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5화
“…이 자식은 고객님들 계시는 데에서 창피하게 호들갑을.”
참다못한 엘라마는 소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김지안의 뒤통수를 한 대 더 후려치기 위함이었다.
“김지안!”
“아니 진짜 불가항력이라서요!! 보세요 여기!! 물컵에서 이따만하게 생긴 괴상한 벌레가 튀어나왔는데―”
분노한 엘라마를 보고 당황한 건지 김지안이 손바닥을 휘휘 내저으며 데스크 위를 가리켰다.
“…음?”
그곳에는 밝은 은색을 띤 물체가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손톱의 절반만 한 크기.
김지안은 벌레인 줄 알고 냅다 손바닥으로 후려친 모양이었지만 엘라마에겐 그 형태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뇌리를 스치고 가는 불길한 예감.
“…지금부터 전원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죽여 버린다.”
엘라마의 경고에 근처에서 움직이던 아이작과 플루토의 모든 분신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예요, 소장님. 갑자기―”
“닥쳐.”
엘라마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김지안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
엘라마는 조심스럽게 근처에 있던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책상 위에 납작하게 찌부러진 물체를 관찰하자 낯익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적으로 건조된 작은 기계. 그 표면을 덮고 있는 나노이 연방의 문양.
-푸슈우
망가져 가느다란 연기를 내뿜는 초소형 비행선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야 엘라마는 떠올렸다.
“고객님.”
금일 오후에 모 VVIP의 긴급 대출 상담 예정이 잡혀 있고.
약속 시간까지 채 5분도 남지 않았으며.
“…고객님?!”
VVIP의 종족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크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죽으시면 안 됩니다 고객님!!!!!!!”
차원의 벽을 넘어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로 건너온 고객의 비행선은 거인 김지안의 손에 격추되었고.
이곳을 맡은 책임자는 그의 상사.
“…시발.”
바로 슬리크 엘라마 자신이었다.
* * *
아무래도 좆됐다.
그게 심사숙고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미리 쓰레기장을 견학하고 오는 걸 추천하도록 하지. 네놈이 조만간 안식을 찾게 될 곳이니까.”
“…….”
엘라마의 살기등등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쫄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용히 아까 벌레라고 생각한 물건을 후려친 오른쪽 손바닥을 살피자 좁쌀보다 작은 금속 가루 같은 게 잔뜩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다 기계 부품이라니, 실환가.
“죄송합니다….”
“사과해도 소용없다. 이번 일이 보고되면 해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 뭐, 그건 책임자인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과장 놈들, 벌써 신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군.
엘라마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힐끔힐끔 이쪽을 엿보던 불파사 과장과 라즈마 과장이 다른 방향으로 홱 고개를 꺾는 게 보였다.
“고객님의 비행선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랬겠지. 뭐, 이젠 아무래도 좋지만. 잠시 다녀오마.”
“어디 가시게요.”
“사람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노끈을 살 생각이다. 기분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놈 것까지 두 개 사 오도록 하지.”
“…….”
아니, 근데 진짜 억울해 미치겠다.
누가 물컵에 둥둥 떠다니는 물체를 보고 기계 공학이 무지막지하게 발달한 0.01차원의 비행선이라고 알 수 있을까.
최소한 나는 아니다.
“개에반데….”
비행선이면 어?! 알기 쉽게 기계음 같은 것도 좀 내주고! 어?! 어필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막말로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개미보다 작다며, 그걸 나 같은 평균적인 크기의 인간이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냐고요….
초거대 비행 요새라는 것도 지들 기준이지.
날아다니다 벌새랑 충돌하기만 해도 재난 영화 찍을 사이즈밖에 안 되는 주제에 내구성까지 저따구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전혀 안에 탄 사람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건 아니다.
단지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일이 갑작스레 벌어져서 체감이 안 될 뿐.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사과도 저들이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 제발.”
은행원으로 일하다 실수로 사람 죽였다고 소문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인지라 피해자에게 미안해지는 마음만큼 내 미래가 걱정될 따름이었다.
교통사고 났는데 상대가 운전석 클랙슨에 머리 박고 있는 걸 보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대로 감방에 가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6-2차원의 감방은 과연 어떤 곳일까.
내 죄명은 무엇이 될 것이며 어떤 형을 받게 될 것인가.
무한대로 크기를 키워 가는 암울한 상상에 엘라마의 말마따나 목을 매고 싶어졌다.
바로 그때.
-우웅!
<엄청난 환대를 기대하고 온 건 아니지만 너무들 하시는군요.>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녹색의 홀로그램 글자들이 사출되었다.
마치 공상 과학 영화와도 같은 광경.
여태껏 세계수도 그렇고 신기한 건 많이 봤지만 이건 이거대로 신기하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고오 고객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아아…!!!”
살아 있었구나!!! 손님!! 믿! 고! 있었다고!!!
<나노이의 과학력을 무시하시다니요.>
“네?”
<저기 찌그러져 있는 건 비행선에서 박리된 외부 장갑입니다. 당신이 공격한 건 질량을 가진 잔상이라는 거죠.>
“…….”
무슨 건담입니까, 당신네 비행선은.
<이걸 모르다니… 아무리 이쪽 차원의 기술이 나노이보다 2세기는 뒤떨어져 있다 해도 너무….>
“…….”
<지식 수준을 감안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크게 다치지 않은 거 같아 다행이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가 없다.
<본체는 보시다시피 회피 기동 후 스텔스 모드로 비행 중입니다.>
스텔스 모드면 보시다시피고 나발이고 안 보입니다 고객님.
손바닥으로 후려친 게 너무하다는 게 아니라 과학력을 무시당한 사실에 분개하고 있는 듯한데 저건 또 무슨 부심이냐, 대체.
