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5화

비에 젖은 생쥐.

그런 단어로 부르기엔 김지안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 사내들의 기세는 너무나도 흉흉했다.

“긴급사태….”

위험한 상황임은 틀림없지만 위기는 곧 기회.

이번이야말로 김지안의 목숨을 구해 은행장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해야만 한다.

곧 있을 정례회의에서 구E의 약점인 ‘그 안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하지 않기 위해선 이것 말곤 방법이 없었으니까.

비슈티는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경비원의 등을 열고 참멸검 마엘슈트랑을 불러내려 했다.

“제2종 봉인 술식 해제―­”

하지만 비슈티의 손이 허공에서 X자를 그린 순간.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은행 로비를 뒤흔들었다.

“히이익….”

김지안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사내 중 한 명이 바닥에 대고 발포한 것이다.

“거기 덩치, 묘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 있는 형씨 대가리가 날아가는 꼴 보기 싫으면 말이지.”

“……?!”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비슈티를 노려보고 말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전쟁터에서 남의 피를 흘려가며 살아온 자.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종류의 용병이 틀림없었다.

탐식검 마엘슈트랑을 불러내면 시간의 흐름을 극단적으로 느리게 만들 수 있다.

그사이 저들의 존재를 지워 버릴 생각이었지만, 상대는 비슈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직감이 뛰어났다.

비슈티의 존재를 인식한 것만으로도 가장 위험한 전력인 걸 파악하고, 이곳이 겉보기엔 평범한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원에게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인지해 김지안을 인질로 잡아 협박을 걸었다.

명백한 도박수임에도 불구하고 보기 좋게 들어맞은 상황.

실제로, 김지안의 목숨이 인질로 잡힌 이상 비슈티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탐식의 마검을 소환하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김지안의 머리에 총알이 박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만두게. 일단은 천천히 기회를 노려봅세.”

출장소의 유일한 경비원이자 육체 연령만큼은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중 최고령인 마이아르가 비슈티를 보고 말했다.

“알겠소. 지금 움직이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이오.”

비슈티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저항을 포기했다.

“저기 보이는 둘부터 묶어. 그래. 영감님이랑 소뿔 달린 형씨 말이야.”

해적들은 보스인 델라올리의 지시를 따라 비슈티와 마이아르의 손발을 묶었다.

비슈티의 완력으로도 쉽게 끊을 수 없는 합금 수갑으로 손목을 구속한 건 물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도록 양손의 손등을 맞닿게 두고 작은 수갑으로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일일이 정성스럽게 고정하는 그 모습에선 기묘할 정도의 집착과 용의주도함이 엿보였다.

“손가락까지 전부 묶다니.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 것이오.”

“우릴 아직도 바보로 아나.”

“그게 무슨―”

“백모白毛의 사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우리도 들어 봐서 알고 있거든. 별명이 좀 많아서 가끔 헷갈리긴 하는데.”

“……?!”

도발을 겸해 상대를 조롱해 본 비슈티였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상대는 우려했던 대로 과거 비슈티가 그랬던 것처럼 전쟁터에서 돈 받고 사람들을 죽이던 무리들이었다.

심지어 비슈티의 예전 직업을 잘 알고 있는 자들.

아마도 대전쟁 시대가 끝나고 일자리가 사라진 탓에 해적이나 강도가 되어 범죄로 벌어들인 수익으로 먹고사는 유형의 낙오자들일 것이다.

“딱히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형씨 같은 실력자가 난장판을 만들면 감당이 안 되거든? 우리가 일 볼 때까지 얌전히 묶여 있으라고.”

해적들은 차례대로 은행원들을 결박해 로비 바닥에 내던졌다.

비슈티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던 엘라마는 제때 사무실에서 권총을 가져오지 못한 탓인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에게 가능한 건 최대한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적들과 교섭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교섭을 하기 위해선 상대의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상대의 목적.

은행을 터는 놈들이 뭘 원하는지는 뻔했다.

“지금쯤 도내의 경비 업체에게 연락이 갔을 거다. 늦기 전에 빠져나가는 쪽이 좋을 텐데.”

“헛소리하지 마. 제대로 신고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업체 놈들이 이런 비바람을 뚫고 올 리가 없잖아?”

“글쎄. 그건 어떨까.”

보안회사에 연락이 간 건 사실이었다.

아까 김지안이 셔터를 연 직후 밖에 있던 사내들이 총을 들고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방범장치를 기동했으니까 확실하다.

문제는, 보안업체 소속의 무장 경비원들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란 사실이었다.

심지어 상대의 숫자는 서른. 아무리 보안업체 직원에 가세한다 해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머릿수다.

만에 하나 이들이 은행 문을 닫고 인질극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농성이 길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출장소에서 근무하는 이들 중 누군가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택하는 것보단 가져갈 수 있는 것만 빠르게 챙겨 도망가는 건 어때.”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내가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 알고는 있어?”

“그야 돈이겠지.”

“그래.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그 정도는 알겠지. 근데,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고.”

“뭘 원하는지 말해.”

