌써 그런 것도 알아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마키나는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김지안 대리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음, 별건 아니고, 그냥 연애 사업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음 순간, 마키나의 얼굴이 기계처럼 빳빳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