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6화
포독스시 모처.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장 델 몬테와 그의 아내, 필라테스 강사 레핀의 집은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은 정원이 달린 집은 두 사람의 보금자리였다.
향후 20년 동안 계속 매달 대출을 상환해야 하긴 해도 훌륭한 자가.
내부 인테리어 역시 두 사람의 취향을 따라 따뜻한 색감의 가구와 천연 소재를 사용한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반려동물 없이, 기계 인간 둘이 조용히 살고 있는 2층 개인 주택.
직장과 마트가 가깝고 이웃들은 예의가 바르다.
부족한 것 없는 행복한 생활.
딱 하나, 아이가 없는 것만 빼고.
“…아무튼, 본점에서 그런 제안을 받게 되었어.”
이사의 허락을 받은 델 몬테는 아내인 레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레핀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델 몬테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
‘역시, 무리였나.’
아무리 입양을 고민하고 있던 레핀이라고 해도 정상적인 아이가 아닌 인공 지능이 인스톨 된 의체라고 들으면 거부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대로였다.
“…거절해 둘게.”
그렇게 말한 순간, 레핀이 두 손으로 델 몬테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좋은 기회잖아. 입양하기 전에 아이랑 같이 살아 보는 거, 심지어 합법이고. 우리 성을 쓰는 것도 아니야. 자기도 말했잖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다고.”
“그렇긴 한데….”
“자기 인사고과에도 반영되고 좋은 일밖에 없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딨다고 그러는 거야.”
“…….”
레핀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델 몬테가 그녀에게 프러포즈했던 날 보았던 표정.
이미 레핀의 머릿속은 망명한 난민으로 신분이 위조된 아이를 데리고 셋이서 즐거운 생활을 보내는 상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사님께 당장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려요. 아이 식사는 내가 잘 챙길 테니까. 나 바쁠 땐 자기가 요리해도 되고. 비용도 이사님이 따로 주신다는데.”
“밥만 먹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다른 사람도 도와준다면서. 설마 못 미더운 사람이라거나 그런 거야?”
“그건… 아직 누군지 몰라서.”
“어련히 괜찮은 분 구해 두셨겠지.”
델 몬테는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서 레핀을 설득하고 바라칸 이사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레핀의 갈망을 채워 주기 위해서라도.
집에 타인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거부감을 느끼곤 있지만.
계속 2층의 아이용 방을 주인 없이 비워 두고 싶진 않았다.
‘한 달 정도라면….’
막상 살아 보면 레핀도 직접 낳지 않은 아이와 함께 사는 데에 염증이든 위화감이든 느낄지도 모른다.
고작 한 달의 시간을 투자해 자신과 레핀이 입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은 기회가 아닐까.
중요한 건 바라칸 이사가 찾아두었다는 베이비시터가 과연 누구인가, 인데….
“뭐, 어떻게든 되려나.”
자신을 마키나라고 칭하던 인공 지능에게서 조금의 사람 냄새도 느끼지 못한 사실 역시 걱정이 되었지만, 감정 표현이 서투른 아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내와 인공 지능 가짜 아이를 데리고 유원지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부담감을 느끼고 말았지만 델 몬테의 마음속에선 작은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 *
호텔에 도착한 나는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숙소의 위치는 린딘과 포독스 사이.
…라고 해 봤자 양쪽 다 택시로 10분 거리라 크게 의미는 없다.
그보다 베이비시팅이라니.
애 보려고 입행한 건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만 걸까.
‘귀찮게 굴 아이는 아니니까 안심하게.’
바라칸 이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불안했다.
아직 한국에 살던 시절 미술치료 교육이랍시고 잠시 낮은 시급 받아 가며 부촌의 유치원에서 아이들 상대로 몇 번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아이건 어른이건 사람은 똑같이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자기 집이 없어요? 거지예요?’
‘이상하다 엄마 아빠는 20대 초반에 결혼했는데.’
‘선생님은 여친도 없는 찐따구나. 불쌍해.’
‘흙수저인가 봐.’
‘너무 그러지 마. 선생님 차도 없다잖아.’
고작 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들이 사람 성질 긁는 말만 골라서 공격하는데 그 수법이 어찌나 악랄한지.
이건 당해 보지 않고는 모른다.
가난한 강사가 자기들 혼내거나 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저지르는 엿 같은 짓거리.
아이든 어른이든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굳이 어린이들에게 순수함이나 선함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본성이 선하고 교육도 잘 받은 아이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바라칸 이사는 아이의 나이나 기타 정보도 알려 주는 일 없이 내일 만나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라고 말했는데, 솔직히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일단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들어갔다.
몸을 담그자 기분이 한결 차분해졌다.
이사는 날 다른 곳으로 보내는 척 린딘으로 출장을 보냈다.
무슨 비밀을 감추려고 이러는 걸까.
애초에 아이를 돌보는 업무는 은행원의 일과 엄청나게 동떨어져 있다.
고작 대리 나부랭이가 출장 가는 목적지를 외부에 감추면서까지 돌보아야 하는 아이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까.
내가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스케줄 비어 있는 행원들도 많을 텐데.
어째서 아이 하나 보자고 전략 점포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행원을 동원해야 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저번에 본점에 가지 말았어야 했나.”
애초에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긴 했다만.
