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86화

16차원 출장을 마친 김지안이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으며 4일 동안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

평화로운 차원신용금고 본점에선 한 천재가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흠….”

전산관리부 대리, 과타노차는 오늘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지난 몇 달 동안 시간이 남을 때마다 고심하던 문제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업무는 물론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선배 행원들의 일까지 출근 후 한 시간 내로 마쳐 버리는 놀라운 업무 능력의 보유자였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향상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과타노차는 언제나 업무의 효율화와 자동화에 관해 고민해 왔고, 이는 비단 자신의 업무 범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 정체불명의 촉수 덩어리가 원하는 것은 차원신용금고 전체의 업무 효율이 상승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그가 애사심 넘치는 행원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과타노차의 종족이 지닌 본능이 그를 부추기고 있었을 뿐이다.

“비효율적이야. 세 파벌이 각각 사용하던 전산 시스템을 억지로 하나의 허브를 통해 이어붙이다니. 이래선 분기마다 유지‧보수에 시간과 인력이 낭비되잖아.”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과타노차는 정돈되지 않은 코드와 비이성적인 사유로 인해 조성된 비합리적인 상황을 혐오했다.

“쯧. 쓸모없는 윗대가리들 같으니라고.”

모두가 알고 있듯이 차원신용금고는 세 은행이 합병되어 완성된 거대 은행이다.

저승의 신 오커스 디스파테르가 이끌던 디스파테르신용금고.

언데드가 운영하는 프라이빗 뱅크 체인 초차원넵튠은행.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신용을 보증하는 에라스무스요정은행.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던 은행이 셋이나 합쳐지면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합병 전, 세 은행은 각자 다른 업체의 전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디스파테르신용금고는 범용성이 높은 시스템을 제작하는 메드라고 컴퓨터에 발주를 넣었고.

초차원넵튠은행은 높은 보안 수준을 자랑하는 라비클로 소프트의 시스템을 사용.

에라스무스요정은행은 핵전쟁 등 극한의 상황에서도 시스템 작동을 보장하는 군납 업체 사타니엘 전기에 시스템 제작을 의뢰 후 유지‧보수 역시 일임하고 있었다.

은행의 전산망 구축은 높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사업 모델이다.

초기 구축 시에 거액의 돈을 받는 것은 물론 장기적인 유지‧보수 비용까지 챙길 수 있으니, 개발 업체에겐 그야말로 회사의 총력을 기울이기 충분한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은행은 방대한 양의 고객과 자금, 인력의 데이터를 관리해야 하며 필요한 서버의 숫자는 은행의 덩치가 클수록 늘어난다.

이런 연고로 한 번 은행과 계약에 성공한다면 뱅크런 사태가 터지는 등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계약이 유지되며 안정적인 매출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은행 전산망 제작은 큰 이권이 걸린 사업인 만큼, 관련 업체는 개발 능력과 코스트 퍼포먼스를 어필하는 건 물론 결정권을 지닌 이들에게 은밀한 로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뇌물을 보내는 건 물론 다양한 접대와 리베이트까지.

어떻게든 행내 실력자들을 구워삶아 자사의 시스템을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전부 선투자다.

은행과의 계약을 따냈을 때 훨씬 큰 보수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하는 일이다.

문제는, 디스파테르신용금고가 주도한 합병 제안에 다른 두 은행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대전쟁 시기 특수를 누리고 6-2차원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한 그레이트후리텐의 디스파테르신용금고가, 여러 차원의 부유층의 자금을 관리하던 오프쇼어 뱅크 초차원넵튠은행과 가장 완벽한 위계질서와 무력으로 신용을 지켜온 에라스무스요정은행이 손을 잡았다.

본래였다면 전산 시스템도 하나로 통합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각 은행과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업체들은 자금줄이 끊어지는 리스크를 짊어지려 하지 않았다.

고로, 그들은 합병 직전에 그동안 친분을 쌓아 둔 세 은행의 간부들에게 각자 새롭게 로비를 시도했다.

앞으로 진행될 이사회에서 자신들의 시스템이 채택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후 진행된 이사회에선, 모두가 예상했던 결론이 도출되었다.

‘하는 수 없군요. 업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각 은행의 기존 시스템을 연결하는 수밖에.’

세 곳의 은행 중 어느 한 곳 기존의 전산 시스템을 포기하려는 곳은 없었다.

그 결과, 차원신용금고는 억지로 세 시스템의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는 솔루션을 발주했다.

로비가 낳은 비효율의 극치.

새로운 시스템이 아닌, 연식이 오래된 구식 전산망을 사용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행원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불편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은행은 세 배의 유지‧보수 코스트를 감수하기로 했다.

문제는, 그렇게 사고 방지를 명목으로 내건 것치고는 이미 한 번 치명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건이 터진 건 3년 전.

정기적으로 진행되던 유지‧보수 과정에서 3개의 시스템이 충돌한 결과 차원신용금고의 모든 시스템이 예고 없이 하루 동안 정지했다.

은행 시스템은 물론 차원신용금융지주에 속한 카드사와 연동되는 부분까지 올 스톱.

차원신용금고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는 하루 만에 붕괴했고, 은행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예금 이자를 올리는 등 거액의 손해를 입었다.

한데, 가장 우스운 건 이런 일이 생겼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재발 방지를 위해 전산관리부에 인원이 추가되고 대응 매뉴얼이 만들어지는 등.

사소한 변화는 있었지만, 비효율적인 구조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과타노차가 입행한 이후에도 쭉 유지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 코드, 비효율적인 시스템, 의미 없이 낭비되는 코스트,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리스크.

전부 과타노차가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몇 달 동안은 첫 직장이라는 이유로 참고 버텼지만 이젠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딴 시스템을 관리할 바엔 차라리 목숨을 끊고 말겠어.”

