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85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흔히들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을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 삼아 말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헤….”
몸을 되찾은 소녀, 레이니가 깨어난 날 보고 웃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언데드 특유의 창백한 혈색과 수술흔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인간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데드의 몸을 되찾을 줄 알았던 나는 예상했던 이상의 기적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안 형제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이가 몸을 되찾는 것도, 제가 폭주에서 벗어나는 것도.”
고개를 돌리자, 이로울이 소리도 없이 곁에 다가와 앉아 있었다.
주위가 조용한 걸 보니 제때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너 때문에 다 죽을 뻔했다고.”
“죄송합니다. 심신미약 상태였던 점을 감안해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
그래, 뭐. 얘 때문에 사상자가 나온 것도 아니고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만.
“…테러범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천사의 재를 터뜨린 자의 행방이었다.
“체포당해 끌려갔습니다.”
“그렇구나….”
잡혀갔으면 된 거다.
죽은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지.
“…아.”
그러고 보니, 구C 행원들 괜찮으려나.
* * *
며칠 후.
그레이트후리텐 수도 린딘에 자리 잡은 차원신용금고 본점, 이사회실.
평소였다면 다른 파벌의 경쟁자들을 노려보는 근엄한 얼굴의 이사들 탓에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던 이곳에선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
참지 못하고 의문을 제기한 건 디스파테르 행장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긴 테이블의 좌측에 앉은 구C 출신 이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
테이블에는 어째서인지 같은 얼굴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 여럿이 앉아 있었다.
“행장님, 그게, 실은….”
곁에 있던 비서가 16차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용히 디스파테르 행장에게 귀띔해 주었다.
“…하하. 아하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행장이 이사회에서 웃은 것은.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힘겹게 웃음을 멈춘 디스파테르 행장은 찔끔 흘린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초차원넵튠은행 출신의 행원이 살아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야.”
행장의 말에 같은 모습으로 변한 이사들이 일제히 얼굴을 찌푸렸다.
저들은 16차원에서 ‘천사의 재’를 사용한 테러에 휘말려 한 차례 몸을 잃었고, 그 후 단원자 금의 힘으로 레이니가 살아 있는 육체를 되찾을 때 휘말리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영혼을 잃는 일 없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레이니와 완벽히 똑같은 모습을 가진 몸을 가짐으로써.
“…….”
망자가 아닌, 생자의 육신을 지니게 된 이사들의 표정은 언데드였던 시절보다 훨씬 다채로워져 있었다.
구C의 중진들이 같은 얼굴로 변한 탓에 당장 업무에 지장이 생기는 건 물론이요, 당사자들조차 침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 등으로 제작한 무기질한 그릇에 영혼을 담아 두던 그들은 생전의 모습과 동떨어진 여아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살아 있던 시절 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박탈감을 느낄진 알 순 없지만, 이미 언데드로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이들이 새로운 몸에 적응할 수 있을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구C는 안전한 차원 이동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다차원 영업을 진행하던 파벌이다.
그들에게 있어 망자의 몸은 일종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 훈장을 잃은 구C 이사들이 예전만큼 휘하의 간부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오늘은 더 뭘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군.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행장님…!”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디스파테르 행장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구C 이사들이 저 모양이면 오늘 구E의 약점과 연관된 ‘그 안건’을 다루기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행내 세력 간의 균형은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행장의 지론이었다.
“김지안, 또 저질러 줬군.”
베르나데 박사의 대출은 확실히 성과를 냈다.
행내 정치 구도와는 별개로 소녀는 목숨을 건졌고, 이는 차원신용금고에 관한 미담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구C 이사들도 살아 있는 몸을 얻었으니, 잃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테고.
다만, 이번 일은 틀림없이 구E와 구C의 대결 구도에 변화를 일으켰다.
애초에 천사의 재를 일개 퇴역 군인이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구E의 개입을 의심케 하고 있었다.
좋게든, 나쁘게든 김지안과 다차원 출장소는 멈춰 있던 국면에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도가 차원신용금고라는 거대한 배를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현세를 살아가는 신인 디스파테르 행장조차 알 수 없었다.
* * *
후리텐 북부.
엑토플 라즈마의 고향.
고아원을 찾은 라즈마를 본 원장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이니가…둘?”
“…….”
“레이니가… 둘? 어라, 왜 두 번 말한 거지?”
“그쯤 하십시오.”
라즈마가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꾸짖었지만, 원장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젠 그녀라고 해야 할까.
“라즈마입니다.”
“…레이니 선생님한테 장난치면 못 써! 언제 양복 같은 거 구한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라즈마입니다.”
“그게 무슨….”
원장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라즈마의 모습은 살아 있는 몸을 되찾은 레이니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형태로 변해 있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라즈마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복잡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야 원장은 조금씩 믿는 눈치였다.
“설명하자면 깁니다. 레이니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벼운 사고, 라고 해야 할까요?”
타인인 원장이 바로 알아먹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사자인 라즈마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이번 일을 해결한 김지안과 베르나데 박사의 설명을 듣고도 한동안 어이가 없어 대답하지 못했을 정도다.
