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55화

콜로서스 로보틱스가 역사에 길이 남을 크라우드 펀딩과 홈쇼핑 매출을 기록한 직후.

충분한 양의 원자재를 확보한 생산 기지는 엄청난 속도로 양산형 콜로서스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파일럿들은 안전한 키키와이에서 딜레이 없는 원격 조종으로 콜로서스를 움직여 나노이와 다른 행성을 포위한 우주 괴수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0.1차원의 태양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척안의 괴물들은 하나씩 먼지로 화해 우주 공간에 흩어지고 있었다.

<17209호, 격추당했습니다!>

<바로 스페어 기체 출격시켜!>

<라저! 신경망 동조 재개!>

우주 괴수의 숫자와 비할 순 없었지만, 콜로서스를 조종하는 파일럿들의 실력은 일당백의 베테랑.

게다가 파괴당한 기체를 회수함과 동시에 새롭게 생산된 콜로서스가 우주 공간으로 사출되어 전투를 속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지금, 나노이인들이 패배할 이유 따윈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량이라면 우리도 많다! 덤벼!!>

<날-봐-라-!!!!!!!!>

<플라즈마 블레-이드!!!!!!!!>

<짜요코오오오오!!!!!!!>

어느샌가 아프로의 열혈 컨셉이 전염된 듯 장비한 무기의 이름부터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까지 온갖 괴성을 질러 대며 콜로서스를 돌격시켰다.

몇 번을 격추당해도 새로운 콜로서스가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 괴수들을 덮친다.

언제나 숫자로 압도하는 쪽이었던 우주 괴수들에겐 생소한 경험.

자본주의의 힘으로 확장된 생산 기지에서 말 그대로 쏟아지는 콜로서스의 숫자는 가히 강철의 파도라고 형용해도 될 정도였다.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으며 적을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물 병기를 조상으로 둔 우주 괴수조차 그 기백에 밀려 행성 포위망을 풀기 시작했다.

점점 역전되어 가는 전세.

우주 괴수는 줄어들었고, 이에 맞서는 콜로서스는 늘어나기만 했다.

우주 괴수가 점령하고 있던 나노이 태양계 최대의 혹성을 콜로서스가 포위해 최후의 섬멸 작전을 마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7일.

우주의 평화는 지켜졌다.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용기와 희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숫자의 폭력으로.

* * *

나노이 행성이 완전히 우주 괴수의 위협에서 벗어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아프로를 포함한 파일럿들은 자신들이 최대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로 통신의 회복을 꼽았다.

전파 납치가 끝나고 일정 수의 우주 괴수가 소멸된 이후, 나노이인들은 자신들의 고향과의 교신을 성공시켰다.

6-2차원에서 참전 중이었던 우주군의 용맹한 전사들은 무사히 자신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얼굴을 화면 너머로 확인하고 용기백배해 적과 맞설 수 있었다.

5월 4일은 0.1태양계에 자리 잡은 모든 행성의 전승기념일로 선포되었고, 군인과 연구원들은 고향에서 훈장을 수여받고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개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 아프로의 약진이었다.

일약 초차원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그는 우주 괴수와의 전쟁을 치르며 겪은 일들을 자서전으로 출간했고, 금방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약속했던 대로 베르게네프 매스터한트 감독은 자서전의 판권을 사들였고, 가능한 한 빠르게 영화화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아프로와 그의 연인이 결혼해 아이를 가질 즈음엔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김지안의 예상이었다.

한편, 각 차원에서 홈쇼핑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콜로서스를 배송받은 이들 역시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 * *

“합체!!”

-기잉!!

-철컥철컥!!

콜로서스에 탑재된 우수한 AI가 소유자의 목소리에 반응해 허공에서 변신 합체를 마치고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양산형 기체엔 단원자 금 반응로가 탑재되어 있지 않다.

고로, 전신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궁극의 형태인 골드 콜로서스로 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슈퍼 얼리버드 패키지 D를 구매한 고객은 자신이 소유한 다섯 대의 콜로서스를 합체시킬 수 있었고, 그는 그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양산형이야. 원오프 기체에겐 없는 맛이 있단 말이지….”

