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95화
습하고 더운 키키와이의 저녁.
곧 있을 정기 감사에 대비해 퇴근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다른 행원들과 출장소에 남아 이것저것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아니라, 출장소장 엘라마의 직통 전화로, 나를 찾는 본점 이사님의 연락이 왔다.
“김지안!”
엘라마는 다짜고짜 큰 소리로 날 불렀고,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에 있는 게 구D의 바라칸 이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바라칸일세. 저번에 이사회 회의실에서 한 번 만났지?>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용건부터 말하겠네.>
예의상 호들갑을 떨어 준 다음 이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내용이라 해도 별거 없었다.
이사님은 내게 한 달 정도 외부에 출장을 다녀와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게 전부였다.
상세는 나중에 전달하겠다는데, 못 갈 일은 없다.
내가 알기로 은행원이 한 달씩이나 외부로 출장 가는 일이 흔한 거 같진 않지만.
“…….”
내가 살짝 눈치를 보자 엘라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출장소장인 엘라마가 동의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하다.
문제는 세 가지다.
어디로 출장을 가야 하는지.
왜 하늘 같은 이사님이 대리 나부랭이한테 직접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리고 내가 출장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리 나부랭이가 한 달 동안이나 장기 출장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내 직무권능이 특이하다고 해도 그게 외부에서 한 달 동안이나 묵어야 하는 이유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그건가.
다른 차원으로 이사님이 출장 가시는 데 따라가서 직무권능 셔틀이 되어 여기저기 해당 차원의 사업체를 둘러보고 잠재력을 판단하고 돌아오는 거려나.
신규 결제 서비스 스타트업이라도 수십 군데 줄 세워 두고 차원금융지주의 자회사로 인수할지 판단 내리는 거면 모를까, 그 외의 가능성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훌륭하군. 자세한 건 금일 저녁 따로 연락하겠네.>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이거 혹시 그놈의 특명 뭐시깽이 하는 그런 건가?
저번에 밀라가 스리슬쩍 본점 쪽에서 점점 나한테 관심 갖는 사람 늘어나는 중이라고 귀띔해 주긴 했는데 벌써 출장이 잡힐 줄은 몰랐다.
그래. 무엇이든 경험 삼아 성장해야 하는 게 아니겠나.
은행원으로서 크게 한 걸음 도약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을 맡을진 알 순 없어도 일단은 짐 싸 두고 준비해 두어야겠다.
한 달 다녀올 거면 갈아입을 옷부터 칫솔 등 생필품과 간식 챙겨야 할 테고.
정령들 먹일 까까를 집에 두고 가야 할까.
아니면 숙소에 정령들도 데려가야 하나.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고민해야겠다.
“괜찮을까요? 저 다녀와도.”
통화를 마친 다음 조심스럽게 옆에 있던 엘라마에게 물었다.
“네놈 하나 없다고 출장소가 망하겠냐?”
“…그냥 제가 담당하던 대출 창구 누가 맡을지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아이작이 두 배로 일하면 되는 일 아닌가.”
뒤를 돌아보자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던 아이작의 등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보아하니 다 듣고 있던 모양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동기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런데 소장님, 혹시 짐작 가는 거 없으세요? 제가 출장 가는 이유라든지, 그런 거요.”
“…전혀. 솔직히 말해서 네놈 같은 신참이 왜 한 달씩이나 출장을 나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저도요….”
하여튼 이 은행의 이사님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추측이긴 해도 상대 파벌 잡기 위해 대전쟁 시대의 광학병기까지 동원하는 사람들이니.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지만 말도록. 네놈과 연관된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어지러우니까.”
“최대한 조심해 볼게요.”
그렇게 대답하는 게 내 최선이었다.
나라고 좋아서 곤란한 상황에 휘말리는 건 아닌데 너무하다.
일단은 돌아가서 짐 싸야지.
* * *
그렇게 본점 이사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지령이 떨어진 지 이틀 후.
나는 숙소의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떠올리려 노력하며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잠근 거 같은데. 괜찮으려나.”
평소였다면 집 나올 때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정령들이나 콜로서스가 알아서 청소도 해 주고 TV도 꺼 주고 가스도 잠가 줬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걔넬 전부 데리고 한 달이나 집을 비우려 하는 중이다.
경험상 이런 불길한 예감이 들 땐 항상 무언가 사건이 터지곤 한다.
숙소에 불이 나거나 수도 그대로 틀어놔서 줄줄 새고 관리비 폭탄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아으. 그냥 나오기 전에 한 번 더 꼼꼼하게 확인하고 올 걸 그랬나.”
신경 쓰여 미치겠다.
어디 누구한테 부탁할 수도 없고.
“괜찮겠지….”
나는 한 달 치 간식과 노트북, 옷가지, 생필품이 든 백팩과 커다란 캐리어를 열심히 택시 트렁크에 욱여넣었다.
“공항으로 가 주세요.”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 활짝 연 창문 너머로 보이는 키키와이의 바다를 감상했다.
이번에 출장이 결정된 목적지는 그레이트후리텐 본토의 항구 도시라고 한다.
이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부지에 공항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는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공항이 세워질 해당 부지는 물론이요 건설에 관여하는 시공사 관계자 등, 직무권능을 사용 가능한 모든 것을 대상으로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충분히 한 달 걸릴 만한 일이라는 걸 납득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한 명씩 잡아 두고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마무시한 자금이 투입되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행하려는 거려나 싶은데.
