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0화

수십 수백의 차원에서 거대한 호텔 체인을 운영하는 래리어트 그룹은 범차원 세계 굴지의 거대 기업이었다.

그 지배 구조는 래리어트가 자랑하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견고하기 그지없었는데, 골자 자체는 모두가 아는 친족 경영의 형태였다.

창업자 오보우로게 래리어트로부터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가족 경영의 특징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는데, 그 핵심은 엄벌과 공포에 의한 훈육이었다.

래리어트 가문이 세대를 거듭하며 쌓아 올린 경영의 노하우와 인맥, 그리고 자산은 아둔한 자식 한둘이 방탕한 생활을 보낸다고 해서 무너질 만큼 빈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래리어트의 가주들은 자신의 아이와 손자를 엄격한 방식으로 훈육해 왔다.

갓 글자를 뗀 아이에게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고 비즈니스의 본질에 관해 논하는 그들의 방식은 흔한 제왕학 교육과는 궤를 달리했다.

래리어트 그룹이 사업을 시작한 이래 가장 강조해 온 개념은 바로 연기緣起였다.

삼라만상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복잡하게 엮여 있으며 인연이 없이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

그렇기에, 래리어트는 부富가 형성되는 과정과 자산을 모아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래리어트 가문이 제아무리 돈과 명예를 소유하고 있어 봤자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래리어트 그룹의 모든 임직원과 그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건 호텔에 묵는 고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세상에서 왔다. 세상이 무너진다면 부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래리어트 가문에서 태어난 모든 리자드맨은 귀와 피트 기관에 딱지가 들어앉을 때까지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아이작 래리어트와 그의 아버지 멀리건 래리어트, 그리고 현직 래리어트 그룹 회장인 조부 아이번 래리어트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부터 래리어트의 가르침을 따라 자라왔고 성인이 되자마자 래리어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일 없이 자신의 실력 하나만으로 평가받으며 실적을 쌓아야만 했다.

아이작의 경우 아직 나이가 채 서른이 되지 않았기에 차원신용금고에서 대리 직급을 맡아 일하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조부는 과거 충분한 사회 경험과 커리어를 쌓은 다음 래리어트 그룹으로 돌아와 실무를 배우고 호텔 그룹 경영에 관한 모든 것을 익힌 다음 그룹의 중대사에 관여하며 결과적으로 회장의 자리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 관계로, 아이작의 집안에는 여느 재벌가에도 있을 법한 난봉꾼 포지션의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가 누구 덕에 성립하는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사업 파트너와 주위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성의와 시간을 투자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대기업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래리어트 가문의 특징 중 하나였다.

“물류창고? 얼마든지 사용하시게. 손주 녀석이 오랜만에 기특한 소리를 하는군.”

아이작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아이번 래리어트와 엘라마의 대담은 5분도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래리어트 그룹은 호텔 체인을 운영하는 외에도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다.

물론, 일부 몰상식한 재벌가처럼 손 닿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문어발식 사업 전개가 아니라 철저히 자신들의 원점인 호텔과 리조트와 관계된 것들 중에서 사업 아이템을 고르고 있었지만.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번에 진 신세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뭘. 필요하면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아이번 회장이 사용 허가를 낸 물류창고는 아비아노의 수도 아비아노 시티의 교외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래리어트 그룹의 호텔과 리조트에는 관광객과 투숙객을 위한 인프라가 빈틈없이 완비되어 있었는데 개중 가장 높은 매출을 자랑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면세점이었다.

교외에 건설된 물류창고는 주로 아비아노 행성 전역에 존재하는 래리어트 호텔과 래리어트 리조트의 면세점에 상품을 공급하는 초대형 허브였다.

물류창고는 축구장 수십 개를 붙인 것과 같은 넓이의 건물 두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A동에서 면세품목을 보관하고 B동에서 호텔 체인에 공급되는 어메니티와 식자재를 보관하고 있었다.

보관된 물자는 100% 기계가 관리하고 있어서 일부 퀄리티 체크 전문가 외엔 상주하지 않았는데, 이 점이야말로 아이작이 노리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됩니다. 협박하는 건 아니지만 이곳의 정보가 노출된 순간 바리터스가 저희와 여러분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래리어트 가문의 일원인 아이작이 직접 부탁하자 물류창고 관리직을 맡은 사내들이 일제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계획은 이곳에 차원 관문의 출구를 설치해 키키와이 섬 북부 해안의 대형 관문을 통해 반입한 자원을 아비아노 전역에 유통하는 것이었다.

래리어트 그룹의 물류창고는 건자재에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불이 붙기 어려운 건 물론 마도 공학을 사용한 투시를 막아낼 수 있었다.

고로, 이곳에서 아무리 많은 구호 물자와 기타 자원이 빠져나와 아비아노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 해도 놈들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낼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이곳에서 출발한 물류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아비아노 전역에 공급될 물자는 전부 각지의 래리어트 호텔에 한 번 보관되었다가 공무원들의 손을 통해 민간에 분배될 것이니까.