41차원의 아열대 지방 농가. 저살상력 모드로 마당의 해충들을 모조리 썰어 버리는 콜로서스를 바라보며 농부는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지금은 귀농해 과수원을 경작하고 있지만, 한때의 그는 우수한 공학도이자 서브컬쳐 애호가.

그의 눈에 비춘 합체거신 콜로서스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우주 공간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를 겪었음을 알리는 외부 장갑의 손상은 기체에 새겨진 날것의 역사.

수많은 차원의 사람들의 후원으로 치러진 우주 전쟁의 기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외부 장갑에 남은 손상을 수리하지 않은 ‘빈티지 에디션’을 주문한 건 이러한 까닭이었다.

“오우. 빈티지….”

기동 종료 후에도 온기가 남아 있는 장갑을 쓰다듬으며 농부는 탄식했다.

[감사를 담아. 보로도프 중위.]

파일럿의 필적을 레이저로 재현해 장갑에 새긴 글자를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는 농부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새겨진 고유 번호와 후원자의 이름.

남들이 바라보는 그는 평범한 농사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도 자신과 나노이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나의 우주를 구해 내는 데에 이 남자가 손을 보탰다는 사실을.

훗날 자식이 태어난다면 말해 줄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은 올바른 길을 골랐노라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 기체는 나노이 태양계를 우주 괴수의 손에서 지켜 내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역전의 콜로서스.

그리고 이 콜로서스는 자신의 결심 없이는 제작되어 전쟁터에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농부는 전원을 끈 콜로서스가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지붕 위에선 은하수가 맑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손을 뻗어 이뤄낸, 작고 작은 기적을 축복하는 것처럼.

* * *

6-2차원.

키키와이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무인도.

대부호의 사유지로 알려져 여름철 파티 시즌이 아닌 한 사람의 출입이 엄중히 금지된 이곳.

저녁노을이 드리운 해안가에는 두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하나는 흰 털의 미노타우로스 은행원, 불파사 비슈티.

나머지 하나는, 다리 대신 의족을 착용한 채 휠체어에 앉은 페르시猫族 노인이었다.

묘족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차이는 머리에 달린 고양이 귀와 꼬리 정도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을 곧게 편 노인이 발하는 조용한 기백은 미노타우로스인 비슈티와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새겨진 얼굴.

하지만 여전히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고 빛나는 안광을 동공에 담은 남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장 차림의 노인은 비슈티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네. 비슈티 과장.”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하대하는 노인에게, 비슈티는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네스먼토 준장님.”

“…이젠 이사님이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나.”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다만, 자네가 한 말은 옳아. 우리가 마무리 지어야만 했어. ‘그 괴물’들은.”

구E는 25차원에서 오랫동안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던 군인들로 이루어진 파벌.

그 무리를 이끌던 우두머리 중 하나로 꼽히는 노인은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주 괴수는 25차원 에라스무스의 군사 독재 정권이 적을 암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유전자 조작 생물로, 자연적으로 생겨난 생물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뿐.

차원신용금고의 전신 중 하나인 에라스무스 요정은행의 행원들은 은행에서 일하기 이전부터 민중을 탄압하는 군벌과 맞서 싸워왔고 수많은 동료들을 괴물의 손에 잃어왔다.

그 시체를 넘어 독재자를 살해하고 사람들의 손으로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데엔 성공했지만, 결국 연구소에서 빠져나간 살인 곤충은 다른 차원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0.1차원의 행성들을 괴롭히던 끔찍한 우주 괴수는 에라스무스의 독재 정권이 부리던 하수인이 진화한 결과물.

비록 나노이인들의 손을 통해서라곤 해도 저 가증스러운 괴물들이 모조리 박멸되었다는 사실은 구E 행원들에게 있어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주 괴수의 소멸은 그들의 고향 에라스무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구시대의 잔재를 마침내 정리했다는 뜻.

그리고 수많은 전우의 원수를 갚는 데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군. 행장이나 다른 신들이 말하던 것처럼.”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상념에 잠겨 있던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마침내 대전쟁 시대에 싸웠던 가증스러운 적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엔 군인이 아닌, 은행원의 신분으로서.

