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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8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84화

나는 사우 박사가 말한 대로 하나씩 ‘기적’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착수한 건 기절한 베르나데 박사를 깨우는 것이었다.

“박사님! 일어나세요!!”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근처에 있던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얼굴에 뿌려 봤지만 역시나 의미는 없었다.

“제기랄.”

하는 수 없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베르나데 박사의 볼을 후려쳤다.

왼손으로 멱살을 잡아 일으킨 다음, 오른손으로 힘껏.

-짜악!

하지만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박사.

나는 하는 수 없이 손등까지 사용해야만 했다.

-퍽!

“커흑.”

그제야 깨어난 베르나데 박사는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거, 거기 누구인가.”

“차원신용금고 김지안 대리입니다. 박사님, 혼란스러우신 건 알겠지만 아직 레이니 양을 살릴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박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레이니 양의 몸은 사라졌지만… 나노이의 리바이 사우 박사님께서 단원자 금의 힘을 사용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박사님께서 보유하신 단원자 금 외에도 추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저기에 있죠.”

나는 상공에서 이로울과 싸우고 있는 콜로서스를 가리켰지만, 박사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에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말씀하신 단원자 금은.”

박사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여긴 어디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베르나데 박사의 눈은 멀어 있었다.

* * *

끔찍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우린 계속해서 사우 박사와 연락하며 작업을 이어 갔다.

베르나데 박사의 실명은 일시적인 현상.

아마도 지근거리에서 천사의 재가 발한 광채를 보고 만 탓이었다.

몇 시간 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그의 시력을 대신해, 내가 사우 박사와 베르나데 박사의 지시를 들어가며 기계를 조작했다.

<아시겠어요? 중요한 건 콜로서스와 기계를 연결하는 거예요. 베르나데 박사님께 외부 통신 기능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외부 통신 기능 유무 확인 부탁드립니다.”

“혹시 몰라 원격 조작 기능도 제작할 때 설계도에 포함시켜 두었습니다. 표준 와이파이 규격인데 나노이에서도 같은 걸 사용하고 있나요?”

<다행이네요! 20년 전부터 비주류가 되어서 사용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드라이버 업데이트만 하면 콜로서스가 통신을 시작할 수 있어요!>

나는 두 사람이 시키는 대로 콘택트렌즈의 UI를 통해 콜로서스에게 지시를 내리는 한편 병원의 주문 제작 의료 기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적은 양의 단원자 금을 사용하고 있는 이 기기에, 콜로서스가 동력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량의 단원자 금, 그리고 정령들의 힘을 더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다들, 조금만 더 버텨 줘…!”

조종석에 앉아 낑낑대는 정령들은 태초의 네 가지 힘을 끌어내 천사의 권능에 맞서고 있었다.

단원자 금의 힘을 계속 사용했다간 이로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이 지닌 본래의 힘을 콜로서스에게 부여하고 있던 것이다.

-우웅!!

콜로서스가 상대하는 이로울은 평온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소 지은 표정이지만, 단 한마디도 없이 콜로서스를 압박하는 그 모습에선 광기가 엿보였다.

이성도 감정도 맛이 가 버린 탓에 가장 많이 지어 본 표정을 짓고 있을 뿐, 그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내 눈의 힘으로 판독하는 한 감정이 아닌 혼돈의 색만을 띠고 있었다.

-삐빗!

“됐다!”

다행히도, 나는 제때 수동으로 기계의 외부 통신 기능을 활성화시켜 콜로서스와 연결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뭘 해야 하죠?!”

내가 다급하게 묻자, 스마트폰 수화기 너머에서 전자음이 들려 왔다.

사우 박사가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사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다음이 중요하니까!>

단원자 금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연금술은 복잡한 학문이다.

당연히 평범한 은행원인 나는 이쪽 분야에 관해 아는 일이 없었고, 전적으로 사우 박사와 베르나데 박사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

<먼저 베르나데 박사님과 함께 기계를 작동시켜야 해요. 영혼에 육체를 입히기 위해 단원자 금의 에너지를 창조에 사용하는 프로토콜을 활성화시키는 거죠.>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덕에 사우 박사의 지시를 확인한 베르나데 박사는 군말 없이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그의 눈과 손이 되어 기계를 작동시켰다.

-파직!

기계의 본체인 원통형 수조 안에 한 줄기 벼락이 쳤다.

“수육受肉을 위해선 레이니의 영혼을 보호해야만 합니다. 일단은 이 안에 보호해야만 해요.”

이어서 박사는 영혼을 잘라낼 때 사용했던 커다란 메스를 호스에 연결하도록 내게 지시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칼을 들고 희미해져 가는 레이니의 영혼과 이를 고정하고 있는 손톱만 한 살덩이를 주시했다.

레이니의 몸이 소금으로 변한 탓에, 살덩이는 끊임없이 수분을 잃어가고 있었다.

“레이니의 영혼을 저기서 잘라내고 영혼을 수조 안으로 옮겨야만 합니다.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흡입 기능이 작동하기 전에 영혼이 날아가 소멸할 겁니다.”

더럽게 어려운 요구.

잠시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그대로 끝장이다.

차라리 내가 박사님께 타이밍을 알리는 쪽이 나을지도.