<그리 괘념치 마시죠.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아, 예….”
엘라마는 비행선 겉에 조각된 것이 나노이 연방인가 하는 행성 국가의 문장이라고 말했다.
VVIP라고 한 데에다 나라의 문장을 비행선에 쓸 정도면 상당히 높으신 분이 틀림없다.
그리 생각하면 좀 나 같은 서민이 이해할 수 없는 사고 회로를 갖고 있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을지도.
일단은 저쪽에서 내 실수를 책잡지 않는 것 같으니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 대인배의 면모를 가진 멋진 손님이겠지.
아니면 단순히 이런 일을 자주 겪어 봤거나.
하긴… 원체 작으니….
“그, 고객님. 안전을 중요시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근데 고객님께서 어디 계신지 알 수 없으면 제가 또 실수로 부딪치거나 결례를 범할 것 같거든요. 스텔스 모드인가를 해제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후우, 어쩔 수 없군요. 배려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특유의 재수 없는 말투의 홀로그램 메시지가 허공에 나타나나 싶더니 화살표로 모습을 바꿨다.
그 끝이 가리키고 있던 건, 맙소사, 이번에도 내 물컵이었다.
돋보기를 갖다 대자 새하얗고 둥근 디자인의 비행선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 크기는 손톱의 절반도 되지 않아 맨눈으론 식별하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는데 그놈의 은색 외부 장갑이 분리되니 아까보단 훨씬 멋진 디자인으로 보였다.
아까 벌레인 줄 착각한 게 미안해질 정도.
“…근데 왜 물에 들어가 계신 겁니까.”
아직 입을 대지 않은 컵이긴 한데 기분이 좀 묘하다고.
<연료 보급입니다. 저희 차원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려면 차원 관문을 넘어야 하는데, 관문이 저희 행성보다 훨씬 커서 말입니다. 움직이는 데 적지 않은 에너지가 필요했죠.>
홀로그램 메시지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물을 연료로 쓰는 건 SF 소설에서나 보던 이야기다.
차원 관문 역시 그냥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널널하게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인데.
“살고 계신 행성이 차원 관문보다 작다는 말씀이신가요?”
<긍정Positive. 그렇습니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지구가 엄지손톱 크기로 줄어들면 블랙홀이 된다고 들었다.
아니, 이쪽은 애초에 행성 자체가 압축된 게 아니라 원래 작은 거라 문제가 없는 걸지도.
<차원 관문은 행성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에 부유하고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었다간 저희 별이 인력에 통째로 빨려 들어가게 되다 보니.>
우주 공간에 비행선을 띄워 날아왔다는 말이군. 크기는 작아도 기술력에 정평이 있는 0.01차원의 인간다운 방식이다.
“그렇군요. 0.01차원에 관해 자세히 아는 게 없던지라…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호기심이 샘솟았지만, 굳이 고객을 상대로 일일이 호기심을 해결할 순 없는 법이라 그냥 닥치고 일이나 하기로 했다.
“그보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대출 업무를 맡고 있는 김지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질책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일은 됐습니다. 그 정도로 저희 비행선이 망가질 리는 없으니. 이쪽이야말로 소개도 없이 이것저것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군요. 나노이 행성방위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리바이 사우입니다.>
“사우 박사님께선 명망 높은 로봇 공학 권위자시다. 더는 실례를 범하지 말도록.”
“넵!”
아까 내 파리채 블로킹에 비행선의 외부 장갑이 박살 난 걸 보고 트라우마가 생긴 듯 엘라마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날 노려보며 말했다.
“귀한 분이 오셨군요.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위층에서 들어보도록 할까요?”
원래는 엘라마를 직접 만나러 온 VVIP라고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찌 된 일인지 나도 같이 2층의 상담실로 향하고 있었다.
사우 박사의 비행선은 나와 엘라마의 뒤를 졸졸 따라 날아오고 있었는데 기분이 무척이나 묘했다.
별의별 종족이 다 존재하는 이쪽 세상에서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지성체와 마주치게 될 줄이야.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홀로그램 글자를 투사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정령이라도 대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상대는 엄연히 나와 같은 인간.
단지 0.01차원의 생명체라 크기가 엄청 작을 뿐이다.
행성방위연구소의 소장이라고 들으니 뭔가 거창해 보여도 사우 박사 역시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VVIP도 은행 와서 돈 빌릴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평소였다면 플루토 씨가 다과를 준비했겠지만 오늘은 어렵겠군요. 바로 어떤 대출을 원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VVIP라고 하니까 또 어마어마한 금액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 같은 신입이 맡기엔 부담스럽지만 1,300억 굴덴의 대출도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았던가.
분명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
<미리 엘라마 씨에게 설명드리도록 비서에게 지시했는데 통신 장애로 인해 전달이 안 된 모양입니다.>
“이런. 그런 문제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번거로우시지만 다시 한번만 설명해 주셔도 될까요?”
<그럽시다.>
사우 박사는 반듯한 폰트의 홀로그램 글자를 차례차례 허공에 투사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얼마나 융자를 받으려 하는지 적기 시작했다.
<나노이 행성과 이웃 별들이 속한 은하계는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거대 우주 괴수들의 습격이 지금도 우릴 위협하고 있죠.>
“거대… 우주 괴수요?”
뭐지. 번역 오류인가.
<우린 행성을 수호할 초거대 로봇 시리즈를 양산할 계획입니다. 필요 예산은 최소 40조 굴덴을 예상하고 있으며 상환 방법은―>
엘라마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는 퓨즈가 나간 델 몬테 지점장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구냐, 현질해서 엘라마한테 종족 변경권 사용한 새끼.