바리터스 제국은 아비아노의 본성을 포위하면 자원 고갈로 항복을 외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아비아노는 부유한 국가고 우리와 거래해 막대한 물자를 비밀리에 공급받을 것이다.

제국 놈들은 머지않아 아비아노가 어떻게 계속해서 장시간의 포위망 속에서도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지 궁금해하기 시작할 테지만 여기에 무슨 트릭이 사용되었는지는 절대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차원 관문을 사용한 물자 수송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해 낸다 해도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게 차원신용금고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심증을 품는 게 놈들이 할 수 있는 전부이리라.

“이로써 아비아노 사람들의 생활은 무사히 유지되겠군요.”

“그래. 아이작이 한 건 했군.”

나의 리저드맨 입행 동기는 멋쩍다는 듯 안경의 코걸이를 길쭉한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처음엔 많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은 몰랐다.

단순히 회장이 아이작을 예뻐해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이는 래리어트 그룹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경영 철학을 실천에 옮긴 결과.

물론 차원 관문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이로써 아비아노가 이번 침공을 이겨낼 가능성은 한층 더 올라갔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경계해야 하는 건 외부의 적 외에도 넘쳐나니까.”

“일단 첫 관문은 넘어섰다고 볼 수 있소.”

고개를 돌리니 전쟁의 전문가 비슈티가 소머리를 작게 끄덕이고 있었다.

엘라마와 비슈티가 말한 대로다.

외부의 적 이상으로 경계해야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사회 계층 간에 일어나는 대규모의 불화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상류층은 국외로 도망치고 사람들은 물자를 사재기하며 종잡을 수 없는 사회적 혼란이 야기된다.

하지만, 이곳 아비아노에선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회 고위층은 가족과 함께 자의든 타의든 아비아노에 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재기를 시도하며 시장의 물자를 고갈시키거나 고의로 매물을 줄여 폭리를 노렸지만 완벽한 타이밍에 정부가 추가 물자 분배와 공급을 선언하며 가격을 안정시켰다.

“스틸레토 대통령에게 연락해. 최소한의 준비는 끝났다. 행장님도 이미 키키와이에 물자를 수송해 두셨으니 내일 저녁엔 물류창고에 차원 관문 설치가 끝날 거야.”

“응. 전용 핫라인으로 걸게.”

연락을 맡은 건 엘라마가 아닌 플루토 디스파테르였다.

이번엔 당당히 대통령에게 자신이 여신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친자매인 것을 밝힌 플루토는 대통령에게 존대를 받으며 용건을 전했다.

...“어. 맞아. 잘 풀렸어. 기자 회견 시작해도 돼.”

반말로.

“…저거, 괜찮은 겁니까 진짜?”

“글쎄. 신이니까 넘어가지 않을까?”

되겠냐, 그게.

* * *

기자 회견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정부는 이틀 이내로 구호 물자 공급이 재개될 것을 발표했고 시장은 빠르게 반응을 보였다.

정부 수반의 자리를 연임하는 동안 약속한 모든 것을 온전히 지켜온 스틸레토 대통령이었기에 이번에도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는 쪽에 베팅한 사람이 많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 사재기를 시도했던 사람들은 아직 물자 공급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득을 내지 못하거나 손해를 보는 것을 감수하며 모아 두었던 물자를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아비아노 정부는 전시에만 적용되는 특별법에 명시된 조항을 활용, 물류 공급에 의도적으로 장애를 초래해 시장을 교란한 판매자와 기타 시장 참여자를 모조리 체포해 그들의 재산을 압류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오.”

모든 타이밍과 동원 가능한 수단에 관해선 노련한 전술 어드바이저이자 전시 행정에도 조예가 깊은 비슈티는 전반적인 작전 행동에 관해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부역자의 자산 역시 압류하되 사전에 발견한 고위 공직자와 재벌가의 내통자의 처분은 나중으로 미루시오.”

“이로써 필요한 총알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오. 물론 아직 안심할 수는 없소. 아직 바리터스의 예산을 고려하면 따라잡기 위해선 더욱 강력한 수단을 강구해야만 하오. 예를 들자면―”

“전쟁 채권. 먹음직스러운 금리가 붙어 있다면 아비아노 안팎에서 충분한 자금을 모아 올 수 있겠죠.”

비슈티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강수를 제시한 건 프라이빗 뱅킹 섹터의 에이스, 구C의 엑토플 라즈마 과장이었다.

“바리터스 국적 고객을 제외하고 입이 무거운 부유층에게서 자금을 모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김지안 대리. 플루토 양.”

“네?”

“당신들도 같이 가야 합니다.”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가요?”

“네. 어차피 비밀리에 아비아노의 대리인 자격을 위임해 경매에 참가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잖습니까? 전쟁 채권도 좀 사 달라고 말해 보죠.”

“아… 나쁘지 않겠네요.”

합의는 곧바로 이루어졌다.

우린 키키와이의 남쪽에 위치한 후리텐의 해외 영토로 향했다.

차원신용금고의 예금계좌와 프라이빗 뱅크 계좌에 4조 굴덴의 현금을 예치한 홉고블린, 알 아이프 클렛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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