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8화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엘라마는 콧방귀를 뀌는 거로 모자라 아예 대놓고 내 의견을 깔아뭉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생각보다 해 볼 만 할지도 모르겠군.”
“그쵸?”
-쾅!
대답하자마자 엘라마가 서류로 내 정수리를 후려쳤다.
“아이디어가 좋아 봤자 그런 가벼운 태도로 임했다간 망하기 딱 좋다는 걸 기억해라, 멍청한 녀석.”
“네에, 알겠습니다아….”
“사내새끼가 말 늘어지는 거 봐라.”
툴툴대긴 했지만 사실 엘라마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일반적인 은행원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유형의 아이디어를 짜내는 데에 소질이 있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데에 필요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건 산전수전 다 겪은(특히나 불파사 비슈티 과장은) 베테랑 행원인 엘라마와 라즈마, 그리고 비슈티가 훨씬 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행장님께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라고 하셨긴 해도 바로 위법 행위를 저지르려 하다니. 간땡이가 부었나.”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인데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상대는 기업도 아닌 국가지 않습니까.”
들키지 않으면 위법이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모두 사용해야만 한다.
넘어선 안 되는 선이 있다고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일할 때 지점장님이 말한 적이 있지만, 이번 사태의 경우 아무리 나 자신에게 물어봐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상대는 강대한 제국이다. 법이고 나발이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휘두르는 규격 외의 괴물.
놈들과 맞서는 과정에서 최저한도의 도덕이라 불리는 법을 의식했다간 패배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바리터스는 자신들의 법률 탓에 은행에서 빌린 돈의 지급을 미룬다는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는 놈들이다.
그런 자식들이랑 싸우면서 도덕이나 법 같은 걸 신경 쓰는 건 그야말로 패배하는 지름길이 아닌가.
“소장님도 아시겠지만 이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키지만 않는다면 저희에게 대의와 명분은 충분합니다. 법 같은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걸리지 않고 놈들을 조질 수 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과격한 자식. 뭐, 그런 구석이 있으니 네놈을 뽑아온 거긴 하다만.”
엘라마는 웃고 있었다.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행원을 선발할 때 분명 내가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전부 조사한 다음 결정을 내렸겠지. 그게 아니면 ‘그런 구석’ 같은 말을 할 리가 없다.
내가 필요하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인간인 걸 충분히 인지한 다음 자신의 부하로 거둔 거라면, 이 정도 리스크는 보스로서 감수해야겠지.
나야 마음이 가볍다. 뭔 짓을 저지르든 엘라마가 시켰다고 말하면 되는 거니까.
행장님이 이미 이번 일에 관해선 엘라마를 전권대리로 선택하지 않으셨나.
우리가 움직인 결과가 어떻더라도 책임은 엘라마가 지는 거다.
그게 위에 서는 자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니까.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라고. 나한테 얼마나 폐를 끼쳐야 속이 시원한 거냐.”
특유의 짐승처럼 사나운 웃음을 내비치는 엘라마는 말과 달리 퍽이나 즐거워 보였다.
* * *
작전 입안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내가 제시한 기본적인 골자는 세 가지.
첫째. 최신형 우주 전함을 경매에 내놓은 리베르토티에게 전함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마련해 주는 것.
리베르토티는 자금난에 처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전 나라를 지배하던 독재자가 혈세를 쏟아부어 제작한 거대 전함을 경매에 내놓기로 했다.
만일 차원신용금고가 그들에게 충분한 자금을 융자해 줄 수 있다면 리베르토티는 굳이 전함을 팔며 범차원 세계에서 비판 여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리터스 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매물을 내놓으려 하는 것이 아비아노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로 간주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리베르토티 측 역시 이러한 외교적 압력에 시달리며 바리터스와 그들에게 협조하는 국가를 상대로 한 범차원적 경제적 제재의 대상에 포함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지라 경매는 그야말로 고육지책.
꼬우면 아비아노나 다른 나라에서 전함을 구매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하는 리베르토티의 정치가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가 보기엔 그 전함을 구매하는 것 자체가 범차원 세계의 경찰로 활약하던 아비아노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무기를 손에 넣어 중대한 안보위협의 주체가 되겠다는 뜻이라 바리터스 외에 구매할 만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찾아보자면 취미로 이런저런 호사스러운 무언가를 모으는 말도 안 되는 갑부 정도가 있겠다만.
…잘 생각해 보니 주위에 그만한 돈을 지닌 사람이 있긴 하군. 남에게 돈 빌릴 필요 없이 현금박치기로 어지간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고객님이.
어쨌든, 리베르토티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준다면 우린 이번 사태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경매 자체를 취소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경매가 진행되는 일자를 리베르토티의 사정이랍시고 한참 뒤로 미루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리고 내가 제시한 작전안의 두 번째 핵심.
여기서부터가 진짜로 법이고 나발이고 X까고 할 일 하자는 마인드로 짜낸 아이디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리베르토티가 매물로 내놓으려 하는 전함을 파괴하는 것.
당연한 얘기지만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작전이다.
전함이 지닌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아무리 낙찰받으려는 게 바리터스밖에 없다 해도 결과적으론 경매가가 상상을 뛰어넘는 데까지 치솟을 건 자명한 사실. 바리터스의 낙찰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아비아노의 우방이 상위 입찰을 시도할 테니까.
