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13화
‘이틀 푹 쉬고 다시 뵙겠습니다.’
엘라마가 자신만만하게 그런 말을 한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클렛과 그 부하들은 한동안 은행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거지만 그들이 우릴 못 미더워해서가 아니었다.
컨테이너 박스 두 대에 가득 담긴 현금을 전부 정리하는 데에 어마무시한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돈을 실어나르고 사주를 경계했다.
잘 훈련받은 데에다 충분한 보수를 받고 있는 집단인 듯 고용주의 자산을 탐내는 기색 따위 보이는 일 없이 맡은 일을 수행하는 모습은 일개미나 병정개미를 방불케 했다.
“아저씨들 고생이 많아.”
분신만 족히 수십 명을 만들어 낸 플루토는 클렛과 그 부하들에게 음료를 나눠 주기 시작했다.
본체는 천천히 쉬고 있었는데 음료 분배부터 돈 세는 일까지 전부 분신들이 빠르게 처리하고 있어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다.
혼자서 최소 열댓 명 어치 일을 해 버리는 그녀에게 뭐라 하는 건 사람 새끼가 할 짓이 아니다.
나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고 고객에게까지 반말을 찍찍 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지만 이상하게도 다들 플루토의 반말에는 절대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저 사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과자 먹을래?’ 같은 소리를 하면 화를 낼 마음이 사라진다.
애초에 반말이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유독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신경 쓰지, 다른 나라에선 존댓말 같은 건 특별한 상황에서나 쓰는 거니까.
사실 이쪽 세상의 언어가 세계 전체에 적용된 통번역 마법에 의해 자동으로 한글처럼 바뀌어 내 눈과 귀에 꽂히고 있기에 괜히 존댓말과 반말을 구분하게 되었을 뿐이지.
이쪽 세상에서 사용되는 진짜 언어엔 그런 차이점 따위 없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 통신 위성이랑 싹 연결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나 어떻게 멀쩡히 대화하고 있는 거지?
“통번역 마법이라면 자체적으로 전파탑을 통해 키키와이 전역에 적용되고 있다. 멍청이 같으니라고. 관광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엘라마는 그런 내 의문을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차원 태풍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관광객들이 섬에 갇혀도 최대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키키와이 시 정부가 예산을 들였다. 물론 우리 래리어트 그룹도 적잖은 액수를 냈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표정이 여간 씁쓸해 보이는 걸 보니 시 정부가 개발 허가 등을 내준 대신 발전기부금이든 뭐든 많이 뜯어간 모양이었다.
직접 아이작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 건 아니어도 래리어트 가문이 지역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상당한 출혈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에 크든 작든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지레짐작이긴 한데 지원금 낸 게 온전히 통번역 마법을 섬에 정착시키는 데에만 사용된 게 아닌가 싶다.
아마 일부는 의원이나 그 친인척, 특히 공사 관계자의 호주머니 안으로 깔쌈하게 슛 되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용도로 신청된 토지가 어느샌가 골프장으로 둔갑했다는 이야기는 키키와이 안에서도 유명하다.
정치하는 인간들이 이런저런 수단으로 뒷돈 챙기는 건 이쪽 세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후리텐 정부 수반을 필두로 행정가와 공무원들이 비교적 양심적으로 살고 있어 이런 짓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이긴 하나 이곳은 어디까지나 후리텐의 해외 영토.
게다가 강력한 자치권이 보장되고 있으니 키키와이 의회가 뭐든 원하는 짓을 할 수 있다는 거다.
뭐, 애초에 키키와이 지역 은행의 반대를 밀어내고 이곳에 차원신용금고 다차원 출장소가 들어올 수 있던 것도 의회가 이런저런 권한을 꽉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욕심 많은 의원들이 키키와이를 꽉 잡고 있는 게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만일 그들이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이들이었다면 부지 선정부터 시작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문제를 전부 다 검토한 다음에야 차원신용금고에게 문을 열어 주었겠지.
그랬다간 아마 이런 식으로 신속하게 출장소 영업이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로, 우린 키키와이의 정치가들이 적당히 부패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만 했다.
하여튼 세상만사 흑백논리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다.
“아직 한참 남았군….”
두 대의 트레일러는 화수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돈 가방을 토해내고 있었다.
저게 다 몇 굴덴일까. 돈 가방 중 두어 개만 가질 수 있어도 몇 년은 족히 놀고먹을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런 거액의 자산의 주인인 클렛의 표정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흐음….”
느긋하게 손목시계나 들여다보면서 혼자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띠꺼워 보였다.
그나저나 저 시계, 내가 들어 본 그 브랜드가 맞다면 후리텐 중심지의 아파트 몇 채 가격일 텐데.
아이작이 차고 다니는 거랑 비슷한 걸 보니 아마 래리어트 가문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집안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좀 끝내면 안 돼? 저녁 먹으려다 야식 먹게 생겼네. 하아.”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저딴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기다리기 싫었으면 트레일러 두 대에 현금 가득 채워 오지 말았어야지.
하여튼 돈 좀 많다고 저렇게 구는 거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팁 줄 테니까 빨리 좀 부탁해.”
-툭
클렛이 뜬금없이 부하를 시켜 돈다발을 몇 개인가 가져오게 시키더니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라즈마나 비슈티, 엘라마는 정중히 거절했고 아이작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냈다.
플루토의 경우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돈다발을 분신 당 하나씩 달라고 요구하고 있어 클렛의 부하가 곤란해하고 있었고.
“…이런 게 없어도 저희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컴플라이언스 상 이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눈치 좀 보다 다들 받는 분위기면 가지려 했는데 혼자 받는 건 좀 그렇다.
어쨌든 인정할 수밖에.
클렛은 생각보다 좋은 녀석이었다.
