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54화

차원신용금고에게 상당한 금액의 ‘수고비’를 받은 경찰청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은행원들이 병원을 나선 직후 찾아온 그들은 병상에 누운 전파 납치범들을 가차없이 체포해 끌고 갔다.

다만, 그들이 압송되는 모습을 김지안과 엘라마가 보는 일은 없었다.

둘은 이미 촬영팀의 차량을 타고 키키와이 북부 해안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오셨군요.”

김지안이 도착한 시점과 비슷한 타이밍에 사우 박사와 다른 나노이인 연구원들 역시 비행선을 타고 날아왔다.

이곳은 기다란 키키와이 본도 북부 해안선 중에서도 절벽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프라이빗 비치.

아직 근방에서 개발이 시작된 건 아니어도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소유하고 있는 사유지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이곳이라면 그 누구도 나노이 인들을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투사된 홀로그램.

사우 박사는 정중하게 김지안과 엘라마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천막으로 걸어갔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아프로는 콜로서스 마크 원에 탑승해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근처에 설치된 모니터에 비추는 영상은 조종석 내부의 블랙박스에 의해 촬영된 것이었는데, 우주에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구조된 사람인 척 연기해야 하는 아프로는 각종 특수 분장을 마친 상태였다.

“세상에나… 로렐트리의 특수분장은 위대하군요.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거 같아 보여요.”

김지안이 정겹게 말을 걸자 화면 속 아프로가 손을 흔들었다.

<멀쩡합니다. 계속 메이크업 받고 있었는데요, 뭐.>

“많이 자연스러워지셨어요.”

군필자로서 갓 사회에 돌아온 전역자를 놀리듯, 김지안이 아프로에게 말했다.

<하하… 사회인이니까요, 이젠.>

아프로는 그저 쑥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뭐야. 아프로 씨 벌써 지안 씨랑 친해진 거예요?>

<네, 어쩌다 보니….>

아프로는 김지안이 보는 앞에서 계속 연기 수업을 받았던 만큼 둘은 가벼운 농담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감독님, 전부 스탠바이 오케이입니다.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

이번엔 병원에 오지 않고 천막 안에 남아있던 조감독과 촬영팀의 절반이 돌아온 매스터한트를 반겼다.

김지안과 일행이 병원에 다녀오는 동안 그들은 이곳에 계속 남아 아프로와 함께 마저 촬영 준비를 마쳤다.

모니터에 비춘 홈쇼핑 채널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의 스튜디오에선 사회자들이 한참 전파 납치범이 키키와이 시내에서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뉴스 프로그램이 아닌데도 불편한 소식 전하고 있는 점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본래의 취지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음에도 수많은 시청자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져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에 전해드린 바와 같이 현장에서 대기 중이던 기술진과 의료진이 파일럿, 아프로 사스 씨를 무사히 0.1 차원의 우주에서 구출해냈습니다.]

[다행히도 아프로 사스 씨의 생명엔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부상 역시 경상에 그친 모양입니다.]

화면 속 진행자들이 말을 마친 직후, 천막 안에 컴퓨터를 설치해 SNS와 시청자 게시판을 확인하던 모니터링 팀이 동시에 말없이 엄지를 세웠다.

“전부 계획대로네요.”

어딘가 엘라마를 방불케 하는 표정으로 김지안이 웃었다.

“애썼다.”

그 모습을 보는 엘라마는 사뭇 즐거워 보였다.

모든 것은 김지안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김지안이 보여주길 엘라마가 기대했던 이상의 지략.

‘그 어떤 사고나 사건이 터지더라도, 사람들은 생중계와 방송이 이어지는 한 계속 이를 지켜볼 겁니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들게 되겠죠.’

화면에 표시된 실시간 시청자의 숫자는 이미 예상했던 숫자를 한참 넘어서고 있었지만 시스템이 다운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노이의 기술로 제작된 양자 컴퓨터를 서버로 사용하고 있어 수십 수백의 차원에서 모여든 트래픽을 전부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SNS는 나노이를 향한 동정 여론과 오미나이 의원 등 전파 납치 및 펄스 폭탄 투하 계획에 관여하던 이들을 향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계 오피니언 리더를 포함해 어린 학생까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나노이를 구하자고 주장하는 지금.

감히, 앞에 나서서 민의를 거스르려 하는 정치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사회는 이번 안건을 부결한다.’

‘나노이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론은 이미 기울어졌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고려하지.’

‘대중이 스스로 눈을 가리고 거짓을 참이라 믿는 한, 그들에게서 나노이를 구하는 데에 필요한 도움을 이끌어내는 건 무릴세.’

