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70화

자신을 전설적인 암살자, 요하네라고 소개한 사내는(사실 성별이 남성이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바이나우스 부부와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에 적힌 내용은 앞으로 아디젠과 미놀리는 물론, 차원신용금고의 고객과 행원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용한 합의서는 엘라마가 상시 소지하고 있던 물건으로 마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신물이었다.

차원신용금고의 행장이 지닌 신력神力이 짙게 반영된 물건이라서 그런지, 어지간한 신들조차 합의에 반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고 하니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지.

사실 요하네가 여기 서명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앞으로 차원신용금고와 관계된 인물을 노리지 않을 거란 약속의 대가로 요구한 건 이쪽이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가 지닌 능력 때문이었다.

암살자 요하네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 도플갱어의 일원이었고.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전설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진 아무 근거도 없는 헛소리였다.

도플갱어는 신체의 일부, 혹은 전체를 자유롭게 다른 생물처럼 변화시킬 수 있다.

중요한 건 여기서 말한 ‘처럼’이라는 게 겉모습만 변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플갱어는 체질부터 그 육체가 지닌 능력까지 복제할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 버리는 순간 대책을 세우기 시작할 것이다.

요하네의 입장에선 자신의 영업 비밀을 알게 된 우리를 살려 두고 싶지 않겠지만, 죽이는 순간 의뢰가 실패하게 되니 일류 업계인의 직업윤리를 따르는 겸 최대한 서로에게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해결할 수 있다는 엘라마의 조건을 받아들인 거겠지.

이쪽 역시 손톱이 뽑히는 가벼운 대가만을 치르고 사태를 끝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하네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평범한 인간인 내게 그럴 깡도 무력도 있을 리 만무하다.

“재수 없는 놈이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얘기가 통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요.”

보다시피 이렇게 뒤에서 소심하게 씹는 게 내게 가능한 복수의 한계치.

“그래도 이 이상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게 어디냐. 비슈티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암살자와 마주쳤는데도 목이 남아 있는 걸 감사하라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불안에 시달리던 신혼부부도, 이젠 편안히 잠에 들 수 있겠지.

* * *

오전 6시 30분.

결국 잠을 설친 나는 담배를 들고, 리조트의 흡연 구역으로 나왔다.

“…김지안?”

그곳에선 아이작이 먼저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너도냐?”

-끄덕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도 착잡한 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린 한동안 말없이 연기를 마시고 뿜어내기만 했다.

굳이, 콜로서스의 레이더와 눈의 힘을 조합할 필요조차 없었다.

눈이라는 게 달려 있는 이상 나도 아이작도, 서로의 얼굴에서 지독한 패배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아….”

차마 뭐라 얘길 꺼낼 수가 없었다.

딱히 무언가를 잃은 건 아니다.

빌려준 돈을 뜯긴 것도 아니고, 고객이 변을 당한 것도 아니다.

분명 암살자는 물러났고 우린 더는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나와 아이작은 이번 사태에서 자신들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처절할 정도로 깨닫게 되었다.

“있잖아, 아이작. 우리,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던 거 아니냐?”

“글쎄다. 네가 없었다면 콜로서스가 출장소에서 로켓을 베지 못했을 것 같은데.”

아이작은 날 위로하기 위해 어렵사리 문장을 짜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콜로서스가 해낸 일이잖아.”

“은행원이 굳이 암살자를 물리적으로 막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필욘 없어.”

“그건 맞긴 한데….”

“자연재해 같은 거야. 저런 놈들은. 우린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

“…….”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살아남은 게 순전히 운 덕이었다고 느껴지는 걸 부정할 순 없다.

“할 수 있는 거, 뭐가 있을까. 과장이랑 차장도 쩔쩔매는 상황인데. 우린 이제 갓 대리 단 햇병아리들이잖아.”

“글쎄. 비슈티 과장처럼 싸울 순 없더라도 은행원의 본분에 충실할 순 있겠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잖아?”

“아….”

아이작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나는 흥신소 직원이 아닌 은행원이었다.

너무 다이내믹한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자신의 본분을 잊을 뻔했다.

나는 대출 창구 담당자.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은행에서 필요한 돈을 빌려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

그렇다면 이번 대출을 통해 내가 아디젠과 미놀리 부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 * *

부부가 신청한 대출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본점에서 통과가 되었다.

딱히 이사회가 개입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으로 그들의 잠재력과 보유한 기능, 기타 요소를 고려해 공평한 심사를 거친 결과.

두 사람이 각자 바이나우스와 레오니아브의 두 초콜릿 브랜드의 키키와이 플래그쉽 스토어의 점장으로 일하며 모은 돈은 결코 적지 않았다.

차원신용금고에서 받은 대출까지 합치면 12차원 등 땅값이 말도 안 되게 비싼 곳이 아닌 이상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주거지와 가게를 겸한 작은 3층 건물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이로써 부부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두 가문 사이에 존재하는 오래된 원한의 사슬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을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준비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이미 암살자를 상대하며 깨달은 교훈을 곧바로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리조트에서 살벌한 밤을 보내고 일주일이 지난 즈음, 나는 새로운 은신처에 숨어 있던 아디젠에게 연락했다.

“준비되셨나요?”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약속 장소로 나서겠다 말했다.

그렇게 일곱 시간이 지난 후.