델라올리는 하얀 털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여기 클렛이라는 놈이 왔을 거야. 모른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 밖에 놈들이 몰고 온 트레일러가 있는 걸 다 봤으니.”

“…….”

엘라마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났다.

클렛이 제대로 몰고 온 트레일러를 치웠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들은 트레일러를 엄호하던 차량만 몰고 은행을 떠났다.

대량의 현금을 가져다준 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고객이 은행에 민폐를 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털리지만 않으면 돼. 털리지만 않으면.’

클렛은 예금 증서를 받아가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놈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현금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이들에게 쫓기다가 은행에 돈을 맡긴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비바람을 뚫고 트레일러에 현금을 싣고 와 출장소에 맡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빌어먹을 자식.”

알고 있었을 거다. 알고, 은행에 현금을 맡긴 게 틀림없다.

돈을 지키면서 강도들과 싸우는 건 불리하니까, 아예 처음부터 은행에 돈을 처박아 놓고 미끼로 삼았을 가능성이 컸다.

지키며 싸우는 것보단 적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일망타진하는 게 훨씬 쉽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엘라마는 생각했다. 만일 이 예상이 들어맞았을 경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최악의 경우 클렛이 용병들을 데리고 와서 이곳을 초토화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이 강도 놈들을 쓸어 버리고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엘라마 자신을 포함해 이곳에 있는 인원 전원이 같이 죽임당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클렛이 ‘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한 건 엘라마와 다른 행원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금 증서만 받고 그냥 물러난 것도, 나중에 관련 증거를 싹 태워 버리든 없애든 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보안 업체에게 제대로 연락이 갔을지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차원태풍이 섬 바깥과 섬 내부의 통신만을 차단한다 해도 차원 역장이 뒤틀린 지금 일반적인 통신 수단이 제대로 기능할지 의문이었다.

“…….”

어쩌면 클렛은 호텔로 향하는 일 없이 여전히 부하들과 출장소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정말로 돈을 맡길 생각이었을진 몰라도 추적자들의 존재를 두고 계속 고민하다 그들을 일망타진하겠다고 결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그들이 방심한 강도들을 노리고 은행에 쳐들어온다면 어찌 될까.

최선의 결말은 끽해 봤자 양패구상. 물론 그 과정에서 은행원들이 살아남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태를 타파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일까.

3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엘라마의 두뇌는 맹렬하게 회전해 어떻게든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클렛이 맡긴 돈을 주지. 갖고 도망쳐라.”

“그래. 진즉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은행원이 할 수 있는 최악의 배신이었다.

* * *

엘라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도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나와 엘라마, 그리고 플루토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당연히 목적은 자신들을 도와 금고를 열고 2층에 쌓인 돈을 실어나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탕!

-타탕!!

은행 내부의 감시 카메라를 모조리 파괴한 강도들은 금고를 열라고 고함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2층에 쌓인 돈이 더 많으니 그것부터 가져가든가.”

엘라마는 침착하게 놈들에게 대꾸했다.

“무슨 생각이에요! 대체!”

사지가 자유로워진 나는 엘라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아무리 목숨이 위험하다 해도 강도의 요구에 저리도 순순히 응하다니.

내가 아는 엘라마는 고집불통에 상대가 누구든 거리낌 없이 들이받는 사람이다.

강도 놈들이 총을 들고 있는 건 사실이고 내가 바보같이 인질로 잡혔던 것도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거액의 예금을 순순히 놈들에게 내줄 수는 없다 이 말이다.

“멍청한 놈.”

엘라마는 그런 내게 짓이기듯 속삭였다.

“저 돈은 미끼였고 애초부터 클렛은 우리 고객이 아니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나?”

“…….”

나는 그제야 클렛의 행동거지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놈은 무장한 서른 명의 사내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출장소에 돈을 맡긴 게 틀림없다.

애초에 평화롭던 키키와이에 거액의 현금을 예치하려는 고객과 강도가 같은 날에 방문할 확률 따위 한없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히려 엘라마의 말대로 클렛이 우릴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클렛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근처에서 강도들이 돈을 갖고 돌아갈 때 덮치려고 대기하고 있을지도?

“…굳이 그 자식 예금 지켜줄 의리는 없는 거네요.”

“바로 그렇지.”

일단은 엘라마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엘라마가 원하는 건 아마도 이 녀석들이 돈을 들고 가다 클렛과 맞닥뜨려 싸움이 벌어지는 거겠지.

클렛 자식이 함정을 파려고 우리와 돈을 미끼로 쓴 건 정황상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도가 감히 차원신용금고를 털게 두었다는 오명이 생기는 건 피하고 싶다.

차원신용금고는 범차원세계의 수많은 차원에서 명성을 떨치는 제1금융권 은행.

아무리 차원태풍이 키키와이를 가두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 해도 범죄자에게 협조했다는 꼬리표가 붙게 되는 건 내 커리어에도 점포의 명성에도 영 좋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개기다가 목숨을 빼앗길 순 없긴 한데.

“대리님 뭘 그리 고민해. 어차피 이 지폐 전부 가짜인데.”

그때였다.

스쳐 가듯 내 곁을 지나가던 플루토가 슬쩍 말을 걸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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