본점 이사들을 설득하려 시도했던 날,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라마 역시 김지안에게 간곡히 부탁받은 게 아니었다면 나서기 싫었던 자리.

‘제 계획이 맞긴 한데, 그분들 상대하는 걸 제가 할 순 없는 일이잖아요.’

엘라마는 실실 웃으며 그딴 뻔뻔한 소리를 하는 김지안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실은, 이사들과 대화할 때, 엘라마의 의견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지안의 부탁에 못 이겨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의 주장을 펼쳤다.

‘사람은 실수를 범합니다. 그들이 모여 이뤄진 집단은 더더욱이나.’

‘하지만 그 우매함조차도 사람의 본성인 법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이사님들께서 말씀하시는 무지몽매한 바보들이고 이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겁니다.’

‘저희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걸어야 할 테죠.’

자신은 혼신의 연기력을 쥐어 짜내면서까지 무어라 말했던가.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괴물에게서 구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같은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노이의 구원은 차원신용금고에 크나큰 이익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모쪼록 추가적인 지원을 재고해 주십사 합니다.’

그날은 여느 때보다 과도하게 연기에 몰입하고 말았다.

“…….”

아무리 연기라곤 해도 답지 않게 낯부끄러운 말을 쏟아냈다는 사실을 떠올린 엘라마의 표정이 천천히 구겨졌다.

-퍽

“아! 갑자기 왜 때려요. 미쳤나봐.”

“다 네놈 탓이다.”

“네?”

“닥쳐. 아직 한 대 남았어.”

-퍽

매스터한트 감독이 다른 데에 한눈을 판 사이 엘라마는 김지안의 뒤통수를 두 대나 때렸다.

입행 이래 처음으로 부하에게 휘둘렸다.

자신이 이사회를 상대로 무슨 말을 했는지 김지안은 알지 못하겠지만, 괜시리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진짜 상사만 아니었으면 한 대 줘패는 건데….”

“방금 뭐라 했냐.”

“소장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늘 존경합니다. 충성충성.”

“…….”

두 사람이 치고받는 동안에도 콜로서스는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아프로 파일럿이 재출격을 요청했다는데요, 현장에 계신 의료진이 과연 이를 허락할지….]

[자세한 상황, 매스터한트 감독님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의 쇼 호스트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의 라이브 진행자는 계속해서 시청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곧바로 매스터한트 감독과 함께 아프로를 찍은 콕핏 카메라의 영상이 화면에 함께 표시되었다.

특수 분장으로 온몸에 상처가 난 것처럼 꾸민 아프로는 여전히 두 눈에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감독은 의료진을 불러와 사전에 짜둔 각본을 읊게 했다.

아프로 사스는 멀쩡하고 언제든 출격이 가능하다는 것이 의료진의 견해.

<절대…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세요!>

시청자는 그 불타는 투지에 공감하고 감동을 표했다.

[본때를 보여줘!]

[그래, 우리도 여태껏 기다렸는데 이건 보고 가야 할 거 아냐!]

그러한 응원을 등에 업고, 콜로서스 마크 원은 다시 출격 준비에 돌입했다.

아까 가짜 양산기가 폭파된 이후 다시 외부 장갑만 더욱 멋진 디자인으로 변경된 기체는 조명 아래에서 그 화려하고 강건한 자태를 뽐냈다.

“아프로, 콜로서스 MK-2, 갑니다!!”

-콰아아!!

특유의 기합소리와 함께 0.1 차원의 우주를 향해 발진한 콜로서스.

그 궤적은 고향의 별 나노이를, 그 미래를 향해 이어져 있었다.

* * *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과 홈쇼핑 채널의 실시간 생중계의 조회 수 및 시청률은 유례없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쿠궁!

괴수들의 몸이 우주 공간에서 터져나가며 발하는 광채가 조종석 벽을 진동시킨다.

긴장한 얼굴의 파일럿.

콕핏 안의 블랙박스, 콜로서스의 외부 카메라, 그리고 우주를 누비는 초소형 드론캠이 찍은 영상이 계속해서 교차 편집되며 한 편의 영화처럼 전쟁터의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비상: 11시, 3시 적기 접근 중]

-쿠우웅!!

우주 괴수의 날개가 만들어낸 충격파에 기체가 요동친다.

그 진동은 고스란히 안전한 천막 안에서 콜로서스를 원격으로 조종 중인 아프로의 콕핏을 실감나게 뒤흔들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초고속 동기화를 통한 것으로, 시청자들이 모두 아프로가 위험한 우주 공간에서 전투 중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

안전과 임장감을 동시에 확보하며 만들어낸 이 컨텐츠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우주 전쟁을 간접적으로 경험시켜주고 있었다.

