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6화

“…가짜?”

나도 모르게 한마디 중얼거렸다가 곧바로 입을 닫았다.

방금 플루토가 한 말을 듣고 잠시 뇌에 혼란이 야기됐다.

여기 있는 지폐가 전부 가짜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조금 전에 계수기로 일일이 몇 장인지 세어 보지 않았나.

계수기에는 위조지폐를 검출하는 기능이 달려 있다.

어지간한 수준의 위조지폐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은 있다.

못해도 두 달에 한 번은 소프트웨어가 갱신되는 데에다 하드웨어 역시 새로운 방식으로 위조된 지폐가 발견될 때마다 업체 측에서 기계를 손봐 준다.

고로, 대체 어떻게 플루토가 계수기도 검출하지 못한 위조지폐를 알아본 건진 몰라도.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위조지폐에 사용된 기술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과거 조폐국의 위조 방지 마법까지 모방해냄으로써 후리텐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다는 최악의 위조지폐 ‘마스터 노트’가 다시 세상에 돌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유형의 위폐이거나.

“플루토 씨, 잠시만.”

나는 강도들이 시키는 대로 돈 가방을 가지러 가는 척 플루토를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총 든 놈들이 한 반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우릴 쏘아 보고 있었지만 놈들은 1층에 머무른 채 비슈티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슈티 과장이 대전쟁 시대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고 있어서 최대한 많은 인원이 그를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2층으로 따라오는 이는 거리를 두고 우릴 감시하는 한 명 말곤 없었다.

우리가 창문으로 탈출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아까 지폐 가짜라고 했잖아.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야.”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자 플루토가 싱긋 웃었다.

“나 그런 체질이라서. 냄새 잘 맡아.”

“…….”

뜬금없이 냄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서부 포독스 지점의 프레드 선배랑 비슷한 직무권능이라도 있는 건가.

프레드 선배는 회계 장부에서 분식회계가 발하는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만일 플루토 역시 그와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계수기조차 분별해 내지 못한 최첨단 위조지폐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플루토는 정규 행원이 아닌 텔러가 아닌가.

차원신용금고의 행원들은 제각기 직무권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창구담당자는 다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플루토가 어떻게 자기 분신을 마구 만들어 내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냥 텔러 중에서도 특례로 직무권능이 부여된 건가 싶었는데 이번엔 위조지폐까지 구분해 낸다고?

직무권능이 두 개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마법을 자유롭게 다루는 고대 종족, 그래, 예를 들어 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

…잠깐.

그러고 보니 방금 플루토, 위조지폐를 분간해낸 건 자신의 ‘체질’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체질…?”

“응. 체질. 수상한 마도 공학 기술이 적용된 사물을 냄새로 분간할 수 있어.”

뭐지. 그런 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직무권능 없이도 특이한 체질이 있어서 괴상한 마법이 걸려 있는 걸 구분해 낼 수 있다고?

“그게 돼?”

“당연하지. 평소부터 돈 냄새 엄청 맡으니까.”

창구에서 현금을 자주 다루니까 지폐 냄새를 많이 맡아 봤다는 얘길까, 아니면 평소부터 돈다발 들고 킁킁대는 취미가 있는 걸까.

잠시 궁금해졌지만 이 4차원 텔러라면 충분히 후자도 가능할 것 같다.

하긴, 지폐에서 나는 냄새가 독특하긴 하다.

사람 손을 탔든 안 탔든 지폐 특유의 향 같은 게 있으니까 말이지.

“신기한 체질이네.”

저런 게 가능한 체질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이 얼마나 있겠나. 막말로 죽은 사람도 살려 낼 수 있는데.

후각만으로 위조지폐를 분간해 내는 차력사가 존재해도 이상해할 일은 전혀 없다.

차력사라고 하면 아무래도 땀내 나는 아저씨가 떠오르긴 하는데, 겉보기엔 멀쩡한 20대 여성인 플루토의 비주얼을 생각하면 조금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긴 하다.

그런데, 플루토가 정말로 냄새만 맡고 지폐가 가짜라는 걸 진즉에 알아챘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플루토 씨, 왜 그거 아깐 말해 주지 않은 거야? 일찍 말해 줬으면 소장님이 클렛 그 양반 왔을 때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대리님은 아까 걔네가 뭐 들고 있었는지 기억 안 나?”

“…아.”

나는 플루토가 무슨 생각으로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까 클렛과 놈의 부하들은 총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있는 자리에서 위조지폐 얘길 꺼냈다간 나를 포함한 행원들이 벌집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놈들이 떠난 다음에도 얘기하지 않은 건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까 경계해서고?”

“응. 맞아. 중간에 적당히 눈치 보다 필담으로 적어 보여 주려 했는데 강도가 들이닥쳤지 뭐야.”

“하여튼 이놈의 점포는 운도 지지리 없어가지고….”

어쨌든, 왜 플루토가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했는지는 이해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만한 양의 지폐가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참이다.

예전부터 정규 행원만 모여 있어도 굴러가기 힘든 전략 점포에 어째서 텔러가 한 명 끼어 있나 궁금했는데 분신을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어서 플루토가 온 거라고 멋대로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그녀는 어지간한 행원보다 훨씬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 어울리는 인재였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면 작은 실패도 허락되지 않는 전략 점포에서 대량의 위조지폐를 맡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피해 갈 수 있다.