아비아노가 직접 경매에 참가할 수 없으니 그들이 끼었을 때를 상정한 낙찰가보단 대폭 싸지겠지만, 어느 쪽이든 리베르토티의 갈증을 채워 줄 수 있을 만한 금액이 경매를 통해 들어올 거란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고로, 전함의 경호에는 리베르토티의 척박한 토양에서 훈련받은 강인한 베테랑 군인들이 동원될 것이다.
이들의 눈을 피하고 붙잡히거나 증거를 남기는 일 없이 전함을 폭탄으로 날려 버리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심지어 그 과정에서 인명피해도 내는 일 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이것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카드가 존재했다.
무장은행이라 불리던 구E의 최고 전력인 불파사 비슈티와 감사부에서 성실히 업무를 보고 있는 심판의 천사, 그리고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해 달라고 말하며 번호를 건넨 지상 최악의 암살자를 동원할 수 있다면.
“다분히 현실적인 구상이 되었군.”
“해킹으로 보조해 줄 사람도 둘은 확보해 두었습니다. 최강의 컴퓨팅 파워와 실력을 모두 갖추고 있죠.”
“…네놈에게 그런 인맥이 있었던가.”
“네.”
당연히 마키나와 마키나를 창조한 과타노차의 이야기였다.
둘의 힘을 빌린다면 제아무리 바리터스의 보안망이 대단하다 한들 순식간에 셧다운 해 세 명의 잠입 요원이 활동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전함이 완파되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비아노의 차원 결계를 돌파할 때 필요로 하는 기능을 무력화시키기만 해도 전함을 수리하는 데에 말도 안 되는 자원과 시간이 필요해질 터. 전함을 손에 넣게 된다 해도 바로 침공할 수 없게 되니 더욱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자리에 모인 전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의 힘으로 가능할까 싶었던 임무가 느닷없이 현실성을 띠기 시작한 탓인지 묘한 흥분과 고양감이 우리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입안한 작전의 세 번째 골자. 그것은―
“마지막으로 바리터스 제국을 낚을 수 있는 최고의 미끼를 뿌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바리터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사기를 치는 것이다.
아무리 놈들이 돈이 많다 해도 전쟁에 사용 가능한 예산은 제한되어 있다.
만일 놈들이 하늘 끝까지 치솟은 전함의 경매가에 질린 와중 아비아노의 차원 결계를 돌파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제시된다면 놈들은 분명 군침을 흘릴 것이다.
예를 들자면….
“돈을 더욱 아낄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겁니다. 아비아노 정부의 핵심 관계자인 척 바리터스에게 접근해 딜을 거는 거죠. 이만큼 돈을 준다면 차원 결계를 해제해 바리터스의 우주 함대를 행성 대기권으로 초대해 주겠다고 꼬드기는 거죠.”
“호오.”
“당연한 소리지만 이건 전부 사기극입니다. 끝까지 놈들에게 들키는 일 없이 돈을 챙긴 다음 결계를 열지 않으면 놈들은 전함을 낙찰할 돈을 잃게 될 겁니다.”
“그에 더해 놈들에게 70년 전에 빌려주었던 원금과 이자를 수 배로 불려 돌려받을 수 있겠군.”
“아, 이건 그냥 추가 수입이죠. 그 돈의 일부를 경매에 할애한다면 바리터스의 남은 예산을 완전히 짓밟을 수 있을 겁니다.”
“바리터스의 자금을 줄이고 이쪽의 총알을 늘려 상대적 우위에 서자는 이야기인가.”
“정확합니다.”
무엇보다, 이 방법을 사용해 바리터스가 침공을 포기하게 되었을 경우 우리는 무자비한 채권 회수를 진행할 예정이다.
놈들을 털어먹은 다음 아무것도 모르는 척 70년 전의 빚을 돌려받을 수 있다니, 최고의 작전 아닌가.
“…좋다. 승인하지.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나머지 인원은 김지안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구체화시켜 내일 아침까지 제출하도록. 이번 안건은 최고 등급의 기밀 사항으로 진행하고 외부의 협조를 요청할 경우 추가적인 보안 채널을 마련해 연락을 시도하도록 하지.”
엘라마는 심각한 얼굴로 연신 보안을 강조했다.
당연한 일이다. 이사회 OB나 현역 이사 중에도 바리터스에게 협조 중인 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데 기밀 사항을 새어 나가게 하는 건 놈들에게 대비할 방법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작전에 관한 정보가 외부에 새어 나가는 순간 바리터스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차원신용금고에게 소송을 걸 것이다.
우리가 저지르려 하는 것은 명백한 범법 행위. 증거가 드러났을 때 범차원 재판소와 그레이트 후리텐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모든 것을 감춘 채 작전에 필요한 인력에게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건 필수 조건.
그에 더해 앞으로 협의할 아비아노 정부에도 스파이가 숨어 있을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하며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아마도―
“보안에 과한 사항은 일률적으로 내가 지휘하겠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놈들에겐 내가 어떤 직무권능을 지니고 있는지 알려 준 적이 없었군.”
엘라마는 주머니에서 꺼낸 배지를 가슴에 달고 우리의 얼굴을 살폈다.
듣고 보니 나는 이 자리에 앉은 이들의 직무권능을 아이작 말고는 한 명도 모르고 있다.
“두 번 말할 생각 없으니 귓구멍 파고 똑바로 들어라. 내게 부여된 직무권능은―”
다음 순간, 엘라마의 말을 들은 내 안에서 자그마한 안심감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