하지만 오늘, 과타노차는 마침내 마음을 정했다.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자신의 말대로 목숨을 끊는 대신, 16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얻은 힌트와 깨달음을 토대로 완전히 새로운 전산 관리 시스템을 설계 및 제작하기로.

* * *

며칠 후.

차원신용금고 전 지점에 비상이 걸렸다.

시작은 대형 지점의 텔러가 발견한 위화감이었다.

창구에서 전산을 통해 고객의 정보를 조회하던 그녀는 평소보다 시스템 지연이 수십 배는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오후에 에라스무스요정은행 시절부터 계좌를 개설해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던 고객과 디스파테르신용금고의 고객이 결혼해 가족 통장을 개설하러 왔는데.

“…어? 이거 왜 이렇게 빠르지?”

각자 다른 DB 서버에 저장된 고객의 데이터가 약간의 지연도 없이 같이 표시되는 걸 확인한 텔러는 의문에 휩싸였다.

근속 3년을 넘은 그녀는 하루에 많으면 세 자릿수의 고객의 상담에 응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일 전산을 사용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사소하다 해도 이러한 변화를 놓칠 리 없다.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텔러는 곧바로 상사에게 이를 보고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수 조사.

본점을 시작해 차원신용금고의 각 점포는 이 기괴한 현상을 철저히 파헤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저 인터페이스 등 겉으로 드러나는 프론트엔드 중 티가 나지 않는 부분이 효율적으로 변한 것 외엔 차이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시스템의 안쪽, 백엔드를 들여다본 은행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각지도 못한 진실이었다.

“세 개의 시스템과 하나의 허브가….”

“전부―”

“개선되어 있어?!”

차원신용금고의 전산 시스템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완전히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워져 있었다.

예전 시스템을 토대로 재구성했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다.

모든 판단을 자율적으로 행해 최적의 업무 퍼포먼스를 수행하도록 보조해 주는 전산 시스템은 업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근데 평소보다 더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건 검증되지 않은 시스템이야! 당장 작동을 중지시켜!”

이사회의 지침은 물론 관리직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가 정지를 지시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체적인 보안이 강력합니다! 뚫을 수가 없어요!”

“취약점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소스 코드를 들여다볼 방법이 없습니다!”

“제기랄! 주말에 인터넷 뱅킹 점검 공지 올리고 서버 백업해! 포맷한 자리에 기존 시스템 재구축하고 월요일에 재가동한다!”

차원신용금고 행원들은 다급하게 기존 시스템을 재가동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고객 데이터를 백업하려 해도 서버가 토해내는 건 복호화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암호화된 데이터뿐.

서버 가동을 중지해도 새로 인스톨된 시스템은 분산원장을 통해 구동하고 있었기에 시스템이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각 점포의 단말과의 연결을 종료해도 다시 새 시스템을 인스톨할 때마다 단말이 강제로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새 시스템의 서버와 연결되며 시스템 클라이언트가 덧씌워졌다.

새 시스템은 인트라넷과 인터넷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씨앗을 뿌려 두고 있었다.

아무리 포맷을 진행해도 덮어 씌워지는 시스템.

다시 기존의 시스템을 구동하기 위해선 ATM기와 지점의 단말, 모든 서버의 기억 매체를 모조리 갈아 끼워야 하며, 만일 이를 수행한다 해도 고객과 예금 등의 데이터를 새 시스템에서 옮겨올 수 없었다.

필요한 코스트와 시간을 생각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짓.

요약하자면, 울며 겨자 먹기로 개발자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시스템을 계속 사용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시스템에 어떤 백도어가 심겨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공표했다간….”

“그동안 쌓은 신뢰가 박살 나고 말겠죠.”

그나마 다행인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스템 제작자가 시스템 내에서 오가는 모든 데이터 패킷을 은행이 확인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시스템보다 훨씬 투명하게, 모든 정보를 상시 확인 가능하도록.

이를 감시함으로써 차원신용금고 이사회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스템은 강력한 인공 지능에 의해 통제되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하게 구동 중이며 필요할 경우, 업데이트 역시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데에다 특수한 보안 계통 탓에 설계자조차 시스템을 쥐락펴락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설계자가 은행에 아무런 적대 의사도 지니지 않고 있다는 것.

“달리 방법이 없군요.”

이사회는 이번 일을 외부에 공표하는 일 없이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계속해서 시스템이 잘 굴러가는지 예의주시하며,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 게 그 전제였지만.

사실 나쁠 건 없었다.

리베이트를 받아먹던 간부들이야 불만이 쌓이겠지만, 업체에게 지불하던 유지‧보수 비용이 더는 나가지 않게 되었으니 은행 입장에선 막대한 코스트를 절약하게 된 것이다.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된 이상 문제 역시 생기지 않을 테고.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요구하는 보수도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무엇보다, 시스템의 설계자는 그동안 들이던 유지‧보수 비용과는 비교도 안 되는 푼돈만을 요구했다.

시스템에 표시된 그의 메시지에선 단지 은행이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사용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점잖은 의도만이 느껴졌다.

그게 진심인지 알 수는 없어도 이를 공표하거나 기존 시스템을 다시 가동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 외엔 이사회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 김지안 대리를 불러 시스템의 ‘잠재력’을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그의 직무권능이라면… 이름만 알고 있다면 무기물에게도 사용이 가능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렇다.

김지안이 본점으로 호출당한 데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김지안은 곧바로 오후 비행기를 타고 린딘으로 향했고, 과타노차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이사회는 내 작품이 맘에 들어 하는 모양이야.”

과타노차는 술자리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상세히 김지안에게 알려 주었고.

“…미쳤어?”

김지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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