본점에서 다시 나를 부르길래 처음엔 과타노차가 만든 인공지능인 마키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설마 건설 예정인 거대 공항의 잠재력에 관해 판단하는 일이라니.
절대 입행 1년 정도 지난 대리가 맡을 만한 업무가 아니다.
혹시 내가 직무권능을 사용한 결과 공항 부지에 잠재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건설 취소되고 그러는 거 아닐까?
그랬다간 시공사랑 기타 등등 관계자들이 날 몹시나 미워할 텐데.
설마 이러다가 또 암살자와 마주쳐야 하는 건 아니겠지.
“과타노차 녀석은 물어봐도 대답이 없네.”
바라칸 이사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전 과타노차에게 연락해 마키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는데 아직도 대답이 없다.
마키나가 모조리 업무 도맡아 하고 있느라 전산관리부는 할 일도 없어졌을 텐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채팅 앱으로 보낸 메시지조차 읽지 않는 건지.
뭐, 녀석이 이러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있을 때에나 재깍재깍 연락하지, 남의 질문이나 부탁 씹는 데엔 도가 튼 놈이니까.
좋게 말하면 마이웨이, 나쁘게 말하면 사회성 제로.
능력은 출중한데 저런 구석이 너무 도드라지는 걸 보면 회사든 은행이든 조직에서 생활하는 것보단 더 크리에이티브한 업무를 맡는 쪽이 녀석에게도 세상에게도 이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이 감히 담을 수 없는 인재. 나랑은 적성이 아예 다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점차 창밖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은색의 지붕과 반짝이는 유리.
택시는 이미 키키와이 국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뭐, 오늘 내가 탑승할 건 국내선이긴 하지만.
“도착했습니다.”
출발 층 앞에서 내린 나는 짐을 끌고 체크인과 탑승 수속을 마쳤다.
본토까지 비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시간 반.
본점에서 배려해 준 건지 좌석은 비즈니스 클래스였다.
“이야, 역시 줄을 잘 서야 해.”
앞으로도 이사님 말 잘 들어야지.
이번에 새로 개봉한 신작 영화를 보며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잠도 한숨 때렸다.
출장소 동료 행원들이 빡세게 구르는 동안 혼자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어 조금 미안해졌지만 그게 다 자기 팔자가 아니겠는가.
남의 돈으로 즐길 수 있는 건 즐겨 둬야지.
앞으로 한 달 동안 무슨 고생을 할지 모르는데.
* * *
한숨 자고 일어나니 마침 비행기가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가 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어둑어둑한 밖을 내려다보았다.
“예쁘네.”
아래에선 메르텔로랑 공항의 활주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실 이 공항은 내 목적지가 아니다. 여기서 하룻밤 묵은 다음 아침에 열차를 타고 짚업풀로 향해야 하니까.
호텔 욕조에서 몸 푹 담그고 힐링하다 자야겠다. 오랜만에 맥주도 한 캔 까고.
후리텐의 맥주는 내 입맛에 맞는 게 많았다. 특히 흑맥주와 에일이.
안주는 적당히 룸서비스 시키면 될 테고.
기껏 출장 나왔으니 이 정도 방종은 문제없겠지.
내일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왔는데.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김지안 대리.>
처음 보는 얼굴의 검은 옷의 사내들이 내 이름과 직장이 적힌 A2 사이즈 용지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뭐지?
“저어,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본점에서 왔습니다. 잠시 동행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명함 좀 보여 주실래요?”
두 사내는 망설이는 일 없이 한 장씩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다음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곧바로 밀라에게 명함을 찍어 보낸 다음 생김새를 메신저 앱으로 설명했다.
<아, 저 본점에서 본 적 있는 듯. 바라칸 이사님 밑에서 일하는 분들이에요. 근데 오빠 이분들이랑 무슨 사이에요?>
<별거 아니야. 저번에 우연히 만나서 명함 받고 인사했지.>
나는 밀라에게 대충 둘러댄 다음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들을 따라갔다.
“저어, 혹시 호텔까지 데려다주시는 건가요?”
“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사내들이 날 데리고 향한 곳은 주차장이 아닌 출발 층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탑승 수속을 마치고 와 주시길 바랍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묻자마자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린딘행 FA-181 비행기의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출발 2시간 전까지 후리텐 에어라인 창구에서 탑승 수속을 마쳐 주시길 바랍니다.>
메신저 앱에 느닷없이 도착한 메시지.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본점 행원이 말했다.
“공항 부지 관련 업무는 다른 행원이 대신 가기로 했습니다. 김지안 대리는 앞으로 한 달 동안 비밀리에 린딘에 거주하며 다른 업무를 맡아주시면 됩니다.”
“…네?”
“거절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거, 바라칸 이사님도 다 알고 있는 일인가요?”
그들은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곧바로 모르는 번호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도착한 모양이군, 김지안 대리.>
“바라칸 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셔도 될까요.”
<외부에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네. 바로 다음 비행기를 타고 린딘으로 와 주게.>
나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이해했다.
공항 부지 관련 업무는 어디까지나 주위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한 방법.
내가 맡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따로 정해져 있던 거다.
약간의 설렘과 불안.
법에 저촉되는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쥐어짜 물었다.
“제가 린딘에서 한 달 동안 뭘 하면 될까요.”
<별거 아니야.>
그리고, 이사의 대답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틈틈이 애 하나 데리고 포독스와 린딘을 오가며 교외에 관광도 다니고 놀아 주면 되네.>
“그 말은 즉 제가―”
<그래. 베이비시터가 되어 달라는 소리지.>
…이상하다, 나 분명 은행원이었던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