“제가 신호를 보내도 될까요?”

“그게 차라리 낫겠군요.”

“그럼 셋 세고 시작할게요! 하나! 둘!”

“너무 급합니다!”

“셋!”

나는 박사의 비명을 무시하고 살점과 영혼의 사이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무언가를 베는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아이의 형태를 한 무언가에게 칼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들었다.

-촤악

하지만.

나는 해야만 했다.

레이니와, 나, 그리고 도시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선.

-기이이잉!!

그리고 정확하게 칼날이 육과 영의 사이를 베어낸 순간, 흡입 기능이 작동하며 레이니의 영혼이 초대형 메스의 배로 빨려 들어갔다.

반투명한 회색의 영혼이 호스를 지나 수조로 향하자 기계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섯 살의 영혼은 수조의 크기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처럼.

<이제 마지막 단계예요! 레이니의 신체 데이터를 입력해 주세요!>

베르나데 박사가 사우 박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동안, 나는 콜로서스의 조작을 수동 조작에서 직접 조작 모드로 전환했다.

-큐우우!!

정령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이로울의 공격을 피하며 강하하도록 지시를 내리자, 콜로서스가 전투 보조 AI를 가동하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머진 지안 씨와 베르나데 박사님께 달렸어요!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 그게 있다면 단원자 금의 힘을 사용할 수 있어요!>

사우 박사는 말했다.

연금술은 틀림없이 복잡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콜로서스는 최고의 연산 능력을 지닌 기계. 그리고 단원자 금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단말이다.

즉, 콜로서스가 그 자체만으로도 단원자 금 반응로에 명령을 입력하는 키보드나 마우스 같은 입력 기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이해하거나 연금술의 지식을 갖출 필요는 없다.

간절한 의지와 소망이 있다면, 콜로서스에게 그것을 ‘입력’할 수만 있다면.

단원자 금의 힘으로 우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쾅!

콜로서스가 이로울의 머리에 정통으로 일격을 먹였다.

90도로 꺾인 목.

천사의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부러진 경추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겠지만, 덕분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부웅!

강하해 허공에서 멈춘 콜로서스.

찬란한 빛을 내뿜는 로봇에서 빠져나온 정령들이 한 덩이로 뭉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박사님!”

“알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힘.

그리고 소녀의 생환을 간절히 원하는 두 사람의 마음.

정령들이 발한 빛무리가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콜로서스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찬란히 빛나는 로봇의 자태는 가히 신과 같았다.

-우우웅!!!!!

수조 안을 떠도는 미세한 단원자 금이 콜로서스와 공명을 일으키자, 로봇과 수조가 모두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부탁이니까, 제발!!!”

나와 베르나데 박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수조에 달라붙었다.

단원자 금은 마음의 힘을, 의지의 힘을 증폭시켜 실체로 구현한다.

신들이 우주를 창조했을 때 남은 권능의 조각.

아이의 생명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본래 허락되지 않은, 섭리를 거스른 기적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콰아아아!!

뒤늦게 목을 제자리로 되돌린 이로울이 검을 들고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광기에 잠식되어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하는 천사의 공허한 눈.

자비로운 살의가 담긴 빛의 검이 우리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 하는 그 순간.

-파창!

천사의 재가 발했던 광채보다 수십 배는 화사하고 따뜻한 빛이 수조에서 터져 나왔다.

* * *

“…어라.”

난장판이 된 수술실에서, 이로울은 눈을 떴다.

부서진 천장.

바닥에 널브러진 로봇 피규어.

그 옆에는 입행 동기인 김지안과 베르나데 박사, 그리고 빛의 고리를 잃은 천사가 쓰러져 있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던 이로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이로울은 떠올렸다.

분명, 동포가 사용한 천사의 재가 레이니라는 아이의 몸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다음, 자신은 분노했고―

“오오, 주여. 제가 대체 무슨 일을….”

이로울은 김지안과 박사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둘은 살아 있었다.

이로울은 자신이 저지른 참사와 마주하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다.

도시 하나를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죄책감에 짓눌릴 것 같았지만, 자신의 죄악을 외면할 수 없었다.

“……?!”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언덕 아래의 도시는 멀쩡했다.

이로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머저리 같은 놈. 대체 일을 얼마나 까다롭게 만들 셈이냐.”

그곳에는 엘라마 출장소장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품에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바로, 완전히 육체를 소멸당했던 언데드 소녀 레이니가.

아니.

자세히 보니 아이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로울은 아이에게 다가가 그 손을 쥐어 보았다.

살아 있는 자의 온기가 느껴졌다.

“언데드가… 아니군요.”

“그래.”

소녀는 기절한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손목에선 미약한 맥박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낸 건진 알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육체를 되찾은 것이다.

“아이는 살렸지만 은행의 돈으로 만든 기계가 작살났군. 시말서는 누가 써야 할지, 참. 또 난가?”

쓰게 웃으며 투덜거리는 엘라마의 얼굴에선 말과는 다르게 어째서인지 후련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주 본 이로울 역시 웃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천사의 눈가에는, 투명한 은색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시선은 쓰러진 김지안을 향하고 있었다.

“지안 형제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예상치 못한 일투성이였지만.

이번 대출 업무도 입행 동기, 김지안이 성공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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