비행기를 타고 키키와이에서 린딘 국제공항으로 건너간 우린 도착 층 로비에서 만나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미리 예약한 10인석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레오니아브가의 가주이자 고급 수제 초콜릿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메종 드 레오니아브의 회장.

미놀리의 아버지 알리가 레오니아브였다.

“…오랜만이구나. 미놀리.”

“아버지.”

딸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알리가.

이렇게만 보면 부유한 상류층 신사로만 보이지만.

“아버님.”

“…….”

아디젠이 그를 불렀을 때, 알리가는 철저히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가 이곳을 찾아올 수 있던 건 우릴 미행해서가 아니다.

나와 아디젠 부부는 상의 끝에 하나의 해결책을 떠올렸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알리가 레오니아브를 이 자리에 불러낸 건 다름 아닌 그의 막내딸, 미놀리 레오니아브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알리가는 신경질적이지만 섬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트렌디한 패션은 그를 예술가처럼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아니, 그가 만드는 초콜릿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예술가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다만, 그 성질머리는 퍽이나 대단해 보였다.

“차원신용금고에서 왔나.”

“그렇습니다.”

“네놈들과 할 얘긴 없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이곳을 떠나도록.”

노회한 초콜릿 장인은 딸의 옆자리에 앉아 가만히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나와 아이작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막내를 꼬드겨 대출을 받게 한 게 네놈들인가? 꽤나 건방지군. 네놈들의 윗대가리들을 불러와라. 예의범절을 처음부터 교육해 주마.”

대뜸 그렇게 이니시를 걸길래 대답 대신 씨익 웃어 주었다.

“그건 어렵겠네요. 이건 저희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이라서요. 아, 대출 말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 얘깁니다.”

어차피 오늘은 다른 과장도 엘라마도 없다.

여기 있는 은행원은 나와 아이작뿐.

어디까지나 표면상으로, 오늘의 모임은 상사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건 나와 아이작이 윗선과 상의 없이 벌인 짓.

그러니까 여기서 상사를 부르네 마네 지껄여도 차원신용금고에는 타격이 가지 않는다.

이건 그냥, 은행원 두 사람이 저지른 일탈.

당연한 얘기지만 나와 아이작이 여기서 무슨 소릴 하든 징계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뒤에서 엘라마와 이사회에게 전부 허락을 받아 두었으니까.

“네놈들과 얘기해 봤자 시간 낭비다. 따라와라, 미놀리. 만일 오지 않는다면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

알리가는 막내딸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아디젠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바이나우스의 개새끼가 간이 부었구나. 미놀리가 연락하길래 네놈도 같이 있을 걸 알고도 멀리 왔더니 제멋대로 구는군. 난 내 딸을 데리러 온 거지. 네놈과의 사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장인어른, 미놀리 씨가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해 두시지요.”

“자기, 나 괜찮아. 아빠, 앉으세요. 오늘 할 얘기 많으니까 서 있으려면 힘들 거예요.”

부친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음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미놀리.

평소와 다른 막내딸의 모습.

그 얼굴에서 마치 자신의 아내와도 같은 기백을 목격한 알리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고, 이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원신용금고 간부나 이사 말고 다른 분을 모시기로 했으니 기다리시지요. 분명 즐거운 모임이 될 겁니다.”

“…….”

알리가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살기를 담아 나를 노려보았다.

당연하지만 카드를 쥐고 있는 건 이쪽이기에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내 속셈을 절반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슬슬 도착하실 때 되었는데.”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멀리서 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은 풍채 좋은 장년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였다. 허리에서 뻗은 꼬리는 꼿꼿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전투 태세.

맹수와도 같은 기세가 걸음걸이에 담겨 있지만, 절대로 우아함을 잃지 않는 그 모습에선 중후한 노기가 느껴졌다.

나페르 바이나우스.

클래식한 후리텐 신사의 표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장인 특유의 억센 인상과 단련된 근육을 지닌 거한이었다.

아디젠은 비교적 여리여리한 미남자였기에 나는 잠시나마 두 사람이 정말로 부자지간인지 의심하고 말았다.

“아버지, 오셨습니까.”

이번엔 아디젠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다만, 90도는 아니다. 이젠 한 가정을 책임지는 사내로서 예전보다 대등하게, 남자 대 남자로서 아디젠은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레가 놈과 날 불러다 무슨 작당을 할 속셈이냐. 지금이라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겠다면 내 너흴 벌하진 않으마.”

“벌? 누구 마음대로 네놈이 내 딸의 처분을 정하려 들어.”

“성격 하난 여전하군.”

“네놈이야말로.”

노골적인 증오를 감추지 않는 알리가.

나페르 역시 알리가를 똑바로 주시하며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양쪽 다 자존심 때문인지 문밖에 경호원들을 두고 왔지만, 수틀리면 칼부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

신혼부부의 아버지이자 양가의 가주인 둘은 자신들의 막대한 권한을 내세워 자식들을 찢어 놓으려 하고 있었다.

별개의 인격체인 아들딸을 소유물인 것처럼 다루는 태도.

하지만 그런 태도로 대화에 임하게 둘 순 없지.

“이야기를 하려고 모신 건데, 두 분 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시니 곤란해졌습니다. 이쯤에서 중재를 요청해 볼까 싶습니다만. 나오시죠.”

내가 말을 마친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한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얼굴을 본 양가 어르신들은 석상처럼 제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