‘그러니까, 라즈마 과장님은 천사의 재가 발한 빛에 당해 한 번 몸을 잃었고요.’
‘…레이니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단원자 금의 출력이 상상 이상으로 컸던 탓에 휘말려 인간의 몸을 지니게 되신 겁니다.’
그날, 5층에 있던 언데드들은 죄다 천사의 재에 당해 육체를 잃었다.
가둘 그릇이 사라졌으니 영혼 역시 소멸하려 했고.
당연한 일이었다. 언데드의 영혼은 사후세계로 갈 수 없다. 몸을 잃으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허무였다.
하지만, 김지안과 베르나데 박사는 대량의 단원자 금을 사용해 완전히 사라진 레이니의 육체를 복구했고, 두 사람이 그린 이미지와 의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에 단원자 금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켜 라즈마도 똑같은 몸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성별도 나이도 뒤바뀌고 말았지만 영혼을 담는 그릇, 심지어 생자의 몸이 생긴 이상 라즈마는 계속해서 이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슬퍼해야 할지, 라즈마 자신도 솔직히 말해서 잘 알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건 언데드로 지내던 때와는 달리 짜증은 물론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주로, 자신이 이런 모습이 되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김지안을 향한 분노라든지.
“그래도, 그 모습이라면 아이들과 섞여 놀아도 자연스러우실 것 같은데요? 다음엔 낮에 놀러 오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사양하겠습니다.”
“…농담이었던 거 아시죠?”
원장은 야외 테이블에 놓은 찻잔에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가득 따라 주었다.
라즈마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잔을 들어 들이켜다 입술을 데고 말았다.
“…….”
언데드로 살아가던 동안 먹지고 마시지도 않았던 탓에 찻물이 뜨겁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달빛 아래, 홍차에 비춘 낯선 얼굴을 들여다보는 라즈마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참으로… 불편하군요. 살아 있는 몸이라는 건….”
“새삼스럽네요. 예전엔 똑같이 그런 불편한 몸으로 사셨을 텐데.”
“이미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옛날 일인지라.”
원장은 싱긋 웃으며 라즈마의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집어넣어 주었다.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겠죠, 뭐.”
라즈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몸을 얻고 나서야, 어째서 그동안 언데드인 자신이 계속 이 고아원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친구와의 약속과는 별개로, 라즈마는 이곳에 올 때마다, 멀리서 고아원 건물에 켜진 불빛을 볼 때마다 생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미 죽어 영혼만 남은 자신과 달리, 아이들은 죽음에서 멀고 삶과 가까웠다.
먼 옛날에 잃어버린 시간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부러워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식은 차를 들이켰다.
“…달군요.”
“저런. 설탕을 너무 많이 넣은 걸까요?”
“아니요.”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미각이 당분의 충격에 눈을 뜨고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닌, 한 번 잃어버린 것을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감각.
라즈마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되어 세상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무력하고, 불편하고, 번거롭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군요.”
이게 삶이라면, 살아 볼 만하다고 느꼈다.
* * *
며칠 후.
병원에서 별의별 검사를 다 받고 푹 쉬다 출근한 나는, 창구에 앉은 순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달라진 라즈마 과장의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었다.
대여섯 살밖에 안 된 하얀 머리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한 엑토플 라즈마는, 외모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이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전히 감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사고의 여파로 부활한 레이니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지만,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언제부터 출장소가 대리가 과장 놀려도 되는 곳이었지?”
-타악!
그때였다. 엘라마의 손바닥이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 건.
“직장 내 폭력 멈춰!”
“어디서 반말이야. 이게, 확!”
큰일을 겪은 라즈마를 배려하는 건 알겠는데, 사건 해결한 데에 손을 보탠 내 공로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아… 이런 취급 받을 거면 왜 그 생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네.”
솔직히 5층에 있던 구C 이사들이랑 간부들, 다 내 덕에 목숨 건진 거 아닌가?
마음 같아선 생색 좀 내고 표창도 받고 그러고 싶은데.
“아이를 살렸으면 된 거 아닌가?”
“대리님은 욕심이 많아서 탈이야.”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작과 플루토가 키득거렸다.
그래, 나는 조직에서 일하는 몸이고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니까.
사실 윗선에서 뭐 챙겨 주는 거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
이번 일로 대우나 처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것도 좀 우습긴 하다.
그냥 은행원으로서 사명을 다했으니 된 거다.
엘라마가 알아서 인사 고과 챙겨 주겠지.
“참. 김지안. 본점에서 호출이 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소장실로 돌아가던 엘라마가 다시 돌아서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저요? 무슨 일이지….”
“이사회에서 사흘 정도 네놈에게 시킬 일이 있다더군. 전산 관련 업무라는데.”
“…전산이요?”
“티켓은 예약했으니 오후 비행기로 건너가서 내일 오전까지 본점으로 출근하도록.”
“저,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인지만 알려 주시면―”
“가서 직접 물어보든가.”
“…….”
뭐지. 그런 건 과타노차한테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나 이공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