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9화
작전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엘라마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앞으로 함께 바리터스를 상대하게 될 아비아노 정부의 고위 관료들과 장관급 인사, 그리고 정‧재계 거물들과 군 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었다.
물론 직접 만난 건 아니다.
엘라마와 우린 수십 개의 모니터가 설치된 어두운 방에서 조용히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화면엔 회의실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 여러 대가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한 참석한 이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라성을 방불케 하는 면면들이었다.
아비아노 공화국의 국가 원수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각 육해공우주군의 참모 총장, 아비아노의 경제를 책임지는 거대 기업의 총수, 여야 당 대표는 물론 정보 기관의 수장에 미디어 그룹 관계자에 종교 지도자까지, 각계 계층의 오피니언 리더까지.
단순히 위기 대응을 하는 것을 넘어 국가가 지닌 힘을 하나로 모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는 구성.
당연히, 모여 있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거웠다.
차원신용금고 은행장의 전권대리 자격으로 아비아노로 건너온 엘라마는 이미 스틸레토 대통령과 일련의 대화를 마친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번 회의 자체가 차원신용금고를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내는 일 없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첫 단계다.
“일단은 전부 불러 모으는 데엔 성공했군요.”
“대통령의 부탁이니 다들 어려운 시간 내서 모인 거겠지.”
“제가 살던 세상에선 좀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역시 범차원 세계는 신기하네요.”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다.
지구였다면 일단 잘 사는 선진국이 갑자기 적국에게 포위될 정도로 전쟁에서 밀린다면, 그런 일이 생기기 훨씬 전에 국가 수뇌부와 부자들은 진즉에 먼 곳으로 피신했을 텐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비아노의 각계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은 도피하는 일 없이 국내에 멀쩡히 남아 있었다.
지구 기준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일 아닌가, 이거.
어떻게 상류층이 저렇게 책임감 있게 도망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걸까.
도망치지 않은 건가.
그게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도망치지 못하고 이 땅에 발을 묶인 건가.
-삐빅
정체를 숨기고 나를 통해 필요한 도움을 제공 중인 과타노차가 때마침 요청한 자료를 보냈다.
“소장님. 이거….”
과타노차가 보낸 자료에는 화면 속 회의실에 모인 이들과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GPS를 해킹해 확인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최소한 가족들은 피난시켰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군.”
“그러게요.”
과타노차의 조사에 따르면 저기 모인 오피니언 리더들과 고위 공직자들의 반려자와 자식은 모두 아비아노 국내에 남아 있었다.
최소한 전쟁의 리스크를 고려해 국외로 가족을 피신시켰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믿어지지 않았다.
“겁쟁이들이 없는 건가. 아니면 대통령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더욱 선한 이유일지도 모르죠.”
“네놈은 좀 더 약아질 필요가 있어. 세상 사람들, 특히나 남들 위에 서는 놈들이 그런 새파란 애송이 같은 동기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네.”
뭐, 예상은 했다. 저들도 사람인 이상 자기 보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텐데 그대로 가족과 함께 조국에 남아 있는 데엔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저들이 가족을 데리고 국외로 도피하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 떠올랐다.
첫째. 아비아노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거나.
둘째. 바리터스 측에서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병력을 일으켰거나.
셋째. 그것도 아니면 도주 시도를 대통령이 일찌감치 차단하고 협박하고 있거나.
넷째. 정말로 미친 듯이 아비아노라는 나라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책임감이 흘러넘쳐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려 한다거나.
분명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 혹은 여러 이유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리라.
“저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아비아노라는 나라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통솔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이는군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화면에 보이는 대통령의 풍채가 더욱 늠름하게 느껴졌다.
스틸레토 대통령은 아비아노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사내로 격투가 출신이었다.
오랜 단련으로 키운 근육질의 육체는 환갑을 넘어선 나이가 무색하게 건장했고 그 눈빛은 사자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흔히 다들 생각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독불장군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지만 그는 독재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보단 여태껏 보여 준 삶의 행적 하나하나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 연임에 성공한 스타 정치인.
영토를 적극적으로 늘리려고 발버둥 치던 바리터스가 내정 문제에 부닥쳐 원동력을 잃은 결과 아비아노는 지난 세기를 큰 위기 없이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구E의 융자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은 바리타스가 아벨바늄을 발견해 재기에 성공했고, 그들은 현재 아비아노의 숨통을 조이는 중이다.
내가 예상하기에, 연임 직후 이런 힘든 상황과 맞닥뜨린 스틸레토 대통령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게 틀림없었다.
“설득했거나, 협박했거나, 어느 쪽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들에게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도록 만들었겠군요.”
“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국내에 묶어 두었을 거야. 전쟁을 하려면 돈이든 사람이든 쓸데없이 많이 필요한 법이니까.”
최소한의 손실로 국민의 생명만 지키고 가진 모든 것을 제국에게 내주는 대신, 대통령은 결사 항전을 표명했다.
애초에 바리터스가 이번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착수한 건 내부 검열.
조금의 정보라도 외부에 흘리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목을 쳐 내고 비밀리에 군을 일으켜 아비아노 포위 작전을 준비했다.
