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4화

같은 시각.

키키와이 해안가.

얕은 물에 들어올 수 없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위태롭게 정박 중인 대형 크루즈가 한 척.

수년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거대한 차원태풍은 키키와이와 주위의 작은 섬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통신은 마비되고, 외부와의 모든 물리적·마법적 교섭이 중단되었다.

그 말인즉, 태풍의 영향을 받는 지역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밀실로 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실과 창작물 속 수많은 밀실에서 완전범죄가 일어나듯 키키와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찾았다.”

며칠 내내 비바람을 뚫고 쾌속으로 항행하던 크루즈를 추적하던 남후리텐해의 해적 델라올리는 부하들을 이끌고 키키와이 연안에 상륙한 참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 고생을 시킨 걸 감안해 크루즈부터 부숴 놓고 싶다만….”

몸 전체에 하얀 털이 돋은 북극곰 수인 델라올리는 보트에 둔 대전차 로켓을 한 번 힐끗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여기서 크루즈를 터뜨린다면 배의 주인인 클렛이 위기를 감지하고 도망칠지도 모른다.

태풍 권역 밖과 연락하는 수단은 끊어졌을지라도 그 흔한 방범 마법 정도는 클렛이 키키와이에 있는 이상 얼마든 효력을 발휘할 테니까.

그리고 만일, 클렛의 돈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땐 크루즈 역시 빼앗아 떠날 생각이었다.

클렛이 지닌 현금의 양이 상당한 건 사실이지만 그가 타고 온 크루즈 역시 팔아치운다면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배를 빼앗아 도망친다면 태풍이 키키와이를 지나간 다음 추적을 따돌리기도 용이할 터.

다만 이 모든 건 클렛을 찾아내 돈을 빼앗은 다음 고민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비 때문에 찾아내기 까다롭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해내는 수밖에.”

키키와이섬의 면적은 절대 작지 않다.

하지만 해안가 근처의 CCTV를 해킹한 결과 델라올리와 부하들은 클렛이 용병을 데리고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트레일러 두 대. 틀림없군. 놈들, 돈을 싣고 여길 떠난 거야.”

“드론을 띄우는 건 무리 같은데 어떡할깝쇼, 형님.”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그깟 거 없어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

해적의 우두머리로서 오랫동안 남후리텐해의 상선을 약탈해 온 델라올리는 이번 일을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여기고 있었다.

익명의 정보 제공자는 델라올리에게 섬에 살던 대부호가 두 자식 중 장남에게 모든 재산을 ‘현금으로’ 물려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금이 장남이 소유한 대형 크루즈선에 실려 후리텐 본토에 운반될 예정이라는 사실 역시 알려주었다.

‘보수는 성공한 다음에 나눠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5%만 받도록 하죠.’

그 겸허한 태도는 델라올리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이런 귀중한 정보를 내놓고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는 해적들에게 95%를 가지라고 말하는 건 자신의 분수를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당연히 델라올리는 상대에게 빼앗은 돈의 5%는커녕 한 푼도 줄 생각이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는 상대라는 사실까지 부정하려 하진 않았다.

나중에 괜찮은 술이라도 한 병 사 주어야겠다. 거절하면 생니를 뽑고.

그렇게 결심한 델라올리는 부하들을 시켜 탈것을 확보했다.

“준비됐습니다, 보스.”

부하들이 근처에 있던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고 배선을 건드려 강제로 시동을 걸었다.

확보한 차량은 모두 아홉 대. 서른 명에 달하는 해적들을 실어나르기 충분한 숫자였다.

“돈 벌러 가자고.”

장전한 총과 수류탄을 든 해적들은 곧바로 트레일러가 향한 방향으로 출발했다.

어떤 상황이 자신들을 맞이할지 예상도 하지 못한 채로.

* * *

같은 시각.

키키와이보다 더욱 남쪽에 위치한 그레이트 후리텐의 또 다른 해외영토, 그리니밤부섬.

알 아이프 클렛의 아버지이자 회색지대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라 불리던 위대한 컨설턴트 알 아이프 굴이 숨을 거둔 장소.

이곳은 면적이 키키와이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그 대부분이 굴의 사유지로 키키와이 정부의 법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이곳에선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창의적이고 탈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섬의 주인인 굴은 이곳을 거래 장소로 이용하는 전 세계의 양지와 음지를 대표하는 부자들에게서 막대한 보수를 받고 있었지만 그가 사망한 지금, 비밀스러운 거래 장소를 제공하고 고객에게 일체의 편의와 조언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의 비즈니스 모델을 계승한 건 장남인 클렛이었다.

그런 클렛이 자리를 비운 건 굴이 알뜰살뜰하게 모아둔 2조가량의 현금을 모두 그레이트 후리텐 본토에 예금하기 위해 운반하기 위함이었다.

부하에게 맡길 수 없는 규모의 자금이니 돈의 주인이 직접 움직이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연고로, 섬의 관리 권한은 일시적으로 동생인 뷔고에게로 넘어갔다.

“이런 날씨에 배가 똑바로 움직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양아치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형 클렛과 달리 뷔고는 학구적이고 이지적인 인상을 주는, 홉고블린 중에선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를 지닌 사내였다.

