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49화

금요일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혈당 문제는 아니겠지만 휴가라서 낮에 좀 자 버린 탓인지 새벽 3시에 눈이 번쩍 뜨였고, 나는 한동안 정령들과 침대 위에서 뒹굴거렸다.

지난 몇 주에 걸쳐 누적된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잠을 많이 자면 되는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오래 잘 수도 없었다.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호르몬 이슈인가.”

대국 하나를 전쟁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은행원 몇 명이 머리를 맞대서.

물론 암살자라든지, 평범한 은행원 이상의 무언가를 지닌 동료라든지, 인공 지능이라든지, 범차원 세계 최고의 브로커라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덕에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아마도 무슨 수를 써도 재현이 불가능한 사건.

온갖 요행이 따라 준 결과 만들어진 팀이 이뤄낸 단 한 번의 승리.

그로부터 얻어낸 영광.

다만, 그렇다고 이걸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아비아노의 국민들처럼 즐거운 기분을 맛보는 건 불가능하다.

우린 어디까지나 백스테이지의 스태프와도 같은 존재.

각본을 만들고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하며 쇼를 연출하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를 이어 가는 주인공은 언제나 고객이다.

차원신용금고가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바리타스 측에 발각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바리타스 제국에도 차원신용금고의 지점은 존재하니까….”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광활한 바리타스 제국의 영토에 다수 존재하는 차원신용금고의 지점.

그곳에서 일하는 게 바리타스 제국의 승리를 바라던 현지인 행원이든 출장 간 이들이든 아비아노를 도운 게 차원신용금고라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바리타스 내의 점포가 싹 다 영업 정지 처분을 당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번 사태에서 아비아노의 승리에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딱히 바리타스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린 이번 안건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 바리타스 내 차원신용금고 점포는 아예 전력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만에 하나 그들을 끌어들였다간 바리타스에게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정보를 끌어올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인 상황에서 협조를 요청했다가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의 경우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겁에 질려 바리타스 군부에 공문 내용을 불어 버리는 사람이 나올 법도 하고, 제국의 방첩 체계에 이것저것 발각되면 큰일 나는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도 있다.

현지 점포의 협조를 얻을 수 없다는 제한 탓에 업무 난이도는 높았지만 그래도 은행이 보관 중인 고객의 자산이 이적행위를 저지른 은행이라든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제국의 국고에 들어가거나 충실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행원이 실직자가 되는 꼴을 볼 수는 없으니까.

“하아….”

그래. 그냥 인정하자.

솔직히 말해서 이 기쁨과 희열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냥 전국 방방곡곡에 이런 일을 해냈다고 떠들고 소문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이게 바로 공명심이라는 건가.

은행원으로서 명예 같은 건 신경 써 본 적도 없는데.

괜히 예전에 플랫 씨의 대출 신청 승인하고 신문에 같이 찍은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혔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빠 그때 장난 아니었어요. 본점 구내식당에서도 저 신입 누구냐고 막 여자들 떠들고―’

술자리에서 밀라가 말해 줬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은 나도 한 명의 사람.

크게 보면 조직의 일원으로서 움직이는 톱니바퀴긴 해도 나라는 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틀림없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은행 같은 보수적인 집단에 들어간 이상 자아실현 같은 단어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을 줄 알았는데.

괜히 대리 주제에 나대지 말고 살면서 지점장님 말대로 파벌 간의 싸움을 완충시킬 쿠션으로써 내 설 자리를 찾아보자고만 생각했는데.

“욕심이려나.”

욕심이라는 거, 나한테도 존재했구나.

새삼스럽지만 깨닫게 되었다.

딱히 연봉이나 처우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가슴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치켜드는 조금은 어두운 색깔을 띤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나는 욕심 외의 그 어떤 선택지도 고를 수 없었다.

“뭘 하고 싶은 걸까, 난.”

축구선수도 아니고, 은행원이 개인으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스타가 될 수 있는 직종도 아닌데.

“…….”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자아실현의 수단.

고작 그런 이유로 은행원이 된 건 아니었다.

실존하는 여신인 은행장의 부름으로 참가하게 된 면접.

특채로 뽑혀 정식 행원이 되었다.

누군가의 삶에 소소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라면 충분히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요약하자면, 내가 은행원이 된 계기는 사명감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은행원의 본분과 사명을 죽을힘을 다해 지키며 악전고투하는 지금, 나는 마침내 직업이라는 단어의 또 다른 측면에 눈을 뜨기 시작한 참이었다.

“난, 뭘 하고 싶던 거지.”

아마도 증명하고 싶었을 거다.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싸구려 캐리커처 그려가면서 광장의 간이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던 시절엔 맛볼 수 없던 충실감이 지금은 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해 제자리에 멈춰 서는 건 결국 인간으로서 아무런 발전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식 행원이 되고 나서 나는 밀도 있게 시간을 보내왔다.