말하자면, 플루토는 계수기 이상의 정확도로 위조화폐를 집어내는 안전장치이자 보험인 것이다.

이번엔 아쉽게도 예치를 시도한 자식이 총을 든 부하를 다수 대동하고 있던 탓에 제때 막지 못했지만, 그나마 클렛의 계좌가 개설되어 전산에 반영되지 않아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직은 돌이킬 수 있는 상황… 이려나.”

그나저나 지금 우리가 운반 중인 가방에 든 게 전부 위조지폐라면, 이 상황을 벗어날 방안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애초에 이게 전부 위조지폐면 그냥 강도 자식들에게 빠르게 넘겨 버려도 되는 거 아닌가.

클렛이 맡긴 돈이 전액 위조지폐라는 사실만 증명할 수 있다면 무사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누가 나중에 뭐라 따져 봤자 ‘진짜 돈이 아닌 사기꾼이 맡긴 위조지폐만 내놓았으니 차원신용금고에는 어떠한 손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우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지금은 차원태풍이 몰아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무사히 위조지폐를 놈들에게 떠넘긴 다음 CCTV 기록을 삭제하고 총알이 박힌 카메라를 새 거로 갈아치운다면 태풍이 몰아치는 동안 일어난 황당한 사건에 관해선 그 누구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다.

“근데, 플루토 씨 코 믿어도 되는 거지? 전부 위조된 게 확실한 거야?”

“당연하지, 대리님. 모든 마법은 술사의 심상과 연관된 냄새가 나거든. 아까 계수기로 셀 때부터 지독한 짝퉁의 악취가 났다니까? 그리고 화약 냄새도.”

“화약 냄새….”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돈 가방 안에 든 것들은 정말 외견상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은 위조지폐에 지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다른 마법 역시 걸려 있는 걸까.

“…….”

기분이 영 좋지 않아 슬며시 나르고 있던 돈가방의 지퍼를 슬며시 연 다음 직무권능을 발동했다.

“여신판단…!”

저번에 확인해 두었지만 대리가 된 이후로 직무권능을 사물에게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까 클렛에게 사용했을 땐 그가 우리에게 딱히 해를 가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과가 나온 걸 보면 놈은 이게 위조지폐인지 몰랐을 터.

그렇다면 이 위조지폐는 과연 우리에게 있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일까.

-키잉!

“…맙소사.”

직무권능의 판독 결과를 확인한 나는 말을 잃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노이즈와 함께 나타난 저울과 두 개의 공.

예상대로 저울은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저울 접시 위의 하얀 공과 검은 공은 주홍색 불꽃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뜻이지.”

평소 같았으면 직무권능의 판독 결과에 대한 정보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올 테지만 이번엔 달랐다.

“화약 냄새라….”

역시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거기 년놈들! 뭘 그리 신나서 떠들고 있어!!”

그때였다. 아래층에 머물고 있던 강도 중 하나가 계단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우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네! 지금 갑니다!”

나는 플루토가 들고 있던 돈 가방까지 낚아채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이 돈은 위험하다. 단순히 위조지폐여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리스크를 품고 있는 물건일지도 모르니 어서 출장소 밖으로 빼내든지 해야겠다.

* * *

1층으로 내려간 나는 쉴 새 없이 돈 가방을 은행 밖으로 실어 날랐다.

강도 놈들은 지하 주차장에 있던 업무용 차 네 대를 빼앗아 밖에 세워 두고 우리가 운반한 위조지폐가 가득 담긴 가방을 트렁크와 뒷좌석, 그리고 조수석에 가득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우비조차 입지 못하고 혹사당한 나는 말 그대로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실내와 실외를 수십 번씩 왕복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게으른 화이트칼라 자식 같으니라고!”

강도들은 이따금씩 폭력까지 휘두르며 나와 아이작을 비롯한 행원들을 채찍질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에선 강렬한 조바심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엘라마가 보안 업체가 언제 올지 모른다고 얘기한 탓에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제기랄, 이러다가 반도 못 싣고 가겠는걸.”

우두머리로 보이는 북극곰과 사람을 합쳐 둔 것처럼 생긴 수인 자식은 연신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며 이리저리 총구를 돌려 대고 있었다.

군대에서 저딴 짓 하면 무지하게 갈굼당할 텐데, 운 좋은 새끼 같으니라고.

강도들은 타고 온 차와 출장소의 업무용 차량, 거기에 더해 근처에 있던 여행사 사무실이 보유한 70인승 대형 관광버스까지 훔쳐 와 위조지폐가 든 가방을 꽉꽉 채웠고 멀리서 보안 업체 차량과 경찰차가 발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한 다음에야 자리를 떠났다.

우리를 결박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어서 마지막엔 엘라마가 재빨리 사무실에서 권총을 가져와 놈들의 버스 바퀴를 겨누고 쏘려 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제때 그를 말렸다.

“…부탁이니까 믿어 주세요. 저 돈, 가져가게 두어도 괜찮아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햇병아리.”

나는 대답 대신 놈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돈 가방에서 지폐를 한 장 꺼내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메모 용지를 집어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지폐와 같은 자리에 떨어뜨렸다.

바로 그 순간.

-퍼엉!

지폐가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위조지폐입니다. 쓸데없이 위험한 마법이 더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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