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48화
무슨 수를 써도 차원 결계를 돌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리타스 우주군의 대응은 퍽이나 수동적이었다.
지휘를 맡겠다며 콧김을 씩씩대던 제1우주군의 중령 역시 흔히 말하는 뇌 정지 상태에 빠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결계를 뚫어야 할 제2우주군 6함대의 기함이 머나먼 변방의 차원에 좌초되었다.
상상 못 할 변수를 대비해 결계를 열어 줄 아비아노 측 배신자를 수배해 두었지만 그마저도 직전에 아비아노 육군 헌병대에게 연행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바리타스 측의 계획을 전부 꿰뚫어 보고 대책을 마련해 둔 것만 같은 상황.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타이밍이 너무나도 정교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비아노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게 아닐까.
머큐리 유니콘이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 것도 놈들이 역장 발생 장치에 무언가 농간을 부려 둔 탓일지도 모른다.
내통자의 존재 역시 사전에 눈치채고 바리타스가 결계 해제를 위해 보수를 입금한 직후 체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 차원 결계는 여전히 건재.
바리타스 우주군이 보유한 전함이 총출동했지만 이대로는 하는 짓도 없이 닭 쫓던 개처럼 결계 너머의 푸른 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일 여기서 포위를 푼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황제와 제국의 명예에 먹칠한 죄, 그리고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친 죄를 물어 군사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제국의 신민들이, 콧대 높은 황가가 자신을 가만히 둘 리는 만무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대로 포위망을 유지해 그동안 아비아노의 자원이 바닥을 치는 것을 기도하는 수밖에.
“잠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모부가 예상했던 아비아노의 식량과 연료 비축량은 진즉에 바닥을 쳤을 터.
이대로 며칠만 버티면 놈들이 먼저 백기를 들어 주진 않을까.
“…….”
함장은 찰나의 망상을 떨쳐 냈다.
모든 것이 적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요행을 바라는 건 태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군인은 언제나 근성을 보여야 하고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업적을 이뤄야만 한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벼랑 끝에 몰린 건 자신이 아닌 아비아노다. 끝까지 버티면 이기는 건 바리타스 제국이 틀림없다.
굳은 의지를 내보이며 함장은 포위망을 구성한 함대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역시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지잉!!
-지이잉!!!
함내에 울려 퍼지는 긴급 알람. 무슨 일인가 싶어 오퍼레이터를 쳐다보자 노골적으로 낭패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스템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오버라이팅되고 있습니다!!”
“뭐?!”
“머큐리 유니콘으로부터 뉴럴 링크를 통해 전송된 데이터가 연결된 모든 함선을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분명 머큐리 유니콘은 모의 훈련과 발진 전에 몇 번씩이나 제국 최고의 기술자의 검사를 걸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시스템에는 악성 프로그램이 남아 있었다.
함대를 한 몸처럼 움직이게 만들어 주는 뉴럴 링크는 머큐리 유니콘을 통해 다른 함선에 중계되는 시스템.
뇌세포를 배양해 만든 생체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정신적인 파장을 마도 공학으로 증폭시켜 거리가 멀든 차원의 벽이 존재하든 딜레이 없이 연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궁극의 통신 기술이다.
이런 연고로 머큐리 유니콘이 다른 차원에 좌초되었어도 뉴럴 링크의 연결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이 연결을 통해 다른 전함의 생체 컴퓨터로 누군가가 설치한 백도어가 흘러드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연결을 차단해라!”
“불가능합니다! 대응할 수 없는 속도로 함의 기능이 잠식되는 중입니다!”
뉴럴 링크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해킹.
아비아노를 포위하고 있던 함선은 사람도 보안 프로그램도 대응할 수 없는 속도로 침식당했다.
“조종이 불가능합니다!”
“쓰로스터가 자동으로 역분사 개시!”
“본국에 연락해 컨트롤 권한을 탈취한 놈을 추적해라! 근거지를 위성 레이저로 정밀타격하면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어!”
정체불명의 해커가 있는 곳이 아비아노만 아니라면 무력화할 수 있다.
이런 수단이 있는데 진즉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아비아노가 본래 이만한 전자전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
즉, 놈들이 고용한 해커는 외부에 있다.
어느 차원에 있든 바리타스의 위성 포격은 방공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국가의 인물 하나를 골라 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해커를 암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일로 인해 비밀병기가 노출되고 외교적인 비판을 받게 되겠지만 이미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위치 추적 중!”
“발견했습니다!”
“암살 위성 저격을 준비!!”
“불가능합니다!!”
“어째서지?!”
“조종 신호 발신자의 위치는… 바리타스 우주군 함대 전체입니다!!”
함장의 입이 떡 벌어졌다.
“출처 불명의 인공 지능이 시스템의 자원을 소모해 주체적으로 함대를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인공 지능의 소행.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우주군 군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모든 함선이 바리타스 제국으로 수미를 돌려 잇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 * *
행성을 포위하고 있던 바리타스 우주군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량한 해커에게 조종당해 그대로 물러난 걸 마지막으로 제국은 휴전을 제안했다.
물론 아비아노 측은 이를 휴전 따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승리라고 생각했고 범차원 세계의 다른 국가 역시 의견이 같았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네.”
나는 맥주 캔의 절반을 한 번에 들이켠 다음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큐우
-규우귯
모처럼 돌아온 숙소는 쾌적했다.
정령들은 몇 주 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겨 주었다.
놀랍게도 실내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는데 정령들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보는 걸 보니 넷이서 힘을 합쳐 청소라도 해 둔 모양이었다.
