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71화

‘어쩌면 두 집안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골은 관습과 전통에 의한 걸지도 몰라요.’

일주일 전, 암살자를 돌려보낸 다음 미놀리가 꺼냈던 한마디가 내게 힌트를 주었다.

정치가들에게 있어 국가 단위의 증오는 큰 힘이 되어 주곤 한다.

존재하는 다른 국가, 민족을 악마와 동일시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국가 단위로 교육과 선동을 통해 만들어 낸 집단적인 증오는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오랜 시간 동안 그 영향을 발휘한다.

물론, 오랫동안 원수 사이로 지내온 두 집안의 증오 역시 깊긴 할 거다.

당장 내가 살던 지구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있지 않나.

그런 스토리가 과거에도 흥행했다는 건 옛날 유럽에선 가문 간의 암투, 투쟁 등이 꽤나 흔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피로 피를 씻는 싸움 같은 건, 아프리카의 부족끼리 전쟁을 치를 때에나 일어나는 거지.

현대 사회에서 집안싸움이 그런 스케일로 번지는 일은 없다.

최소한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

충분히 발달한 문명을 가진 6-2차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증오는 연료를 필요로 하는 감정이다.

수백 년 전 같은 초콜릿 가게에서 일하다 갈라선 두 집안은 계속해서 서로를 라이벌시 해 왔다.

사법 체계가 다르던 근대엔 집안끼리 결투를 하는 등 구성원이 부상을 입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누구 하나 죽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정말로 수백 년 동안 선조들의 악연을 이어올 정도로 두 가문의 증오는 깊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가문의 증오엔 연료가 부족했다.

아디젠과 미놀리에게 들은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 간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상대를 혐오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도 증오하고 살의까지 품을 만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문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죽일 것처럼 굴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 습관, 관성, 그리고 착각.

한번 상대를 악마라고 인지한 순간, 그 모든 행동이 위협으로 느끼게 된다.

자신들과 같이 감정을 지닌 생물이라는 걸 잊으면,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지구에서도 직접 전쟁을 겪은 세대보단 그 아래 세대가 이전 적국으로서 싸운 나라의 사람들을 미워한다고도 통계가 말하고 있지 않나.

두 가문은 이유 없이 서로를 미워했을 뿐이다.

이번 일은 어느샌가 정착해 버린 라이벌 구도와 과거의 은원이 관성적으로 흘러 버린 결과 일어난 유감스러운 사건이다.

그러니까 우린, 연료를 잃은 채 골골대던 엔진을 멈추면 된다.

그 방법이 조금 강제적일 수는 있어도,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으니까.

* * *

“안녕, 아저씨들. 오랜만이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요하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의 색깔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문어처럼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켰다가 인간의 형태로 돌아온 것이다.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알리가도 나페르도, 낭패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 만나러 간다고 연락했잖아. 계약 해지할 거라고.”

비록 살인을 의뢰한 건 아니어도 암살자를 보내 자식들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무리도 없다.

“뭐냐, 알리가 네놈이 왜 요하네를….”

“그쪽이야말로 언제 저놈에게 의뢰를 맡긴 거지?”

보아하니 양쪽 모두 상대 가문이 자신과 똑같은 의뢰를 맡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죽이지 말라고 한 건 만에 하나 자신의 자식이 휘말리면 큰일이라서겠지.

혹은, 아무리 상대 가문이 밉다 해도 죽일 만큼은 아니라든지.

어느 쪽이든 참으로 묘한 상황이다.

“그쯤 하시죠. 오늘은 싸우자고 두 분을 모신 게 아니니까요.”

내가 제지하자 두 가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싸우고 물어뜯고, 경영과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 적대하는 것 외엔 서로를 대하는 방법을 배우거나 고민한 적 없던 두 사람에게 싸우지 말라고 얘기해 봤자 들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게 이쪽이라면 과연 어떨까.

참고로 말해 두자면 내가 쥐고 있는 칼은 매우 예리하다.

한 번 휘두르면 두 사람의 평판을 망치는 건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자식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그에 더해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바이나우스와 메종 드 레오니아브의 브랜드 평판을 모조리 한 큐에 골로 보내 버릴 수 있는 전략 핵탄두와도 같은 무기.

“싫으시다면 두 분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언론에 증언할 생각인데, 어떠신가요?”

“…….”

“…….”

“물론, 여기 계신 요하네 씨의 인터뷰 역시 기사에 실릴 예정입니다. 두 분께 의뢰를 받고 움직이려 했지만, 난이도에 비해 보수가 적어 거절했다, 같은 이야기가 실리겠죠.”

점점 창백해지는 두 회장의 얼굴.

한편, 자신들의 아버지를 지켜보는 아디젠과 미놀리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천장 뒤에 숨겨 둔 콜로서스는 실시간으로 저들의 감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두 가주는 위엄 있는 외모 뒤에 불안감을 숨기고 치밀한 계산을 시작한 참이었다.

“무엇을 원하나.”

예상대로 이쪽의 조건을 먼저 묻기 시작했다.

결정권을 지닌 위치에서 오래 있다 보면 다 저렇게 된다.

자신이 먼저 무언가를 제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남이 내미는 조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고르면 되니까.

지금 내게 ‘뭘 원하는지’ 묻고 있는 게 그들이 가진 오만함의 증거다.

아직도 자기네들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다.

그 환상을 부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희가 뭘 원하는지보단 두 분께서 여기 계신 신혼부부에게 뭘 해 주실 수 있는지 말씀하시는 게 우선이 아닐까요?”

이것들이 어디서 용팔이 짓을 하려 들어.

아쉬운 사람이 제시해야지.

“…….”

“…….”

두 회장님들께선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시선은 각자의 자식을 향하고 있었다.