어쩌면 그때 내가 쉽게 이사들의 요청에 응해 버린 탓에 바라칸 이사 같은 사람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날 동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D 이사들은 좀 괜찮으려나 싶었는데,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행장님 요즘 자리 비우고 계신다고 밀라가 그랬는데, 그 틈에 이사들이 활개 치는 걸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비밀을 지키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는 거로 보아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큰일이 나는 거겠지.
“…이사님 사생아 같은 건 아니겠지?”
나랑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뭘 대가로 줄지 약속도 없이 대뜸 자기 사생아를 한 달 동안 데리고 있으라고 불러낸다?
아무리 차원신용금고 이사들이 막장스러운 짓을 벌인다 해도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생각은 하지 않겠지.
실제로 만난 적은 없어도 행장님의 낙하산이라고 알려진 나다.
가뜩이나 최근에 별별 일이 다 터져서 본점 사람들에게 주목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공적인 출장을 빙자해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사까지 올라갈 정도로 능력이든 정치질이든 탁월한 사람이 그런 자살행위를 할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아이가 차원신용금고에게 있어 유의미한 자원이라는 것.
“…레이니, 인가.”
당장 생각나는 가능성은 그 정도였다.
고아원에서 영혼박리증으로 죽어가다 베르나데 박사의 도움으로 연명하며 치료 방법을 찾던 여자아이.
이제 레이니는 언데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얻어 무사히 자라고 있는 중이다.
듣자 하니 본인이 딱히 입양을 원하지 않아 베르나데 박사와 함께 살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데, 베르나데 박사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장학금 등은 전부 차원신용금고가 지원하는 모양인데, 저번에 플랫 샤펜도라 씨가 그랬던 것처럼 마케팅 부서가 레이니를 홍보 모델로 기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만나게 되는 아이라는 게 레이니인 건가.
아니지. 만일 레이니가 광고 촬영 차 6-2차원에 왔다면 나를 시키는 게 아니라 홍보를 맡은 부서에서 알아서 이것저것 챙겨 주고 있을 터.
본점 사정에 밝은 밀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과타노차 녀석은 뭘 하고 있는지 대답이 없고.
부조리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 정보 부족으로 불안감만 부풀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내일 약속 장소로 나가 봐서 내가 맡을 만한 일이 아닐 경우 정말로 바라칸 이사님께 전화드려 도저히 못 해 먹겠다고 확실히 얘기해 두어야겠다.
아무리 짬밥 덜 먹은 대리라고 해도 시켜선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더러워서 진짜. 선 넘으면 콱 인사부에 찔러 버리든가 행내 공론화하든가 그래야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일말의 불안을 품고 포독스시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어째서인지 워터파크였는데 솔직히 바라칸 이사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만나자고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슬슬 시간인데.”
시간은 오전 11시 25분. 나는 이미 15분부터 입구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신입 행원 따위가 이사님과 만나기로 했으면 약속 시간 15분 전부터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어쨌든, 모범적인 입행 1년 차 대리답게 이사님을 기다리길 15분이 지났는데.
멀리서 선글라스를 낀 개 대가리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바라칸 이사님.”
“시간 내줘서 고맙네. 김지안 대리. 이사회를 대신해 감사하는 바일세.”
바라칸 이사의 악수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행장의 심복 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차원신용금고 이사들 중에서도 평판이 좋기로 유명했다.
실제로 내가 이 사람을 겪어 본 게 아니라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문대로 상식이 있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지만.
“아이와 ‘임시 보호자’도 곧 도착할 거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게. 자네도 잘 아는 사람이야.”
“아이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임시 보호자 쪽인가요.”
“만나 보면 바로 알 거야.”
바라칸 이사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주차장의 양쪽 출입구에서 차가 한 대씩 들어왔다.
먼저 내린 건, 이사님의 말대로 내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지점장님?”
서부 포독스 지점장 델 몬테.
내가 예전에 근무하던 점포의 책임자.
대체 이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김지안 대리… 왜 이곳에 있는 거죠?”
저쪽도 마찬가지로 내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 듯했다.
“이사님, 이건 대체….”
“마침 도착했군.”
서로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덜컥
검은 SUV에서 내린 건 어제 만난 바라칸 이사의 심복과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얼굴에 보이지 않는 무미건조한 인상.
초연하다고 해야 할까. 속세를 초월한 듯한 인상마저 주는 신비로운 소년은 똑바로 나를 쳐다보며 걸어왔다.
“정확히 52일 만에 만났군요. 김지안 대리. 오랜만입니다, 라고 인사드려도 문제는 없겠죠?”
매끄러운 존대로 인사를 마친 소년.
문제는 내가 이 아이를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것이다.
종족이 기계 인간이라는 거 말고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
설마―
“지점장님 댁 아드님…?”
“아니거든요.”
델 몬테 지점장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묘한 예감에 다시 한번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52일. 한 달하고도 3주.
52일 전에 만난 사람, 누가 있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던 내게, 아이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모습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52일 전에 나는 본점에 불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건 차원신용금고의 이사님들.
그 외에도, 사람이 아닌 존재가 하나.
“접니다, 자율 사고 통합 전산망 관리 인공 지능 솔루션, 마키나.”
“…….”
기어코 인간 시대의 끝이 도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