운명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눈은 마주 서고 있는 비슈티가 아닌 그 배후 어딘가 먼 곳을 주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긴 추모식이었네. 이젠 먼저 간 이들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군.”

오래전 같은 사명을 품고 싸우다 먼저 진 전우들을 그리며 노인은 눈을 감았다.

운명 같은 것을 믿은 적 따위 없었다.

하지만, 행장을 비롯한 구D 간부들이 제안한 키키와이 출장소 설립에 동의한 결과 구E는 해묵은 은원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만일 이 결말까지 전부 그놈의 운명이라면, 우린 모두 행장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 되겠군. 뭐, 기분은 나쁘지 않아. 우리도, 구D도, 서로 원하는 것을 얻었지 않은가.”

피식, 주름투성이 얼굴을 구기며 웃은 노인은 휠체어 바퀴 위에 손을 얹었다.

스케줄 상의 이유로 그는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놈들에게 신세를 진 건 확실하겠지. 만에 하나 행장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해도 빚을 갚지 않을 순 없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소?”

그렇게 묻는 비슈티에게 노인은 평온한 말투로 답했다.

“무슨 말일까. 나도 잘 모르겠어, 사실. 행장이 우리에게서 가져가려는 게 있으면 모를까. 그런 게 없다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방식으로 구E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소. 설마 ‘그 안건’에 관해 저희가 동의하기라도 바라는 건―”

“설마. 파벌 싸움의 이유인데. 고작 이 정도로 우리가 양보할 거라고 믿는다면 그 여자답지 않지.”

“어쩌면, 마침내 권능을 쓸 생각일지도 모르겠소.”

“흠….”

두 사람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행장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행장이 한 명의 신으로서 지니고 있는 권능은 절대적이었다.

그녀에게 빚을 진 상대에게서 원하는 방식으로 대가를 ‘추심’하는 힘.

어쩌면, 이번 일 역시 다음 이사회에 모종의 안건을 상정한 다음 강제로 구D를 상대로 ‘찬성표’를 추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만도 해. 그녀의 권능에 거스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이래서 함부로 놈들이 내미는 미끼에 손을 대기 싫었던 건데 말일세.”

두 사람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행장에게 진 빚을 적절한 수준으로 돌려주기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

“갚지 못한다면… 다음 정례 이사회에서 행장의 권능에 의해 강제로 안건을 통과시길 게 틀림없소.”

“그 전에 행장에게 진 빚을 갚아야만 해.”

“행장이 아끼는 아해가 하나 있던 거로 기억하네만. 3-1차원 출신의.”

“…김지안 대리를 말하는 것이오?”

“아마 맞는 것 같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비슈티 과장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한데, 김지안 대리는 무슨 일로….”

“그 아해가 위험할 때 자네가 구해 주는 건 어떤가. 이 정도면 행장도 납득할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네스먼토는 김지안 대리가 위기에 처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전파 납치범들이 키키와이에서 잡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위험한 차원으로 외근이라도 나가지 않는 한 은행원이 위험에 처할 만한 상황은 없어 보이는데.

“준장께선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정례 이사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아니. 분명 일어날 거야. 골치 아픈 일이.”

“…….”

“차원신용금고와 거래하고 싶어 하는 고객을 하나 알고 있어서 말이지. 출장소를 찾아가 보라고 말해 두었네. 걱정 말게. 신용은 충분하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글쎄. 무슨 말일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만면 가득히 띤 채 노인은 수행원과 함께 떠나갔다.

“사람 굴리는 건 여전하신 모양이오….”

보아하니 네스먼토 이사는 행장의 권능에 대응하기 위해 빚을 갚는 겸 김지안에게 모종의 시련을 내리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타 파벌의 행원에게 저만큼 관심을 보이는 건 오래 알고 지낸 비슈티조차 처음 보는 일.

그 말은 네스먼토가 나름대로 김지안을 인정했다는 뜻이겠지만―

“이번 일, 쉽진 않겠소.”

비슈티는 최소한 그 과정에서 자신이 심각한 편두통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 * *

.

.

.

“씁… 오늘따라 귀가 왜 이렇게 가렵지? 소장이 내 욕하나.”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당사자인 김지안 역시 곧 머리가 아파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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