업무를 처리하고 범차원 세계의 지역과 종족에 관해 학습했으며 출장소에서 내가 맡고 있는 대출 업무가 아닌 다른 분야에 관한 공부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업무를 대하는 사고방식의 변화와 유연성의 증가였다.

구D의 정석적인 일 처리에서 벗어났지만 효율을 중시하는 엘라마의 업무 스타일.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전쟁터에 뿌리를 둔 구E의 유연한 대응력.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아 가능한 모든 방식을 흑백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구C의 집요함.

지난 9개월 동안 나는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경험을 쌓으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이러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더욱 올라가야만 한다.

위로 가지 않으면 내 안에 잠든 가능성과 이곳에서 익힌 지혜를 적용해 볼 수 없다.

지금 내 직급은 고작 대리.

갓 초짜 티를 벗었지만 여전히 베테랑 행원들의 눈에 차지 않는 미숙한 신입이다.

나는 늘 원해 왔다. 기왕 은행원으로서 일하게 된 이상 큰 권한을 손에 쥐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휘두르겠다고.

개인의 대출 신청을 받아들이고 이를 본점의 심사 부서에 전달하고 고객과 직접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소소한 행복을 손에 쥐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도 당연히 보람차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저번에 겪은 세계수 담보 대출과 이번 아비아노의 안건을 처리한 이후로 내 안의 욕심이 기어코 눈을 뜨고야 말았다.

나는, 더욱 큰 힘을 쥐고 싶었다.

개인의 유용성과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욱 큰 권한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그만큼 도움이 간절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예를 들어, 국가의 공공사업에 차원신용금고가 출자할 수 있도록 물꼬를 틀거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고용이 창출되고 공공사업이 시행된 결과 인프라가 확충되어 사람들은 더욱 좋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내가 올라간다면, 이런 가슴 설레는 일에 직접 관여할 수 있다.

행장님의 비밀 작전 비스무리한 것에 동원되어 거대한 안건의 편린에 관여하기만 해도 이만한 희열이 느껴지는데.

만일 본점에서 일하며 대기업이나 공항 등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한 사업체의 회생에 관여하거나 그들의 신규 사업 전개에 손을 빌려줄 수 있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끝내 줄 거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그것들은 여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짜릿한 일감이지 않을까.

-휙

나도 모르게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의 조명을 향해 팔을 뻗었다.

“…가고 싶어.”

본점에서 일하고 싶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이라면 모두가 한 번씩 꿈꾸는 금력金力의 중심.

손바닥으로 가린 조명이 태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주먹을 쥐었다.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다.

나머진, 어떻게 그곳에 도달하느냐인데.

“다음 인사 시즌… 언제였더라.”

현실적으로 생각해선 다음은 무리고, 인사이동까진 좀 더 걸리려나?

* * *

같은 시각, 그레이트후리텐의 수도 린딘.

차원신용금고 본점.

“정말로 성공했군.”

집무실에 홀로 앉은 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위스키가 담긴 술잔을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완벽에 가까운 구체 형태의 투명한 얼음이 잔 안에서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며 녹아 가는 광경은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날려 보내 주는 것이었다.

시간은 새벽 4시.

잠이 필요하지 않은 신의 육체라고 해도 정신적인 피로는 필멸자들과 똑같이 쌓이기에 평소라면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오커스 행장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많이 둔해졌군. 이 정도 미래도 확실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어두워졌을 줄이야.”

오커스는 안대를 낀 오른쪽 눈을 매만지며 자신이 잃어버린 권능을 떠올렸다.

부의 신인 그녀의 눈은 좌측과 우측 안구가 한곳에 모여 있을 때에 사람의 선악과 잠재력, 그리고 가까운 미래마저 꿰뚫어 보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오커스는 신들이 지배하던 고대 시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선하고 부지런한 자를 아꼈고 자신이 지닌 힘으로 그들을 부유케 했다.

결과, 세상은 공정해졌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악을 억누르고 선행과 노동에 힘썼다.

당시의 오커스는 오만했다.

세상의 모든 부유함을 손에 쥐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영향으로 인해 생겨난 세상의 규칙이야말로 완벽한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게으르고 악한 자들이 도태되는 광경을 보며 즐거움마저 느꼈다.

하지만 신들의 왕 유피테르는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딸아. 못 본 사이에 교만해졌구나. 네 교만은 피조물들의 미래까지 망치고 있단다.’

아버지, 유피테르의 말은 가혹한 것이었다.

네가 사랑한 피조물들이 네 비호로 인해 모든 발전을 포기하고 고정된 가치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유피테르는 그렇게 말했다.

당시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오커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피조물들은 더는 머리를 쓰지 않았다.

무언가를 발전시키기보단 정해진 규범을 따라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된 세상엔 무엇 하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농경에 힘썼고, 그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병마와 재해 등 세계의 법칙에 의해 닥치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게으르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욕망.

오커스가 부정해 왔던 그런 어두운 면들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때 모든 종족은 발전을 멈추었다.

오커스가 스스로의 눈을 도려낸 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직후의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