괜히 기특해서 녀석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다음 호텔에서 사 온 달달한 마카롱 세트를 그 앞에 깔아 주었다.
저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녀석들 은근 이것저것 잘 먹는다.
생긴 건 꼭 햇빛과 이슬만으로 살아갈 것처럼 생겨 놓고서, 생선이나 고기 빼곤 이것저것 잘 먹는다고 해야 하나.
특히 최근엔 단 것에 맛을 들였는지 설탕이 들어간 음식을 주면 좋다고 꺅꺅대며 나눠 먹는데 그 모양새가 상당히 귀여워 관찰하는 맛이 있었다.
“밀라가 보면 좋아할 것 같은데.”
언뜻 연수원에서 밀라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해서 사회인이 되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게 꿈이라고.
문제는 인사부 업무가 장난 아니게 바빠서 막상 정식 행원이 된 다음엔 엄두도 못 내고 있다는 거지만.
“…밀라 정도면 입도 무거우니까 얘들 봐도 어디에 말하고 다니진 않겠지.”
최근 특채 동기들과는 한 번씩 만나거나 연락을 한 참이다.
이로울은 이번에 잠입 작전에 직접 참가했었고.
과타노차는 자기 일도 아닌데 마키나와 함께 전자전을 도와주었다. 물론 상응한 대가를 받아 갔지만.
아이작 역시 조부인 래리어트 그룹 회장을 통해 바리타스의 눈을 피해 차원 관문을 열 물류창고를 빌리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유일하게 밀라만이, 이번 안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몇 주 동안 머릿속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입행 이후 동기와 2주 넘게 연락을 안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지라 괜히 미안해질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말 좀 걸어 볼까. 자고 일어난 다음에….”
모처럼 집에서 맞이하는 주말이다.
적당히 인터넷 기사 뒤지다가 내일 느릿느릿 일어나 밀라랑 수다나 떨든가 해야지.
일단은 상황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후속 보도 좀 봐야겠다.
“어디 보자….”
이미 아비아노 사람들이 커뮤니티랑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불꽃놀이 하면서 바리타스 황제 사진과 국기를 소각하는 세리머니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은 접한지라 벌써부터 인터넷 언론에서 어떤 식으로 보도 중일지 기대가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오오.”
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한 아비아노 시가지를 중계한 영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경이로웠다.
수천, 수만 명의 시민이 수도 아비아노폴리스의 거리로 뛰쳐나와 춤판을 벌이고 있었다.
새로이 제정된 아비아노의 전승 기념 주간을 맞이해 성대한 축제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설치된 간이 무대에서 실력을 뽐내는 아티스트들은 해묵은 한이라도 풀어내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거리에는 함성만이 가득했다.
헬기에 탑승한 카메라맨이 찍은 아비아노폴리스의 야경은 그야말로 불야성.
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최악의 제국을 상대로 국토를 피해 없이 지켜 냈다는 자부심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다는 뿌듯함이 화면에 비친 시민들의 얼굴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그들의 미소를 지켜 내는 데에 차원신용금고와 나는 분명히 한몫 거들었다.
“…….”
무언가 뭉클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은행원이 된 이래로 늘 꿈꾸어 오던 종류의 보람.
누군가의 삶이 달라지는 데에 작게나마 도움을 보탰다는 만족감.
정식 행원이 된 이래로 몇 번씩이나 느껴 온 감정이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각별했다.
“역시 이거구나.”
솔직히 말해서 몇 번씩이나 고민해 보았다.
여러 파벌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살얼음 같은 행내 정치판을 견뎌내며 전진할 이유가 있을지.
그리고 매번 내가 내린 답은 언제나 같았다.
온갖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과로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일을 할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비록 내 스스로 얻은 힘이 아닌 주어진 능력이라 해도,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해도.
이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했고, 내 안에 선함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머물 수 있었다.
몇 번씩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은행원으로 남은 건 잘한 짓이었다.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골랐네.”
은행원은 나의 천직이다.
결과적으로 지구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지만 나는 지금 이 생활과 직업에 만족하고 있다.
돈 계산과 고객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해야 하는 까다로운 일을 해내야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으니까.
“…행장님하고도 좀 얘길 해 봐야겠지.”
그러니까, 한 번쯤은 날 지옥 같은 삶에서 꺼내 범차원 세계로 데려와 준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마땅하다.
겸사겸사 이것저것 궁금한 걸 물어볼까 싶은데.
“후우.”
그동안 과할 정도로 겁을 내고 있었다.
행장님이 이 세계에 나를 부른 이유가 별것 없을까 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정해진 운명이 아닌 우연이 연속된 결과일까 봐.
그냥 저번에 본점 불려갔을 때 잠시 시간 내 달라 하고 궁금증을 해결했어야 했나.
“모르겠다.”
맥주를 마저 비우자 점점 취기가 올라와 몸이 나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 금요일인데 복잡한 거 생각하지 말자.
“읏차.”
나는 마지막으로 기지개를 켠 다음 책상 위에 놓인 배지를 만져 직무권능을 발동했다.
화면에 비춘 아름다운 아비아노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우웅
화면 앞에 나타난 저울은 우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당분간은 걱정 없겠네.”
나와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지켜 낸 별. 아비아노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침대에 누우니 솔솔 졸음이 쏟아졌다.
긴장이 풀리니 바로 이 모양이다. 주말이 지나갈 때까진 이대로 릴렉스하고 지내야지.
오늘은 모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