영상 흐르는 건 오케스트라의 합주.

팀파니가 침중한 공기를 만들어내고, 그 위에 더해진 금관의 유니존은 다가오는 파멸의 발걸음을 표현한다.

적으로 가득 찬 0.1 차원의 우주 공간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는 건 한 기의 콜로서스.

질주감 있는 현악기의 트레몰로가 그 움직임을 악보 위에 그려나갔다.

중과부적, 압도적 불리.

하지만 미남자는 악귀나찰을 방불케 하는 기백을 내뿜으며 계속해서 조종간을 밀어냈다.

-고오오오!!!

신비의 물질, 단원자 금이 반응로 내부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콜로서스에게 에너지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기체 안팎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신비의 기운.

소유자가 지닌 의지의 크기에 반응해 영원의 힘을 부여한다는 전승은 나노이의 선진 기술에 의해 다시 한번 현실이 되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우주 괴수.

그 한가운데에서 찬란한 황금 거인으로 화한 콜로서스는 무쌍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격추 수 210, 226…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반응로 황금률 임계치 도달!!>

<지금이면 가능해요!! 아프로 씨!!>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소리치는 오퍼레이터 3인방의 목소리.

일반적인 우주 괴수보다 네 배는 큰 특수 개체가 천천히 행성 포위망을 벗어나 콜로서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사우 박사님!!>

<좋아요. 시험 운용,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파이널 퓨전을 승인합니다.>

<파이널 퓨전, 승인!!!>

<모노아토믹 드라이브 ON!!>

<골든 콜로서스 시퀀스 레디!>

-촤아아아!!

천막에서 케이스에 수납된 채 대기 중이던 다른 형태의 콜로서스 4체가 로켓 추진체를 달고 일제히 0.1 차원의 우주로 쏘아져 나갔다.

유성우를 방불케 하는 광경.

시청자들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합체!>

우주를 건너온 네 대의 콜로서스가 추진체를 분리하고 복잡한 변형을 시작했다.

-콰앙!!

-철컥!!

팔다리를 접은 아프로의 탑승기에 매끄럽게 빛나는 사지가 조인트.

본체를 뒤덮고 있던 황금의 기운이 새로운 팔다리를 잠식해 간다.

완성된 것은 황금의 거인, 골든 콜로서스.

그리고 나노이의 새로운 수호신이 탄생한 다음 순간.

[TO BE CONTINUED]

화면이 암전되고 하얀 글자의 자막이 떠올랐다.

[…….]

[…….]

[…….]

[뭐임]

[뭐긴 XX아 방금 합체한 거 못 봤냐]

[X발 X싸고 온 동안 뭐 놓친 거임 나]

[저거랑 같이 구매하면 숙박 패키지 추가 할인에 스위트룸 추첨 가능한 거 맞죠?]

[개이득이네 저거 하나 사면 키키와이 여행 10배 싸게 가는 데에다 업글 달려있자너]

[해충 구제 기능 맘에 든다, 우리 과수원에 한 대 장만해야겠음]

[허미 딱 좋은 데서 끊어부럿누 감질맛 나게…]

[이거 돈 된다에 내 손모가지 건다 한정판 발매고 앞으로 비슷한 게 나올 수가 없어]

[사지 마 시발 미친놈들아! 이딴 걸 왜 사고 지랄이야!! 돈이 남아도냐 시발?]

[└지 물량 확보 못할까봐 투기충 새끼 뿔난 거 보소ㅋㅋㅋㅋㅋ]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방송 종료 안내를 아쉬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즉시 시작된 주문 접수.

[구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Y/N]

[네. 네네네네네. 씨발 다섯 개 주세요.]

[구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Y/N]

[YYYYYYYY]

[구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Y/N]

[합체 되는데 외안삼?]

.

.

.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많은 숫자의 콜로서스를 확보하기 위해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 기간을 최대로 늘려 펀딩에 참가하거나 홈쇼핑 채널에서 결제를 진행했다.

[펀딩 달성률 100,000% 도달!]

[생방송 중 재고 소진!]

[많은 성원 감사드립니다!]

그날,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올린 매출은 47조 굴덴.

13개 차원의 수억 명에 달하는 소비자가 기꺼이 자신의 지갑을 열어 콜로서스 대량생산에 필요한 자금을 지불했다.

또다시, 사람이 사람을 구해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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