홉고블린 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유형, 이라는 말은 아버지인 굴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일까, 뷔고는 아버지에게서 단 한 푼도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딱히 홉고블린이 장자를 중시하는 문화를 가진 게 아니다.

굴이 정말로 단순히 자신과 닮지 않은 자식이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두 번째 부인의 외도를 의심했다는 이야기는 동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뷔고가 섬의 관리를 일시적이라곤 해도 맡고 있는 것만 봐도 형인 클렛이 동생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뷔고는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까지, 집안의 모든 사람이 어릴 적부터 그를 피붙이로 취급하지 않았으니까.

모두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뷔고는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편견을 뒤집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틈틈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굴의 뒤를 이을 형에게 인정받기 위해 실력을 쌓고 2인자의 자리를 꿰차기 위해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클렛이 그에게 대리인의 직책까지 맡기게 된 건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닌, 오로지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뷔고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모든 것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클렛이 해적 놈들과 제대로 마주쳤을 때, 이걸 터뜨려야 하는데 말이지.”

뷔고는 손에 쥔 마도 공학 리모콘을 만지작거렸다.

리모콘은 그가 형에게 건넨 완벽한 신종 위조지폐에 걸린 폭발 마법을 기동하는 것이었다.

이 지폐는

본래 계획은 형이 후리텐 본토에 도착해 은행에 자금을 맡기려 하고, 해적들이 그 뒤를 쫓아가 클렛과 조우한 순간을 노려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었다.

만일 성공한다면 클렛은 해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지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굴의 정당한 상속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이번 암살을 준비하기 위해 뷔고는 숨겨 둔 비자금 중 상당한 금액을 투자했다.

계수기가 검출해 낼 수 없는 슈퍼노트를 만드는 건 물론 실제로 굴의 저택에 보관 중이던 진짜 현금처럼 일련번호를 전부 다르게 찍어냈다.

마지막으로, 지폐 한 장 한 장에 주입된 미약한 폭발 마법까지.

한 장의 지폐를 검사해 봤자 평범한 지폐처럼 위조 방지 마법 외엔 검출해 낼 수 없지만, 저 대량의 지폐를 한곳에 모으면 건물 두세 채를 모두 날려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폭탄이 된다.

해적들에게도 익명으로 정보를 흘렸고 클렛이 지나갈 항로까지 모두 파악해 실시간으로 감시 중이었기에, 후리텐 본토에 상륙하자마자 클렛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때에 차원태풍이 불어닥치다니.

“꼬였네, 꼬였어.”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인해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리모컨을 아무리 조작해 봐도 통신 위성이 중계하는 저주파詛呪波는 태풍의 영향권에 갇혀 별개의 차원으로 격리된 키키와이 섬에 닿지 않는다.

태풍이 지나가고 클렛이 해적들과 조우한 걸 확인하기 전까진 계획의 마지막 단계를 실행에 옮길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관문이다 이거지…. 이것만 넘어서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뷔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성공을 눈앞에 두고 날씨 같은 애매한 요인에 방해받다니.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건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지만 그 누가 차원태풍이 하필 형이 출항한 당일부터 몰아칠 거라고 상상했을까.

그저, 비바람이 그쳤을 때 모든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들어맞아 있기만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뷔고에겐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딱 하나 있었다.

“…그렇군. 내가 미숙했어.”

운명에게 휩쓸려 사는 건 굴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원하는 게 있을 땐 늘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 왔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로 향하는 건, 다른 차원에 갇혀 버린 키키와이에 진입하는 건, 어떠한 위험과 맞닥뜨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인 클렛을 죽이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쉽게 가려고 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지. 안심해, 형. 비겁한 놈처럼 멀리서 형이 뒤지는 꼴을 구경하진 않을 거야. 직접 내가 보는 앞에서 재로 만들어 줄게.”

서늘한 광기에 물든 뷔고의 눈이 창밖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노려보았다.

다음 목적지는 키키와이. 왕관을 찬탈하기 위해, 동생은 형의 뒤를 쫓기로 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슈티 과장의 예감은 옳았다.

은행에 보관된 비상용 식료품과 식수를 마시며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경비원 아저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밖에서 닫힌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밤 10시 넘었는데 대체 누구지….”

인터폰과 CCTV로 외부의 상황을 확인하려 해도 벼락에 맞아 카메라가 맛이 가거나 빗발이 너무 거세 제대로 뭐가 보이지도 않았다.

“앞에 트레일러가 쓰러져서 차가 못 지나가고 있어요! 잠시만 안에서 비 좀 피해도 될까요?”

간절히 소리치는 목소리가 여럿. 아무래도 문 닫은 은행 건물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어떡할까요?”

엘라마의 안색을 살폈는데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게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만일 이대로 밖에 사람을 내버려 두었다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는 날엔 은행 이미지 박살 날 텐데.

무사하더라도 안 좋은 소문을 낼 게 뻔하다.

아무래도 은행 이미지 고려해서 행동하는 게 옳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셔터를 열었는데.

-드르륵

“꿇어, 새꺄.”

정문 앞에는 소총을 든 복면강도 수십 명이 줄지어 서서 내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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