아비아노의 내부자와 먼저 교섭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대신, 뇌물이든 뭐든 자신들이 지출해야 할 돈을 전부 줄인 다음 상대의 전부를 놓치지 않고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겠다는 심산이 분명했다.
만일 침공에 관한 정보가 이른 단계에 아비아노의 끄나풀에게 새어 나갔다면, 수많은 아비아노의 부자들이 자산을 갖고 국외로 도망치려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정보를 흘리지 않음으로써 바리터스는 그물망에 든 먹잇감을 흘리지 않고 통째로 약탈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차피 군사력으로 아비아노는 자신들을 이길 수 없으니 가장 리워드가 큰 방식을 채택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시도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존재했다.
만일 아비아노의 내부 정보를 대가로 받는 대신 상류층에게 일찍 침공 사실을 알렸다면 그들을 약탈할 기회가 사라지겠지만, 먼저 침공을 시작해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한 상태로 아비아노 정부의 핵심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하면 어떻게 될까.
저들은 자신들을 아비아노에서 꺼내 달라고 매달리며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려 할 것이다.
바리터스의 황제와 의회는 힘을 지닌 자의 논리를 무엇보다 사랑했다.
그렇기에 놈들의 행동 논리에는 문명인다운 교섭과 기브 앤 테이크의 마음가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추측 가능한 건 지금 자의 반 타의 반이든 온전한 타의에 의한 것이든 아비아노 국내에 발을 묶인 사회 지도층 중에는 이미 바리터스의 유혹에 넘어가 정보를 빼돌리는 등 적들에게 회유당해 협조 중인 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오늘 대통령이 사회 각 분야를 이끄는 우두머리들을 소집한 이유는 단 하나.
혹시 모를 배신자의 존재를 미리 제외해 내가 세운 전략에 관해 단 한마디도 바리터스에게 새어 나가지 않도록 정보를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리스트에 올라간 사람은 전부 모인 듯하니 시작하도록 하지.”
엘라마는 배지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말을 이었다.
“직무권능 발동.”
화면에 비춘 70명의 사람들을 지켜보는 엘라마의 눈이 하얀 광채로 뒤덮였다.
* * *
잠시 후.
“맙소사.”
회의 참석자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리스트는 동그라미와 X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쥐새끼가 스물둘이나 섞여 있을 줄은 몰랐군요.”
“그러게 말이다. 거진 3분의 1이 내통하고 있을 줄이야.”
엘라마와 나, 그리고 다른 행원들은 체크된 서류를 확인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소장님의 직무권능, 성능 확실하네요.”
“오히려 틀릴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 힘으로 판독한 결과는 쓸데없이 정확해서 말이지.”
엘라마가 이마를 짚으며 고뇌에 찬 신음을 뱉었다.
슬리크 엘라마의 직무권능, 그것은 바로 집단에 섞인 배신자를 색출해 내는 능력이었다.
그가 행장에게 신뢰받는 가장 큰 이유는 세 은행을 하나로 묶은 불안정한 집단인 차원신용금고에 해를 끼치는 자를 일찍 판별해 배제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의 능력은 직급이 오를수록 빠르게 진화해 지금은 모니터 너머로 쳐다본 사람의 배신 여부와 정도마저 판별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비슈티 과장이나 라즈마 과장 등 자신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타 파벌의 에이스를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 데려온 것도 정말 위험한 타이밍에 미리 배신을 눈치챌 자신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두 과장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쉽게 엘라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전에 자신들의 파벌 간부에게 지시받은 사항을 이행했을 때 엘라마에게 이미 전부 들통이 나 있었다는 사실에 수치심이든 죄책감이든 뭐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래서 직무권능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쓸데없이 내 눈치만 보고, 짜증 나는 자식들 같으니라고.”
엘라마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대고 있었는데, 그로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하는 지금 쓸데없는 생각이 부하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대로 대통령과 나머지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진짜 계획을 알리고 나머지 놈들에겐 거짓 정보를 흘려서 역첩보를 시도하는 수밖에.”
“가둬 두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들일 것이오.”
내 질문에 대답한 건 비슈티 과장이었다.
“만일 내통하는 자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터스가 알게 되면 그에 맞춰 계획을 변경할 가능성이 높소. 엘라마 소장의 말대로 이대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진짜 계획을 뒤에서 진행하면 그만이오.”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마음에 걸리는 게 남아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어요. 저희 쪽에서 차원 관문 사용해 필요한 물자를 공급 중인 사실이 내통자들을 통해 바리터스에 흘러가진 않을까 싶거든요. 들키는 순간 바리터스가 행동을 일으킬 겁니다. 막말로, 차원신용금고 본점에 테러를 가한다든지….”
차원 왜곡 결계의 예외 통과 코드를 적용한 초대형 차원 관문은 키키와이 섬 북부에서 조립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이것의 존재를 바리터스에 감추지 않는다면 우린 꼼짝없이 저들의 ‘적’이 되어 버리고 말 터.
“그 문제에 관해선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해답을 제시한 건, 아이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