최소한 헛소리 할 때 돈다발 하나씩 던져 주는 훌륭한 마인드를 지니고 있는 점만 봐도 우리나라 어지간한 꼰대짓 하는 친척 어르신들보다 훨씬 나은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저거 아까워서 어쩌나. 하나 정도 받아 가고 싶긴 한데.
솔직히 저거 받으면 돈 세고 묶는 단순 작업 정도는 속도를 두세 배 정도 올릴 자신이 있다.
아니. 내가 안 되더라도 플루토를 채찍질해 분신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고 말 것이다.
돈만 준다면 그 정도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다. 플루토는 몰라도 주로 내가 나중에 욕먹을 각오가.
“허억, 허억.”
결국, 우리가 트레일러 두 대 분량의 현금의 계수를 마친 건 그로부터 추가로 두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전산망이 마비되어 있었기에 엘라마는 수기로 적은 예금 증서에 액수를 적어 클렛에게 건넸는데 0의 숫자가 두 자릿수에 달하고 있어 상당히 비현실적인 금액이었다.
저만한 양의 현금은 중국 지방 탐관오리가 검거되었다는 뉴스에서도 본 적이 없다.
개인이 저만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재산.
단순히 통장에 숫자로 찍혀있거나 보유한 주식의 숫자 같은 거로 추산한 게 아니라 정말 눈앞에 그만한 양의 지폐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오만 리는 나갈 지경이었다.
“별별 신기한 구경은 다 해 보는군.”
그 돈 많은 아이작조차 이런 소릴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럼 형씨들 수고 많았어. 이틀 후에 보자고. 내 돈 잘 지키고 있어야 해!”
클렛은 홉고블린 특유의 깐죽대는 웃음을 남기고 호텔로 출발했다.
트레일러는 길에 그대로 세워둔 채였는데 나는 저 두 대의 차량이 혹시라도 밤사이 바람에 쓰러지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엄청난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체감될 정도로 굵은 장대비가 내리고 풍속 역시 무시무시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저희, 퇴근할 수 있을까요?”
“…아.”
시곗바늘은 벌써 7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라마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제길, 저녁 같이 먹겠다고 했는데.”
엘라마는 노골적으로 낭패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정말로 거액의 현금 예금에 홀려 밖에서 태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걸 까맣게 잊고 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기혼자였지.
자식도 있다고 들었는데 키키와이에 단신 부임으로 온 건지 아니면 가족들도 같이 온 건지 늘 궁금했다.
유명한 배우 가문 출신이라서일까,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본인도 일절 꺼내지 않고 주위에 소문이 도는 경우도 없다시피 해서 대체 어떤 식으로 살고 있는지 조금 호기심이 들던 참이었는데.
저녁 같이 먹겠다고 했다, 라는 발언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부인과 자식을 키키와이에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가족들은 가장이 태풍 부는 가운데 밖에서 일하는 걸 보고 걱정하는 중일 텐데, 본인은 현금에 눈이 돌아가서 밖에 풍속이 어떻게 되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는 일이 아닌가.
나는 결혼하면 절대 저런 식으로 살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수레에 실은 현금을 최대한 금고에 집어넣었다.
뭐. 그래도 엘라마의 기분도 이해는 간다.
저만한 양의 현금이면 차원신용금고 전체의 지급준비금의 바닥이 무지막지하게 올라간다.
그 말은 즉 고객에게 빌려줄 수 있는 자금의 액수 역시 대폭 늘어난다는 뜻.
가끔 정부의 관련 부서가 기강 잡겠다는 이유로 지급금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만한 현금을 수급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러한 리스크를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은행의 준비금 비율을 생각하면 최근 거액의 대출이 잦아 슬슬 차원신용금고에 남은 현금이 아슬아슬해지던 참이었을 텐데, 그런 와중 이런 막대한 현금이 금고에 들어오는 건 차원신용금고의 입장에선 반기면 반겼지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물론, 클렛의 말대로 이게 전부 깨끗한 돈이어야만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아까 녀석이 돈다발 뿌릴 때 수상해서 한 번 직무권능을 발동해 봤는데 이렇다 할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저울 위에 보이던 흰 구슬이 검게 변하지 않았으니 탈 날 돈 들고 와서 은행에 폐를 끼칠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쨌든,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꽉 찼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이만한 돈이 있다면 진짜 기적도 일으킬 수 있을 법한데.
설마 출장소 1층 금고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2층에도 가득 쌓아둬야 하는 양의 현금이 하루 만에 운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일 은행강도가 이런 광경을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노리겠지.
“어차피 퇴근할 수 없게 된 거,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야겠소.”
그 와중에 비장한 목소리가 들리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 비슈티 과장이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금고에 쌓인 현금 가방을 지켜보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비슈티의 말대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수준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 역시 빗물이 가로로 움직이는 꼬라지를 보니 함부로 밖에 나갔다간 그대로 해안가로 밀려 넘어지기 딱 좋아 보였다.
도저히 차를 운전할 수 없는 상황. 당연하지만 집까지 걸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체 이런 비를 뚫고 어떻게 호텔로 간다는 거지.
아이작에게 슬쩍 눈짓을 했지만 녀석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이작 역시 부하 직원들이 호텔까지 데려다주진 못할 듯했다.
“하아.”
“영 느낌이 좋지 않소. 도내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어 있으니 사건이 터지기엔 딱 좋은 날이오.”
“왜 자꾸 불안하게 그러세요. 비바람 몰아치는데 누가 미쳤다고 은행에 와요.”
안전한 퇴근이 물 건너가서 짜증 나는 와중에 이 사람 자꾸 재수 없는 소리나 한다.
저러다 진짜 강도라도 쳐들어오면 어떡하려고.
…그리고 이날 밤, 나의 불길한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