알리가는 미놀리를, 나페르는 아디젠을 주시하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상황.

평소였다면 말 잘 듣는 자식이 알아서 숙이고 나왔겠지만, 이번은 다르다.

중간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무기 거래상이 살상용 무기를 요하네에게 들려 주긴 했지만, 애초에 양가 아버지들이 두 사람에게 외압을 행사해 부부 사이를 찢어 놓으려 한 건 사실이니까.

“참고로 말해 두는데, 이쪽 젊은 친구들은 전부 얘기 듣고 왔어. 그러니까 추하게 발뺌하지 않아도 돼.”

착수금도 받고 의뢰 승낙했던 놈이 잘도 저딴 소리를 지껄인다.

잘 풀리면 프라이빗 뱅커 유능한 사람 소개해 준다 했더니 엄청 신나 있는 모양이다.

“차원신용금고가 우리에게 뭘 바라는지 잘 모르겠군.”

나페르가 말했다.

이들은 아직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을 들어 보니 내가 차원신용금고를 대표해 두 회장에게서 무언가를 뜯어내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뭔가 크게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분명 두 분이 신혼부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여쭤보았습니다.”

나와 아이작의 나이가 얼마 안 되는 걸 보고 은행 윗사람들을 압박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어림도 없다.

“차원신용금고는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에게서 그 어떤 이득도 취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나와 있는 저, 김지안 대리와 아이작 대리는 은행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일개 대리의 신분으로, 그리고 대출 담당자와 아디젠 씨 부부의 친구로서 이 자리에 와 있는 겁니다.

이 모든 행동은 저희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거한 것이며 행장님과 이사회의 허락을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나는 은행이라는 조직의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이며 잃을 게 없다는 사실을 내세움으로써 선수를 쳤다.

저 둘이 무슨 계산을 하는지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저희가 뭘 원하는지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전 대출 담당자로서 두 고객님이 가문의 압력을 벗어나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시길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은행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 고객의 행복을 원한다.

그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말을 꺼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나의 진심이었다.

“두 어르신께서 협상해야 하는 건 은행원인 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디젠과 미놀리에게 정면 돌파를 제안했다.

이 자리에 자신들의 아버지를 불러낸 건 그들의 결정.

두 사람은 이미 이번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폭탄 삼아 가족들에게서 원하는 걸 얻어내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다.

나와 아이작이 맡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 과정이 스무스하게 진행되도록 돕는 것뿐.

나머지는 저들, 둘의 몫이다.

“양가 아버지가 자식들의 결혼을 망쳐 놓으려 한 시점에서 이미 관계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볼 수 있지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자제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직접 들어 보시죠.”

“…….”

내가 말을 마친 다음에야, 두 회장은 자신의 막내딸과 막내아들을 보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그들의 시선은 자식들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로 자식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두 아버지는 막대한 권력을 지닌 자신들에게 맞서는 아들과 딸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반역자의 얼굴을 보았다.

여태껏 자신의 소유물이라고만 생각해 온 자식을, 마침내 한 명의 적수로, 인격체로 인정하고 바라보게 된 것이다.

“…건방진 놈.”

“내가 늑대 새끼를 길렀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두 사내 모두 입가에는 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딘가 후련함마저 느껴지는 미소.

그들의 모습에서 오만하고 고압적인 가주의 얼굴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못내, 자식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어리석은 짓까지 저지른 아버지.

그게 바로 저들이 감추고 있던 진짜 얼굴이었다.

“…망할 것들 같으니라고. 기어코 내 뜻을 거스르려 들다니.”

“말해 봐라. 너희 두 년놈이 무엇을 원하는지.”

험한 말을 하고 있지만 한결 누그러진 두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은 부부는 지긋이 서로를 마주 보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 * *

두 달 후.

그레이트후리텐의 수도 린딘에선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랑, 아디젠 바이나우스.

신부, 미놀리 레오니아브.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던 두 초콜릿 명문가의 막내아들과 막내딸이 운명처럼 맺어진 이 날.

수백 명의 하객이 혼례에 참가해 자리를 빛냈고.

기자들은 앞다퉈 플래시를 터뜨렸다.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행복해 보이네.”

“그러게요.”

혼자 오긴 좀 그랬던지라 밀라를 데려왔는데 녀석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남의 결혼식에 온갖 치장은 다 하고 왔다.

누가 보면 아디젠 씨가 전남친인 줄 알겠네.

“참, 그러고 보니 오빠는 결혼 생각 있어요?”

“응. 아들이랑 딸 하나씩 낳아서 행복하게 살려고.”

“여친… 있었어요?”

“아니.”

밀라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을 했다.

사레들렸나.

쨌든, 양가 아버지는 막내들의 결혼 덕에 화해까진 아니어도 카메라 앞에서 악수를 해야만 했다.

당연히 표정은 썩소.

그래도, 수백 년에 이르는 원수지간이 약간은 해소된 게 아닐까 싶다.

괜한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은행에서 돈을 빌려 간 고객이 최대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앞으로도 저 두 집안은 계속 싸울 테지만 일단 사돈이 된 이상 체면 때문에라도 서로 대놓고 치고받진 않겠지.

대출도 무사히 성사되었고, 두 사람은 린딘 한구석에 작은 초콜릿 가게를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맞다. 밀라 너, 초콜릿 좋아해?”

“당연하죠. 근데, 갑자기 그걸 왜 물어요?”

“그냥. 저기 뷔페에 많길래 몇 개 가져올까 했지.”

“뭐야. 지금 저 에스코트해 주는 거예요?”

“까불지 마.”

나는 녀석의 말랑말랑한 갈색 볼을 잡아당겼다.

저번엔 밀라 녀석이 내게 초콜릿을 줬으니, 이번엔 나도 몇 개 사서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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